〈 16화 〉 악마의 아이
* * *
애런은 빛이 희미해져 가는 검을 비스듬하게 휘두른다. 헬슨의 목을 처음 베었을 때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강한 참격이었다. 헬슨의 몸은 두 동강 나서 가슴 부분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큭큭큭… 크하하하하!!!”
머리가 붙은 헬슨은 방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아까 전보다 마기도 더 짙어졌고 이제는 머리에 검은 뿔도 생겨나 마족처럼 보였다.
“이 기운, 이 느낌, 이 부조리한 강함! 아주 잘 알고 있다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애런은 설마 하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이 커졌다.
“너, 나를 죽였던 용사로군? 모습은 바뀌었지만 느껴지는 검술은 비슷하군.”
애런의 걱정대로 전생 용사였던 애런이 죽였던 마왕이다. 애런은 순식간에 헬슨에게 접근해서 몇 번이고… 몸이 토막이 나서 가루가 될 때까지 검을 휘두른다.
“약해… 약하다. 힘을 잃었나 보군 용사.”
하지만 몸이 토막이 나도, 가루가 되어도 헬슨의 몸은 액체가 되어 원래대로 돌아온다. 믿지 못할 광경에 이자벨라도 당황해 얼빠진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성녀님! 다시 기도해요. 다시 한번..!”
“안 된다. 너랑 다시 만났는데 다른 사람이 방해하게 두겠느냐?”
헬슨이 몸에서 짙은 마기를 뿜어내 방을 가득 채운다. 검은 마기는 방의 벽을 녹이고, 썩게했지만 신성 마법으로 강화된 애런이나 이자벨라는 녹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짙은 마기에 숨을 쉬지 못하고 컥컥 소리를 내더니 이내 기절한다.
“음… 죽일 생각이었다만, 아직은 나도 힘이 부족하군.”
헬슨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찬다. 그리고 애런이 휘두르는 검을 아주 쉽게 두 손가락으로 잡아낸다. 애런이 힘을 줘도 검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용사가 이런 꼴이 되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이게 정녕 단신으로 마족의 침공을 막아내고, 마족이 두려워하며 마계에만 박혀있도록 만든 용사란 말인가?”
헬슨… 아니 마왕은 실실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 애런의 이마를 때리자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며 애런은 날아가 벽에 세게 부딪친다.
“이 정도로는 안 죽나? 생명력이 조금 질기다만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군.”
“크학..!”
애런은 피를 토해냈고 입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이자벨라가 기도로 신체를 강화해주지 않았다면 이마를 맞은 시점에서 머리가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떠오르는군.”
마왕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쓰러져있는 애런을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내가 죽기 직전 너는 나를 이렇게 내려다봤었지. 건방지게도 내 왕좌에 앉아서 무심하게 말이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손가락을 튕기자 그대로 충격이 전해져 애런의 가슴을 가격한다.
“커헉!”
“아직 부활이 덜 되어서 그런지 이 몸 주인의 기억이 흘러들어오는군. 아일라… 그래, 지금 네 몸의 동생인가?”
“너…”
애런은 눈을 부릅뜨고 마왕을 쳐다본다. 마왕은 그 시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악하게 웃으며 말한다.
“성기사를 부르러 갔다더군. 그래, 너를 살려두었다가 동생이 오면 네 앞에서 죽이는 건 어떻나?”
“이… 씨발 새끼가…”
“큭큭… 그래, 이제야 조금 인간답군. 나를 죽였던 시절의 너는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서 재미가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사람다운 감정이 있는 모양이라서 아주 좋아.”
온몸의 뼈가 부서진 것 같지만 애런은 힘겹게 자세를 고쳐잡아 무릎을 꿇고 앉는다.
“오..? 설마 나한테 빌기라도 할 셈인가? 그것도 좋지. 동생만큼은 살려달라고 빌어봐라. 마음에 들면 네 동생은 고통 없이 죽여주마.”
“좆까… 내가 머리를 숙여도 너 같은 새끼한테 숙이겠냐?”
이제껏 없던 신앙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넘지 못할 고난과 시련은 애런의 마음에 없던 천사에 대한 믿음을 억지로 만들어냈다.
애런은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한다. 마왕은 마왕답게 오만방자하게 애런이 기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제는 용사도 아닌 평범한 애런의 쓸데없는 발버둥이라고 생각하며.
“전생 용사 애런 그리고 현 애런 베커가 바랍니다.”
아일라를 지키기 위해 전생의 자신을 평생 가혹하게 만들었던, 죽지도 못하고 마족을 죽이기 위해서만 굴렸던 천사에게 머리를 숙이고 바란다.
“저 마왕을 무찌를… 아니, 그 정도까지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죄인이 되겠습니다. 제가 저 마왕을 이 몸에 붙들겠습니다. 그리고 평생 저 녀석을 이 몸에 봉인하겠습니다. 평범한 저에게 이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소서…”
애런의 기도에 답하듯 마기로 가득 찼던 방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자벨라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방의 벽은 구름이 되고 천장에는 밝고 따뜻한 빛을 뿜는 태양이 떠 있다.
“치천사. 설마 용사도 아닌 이 녀석의 기도가 네게 닿는다는 거냐?”
마왕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애런에게 손을 뻗지만 거대한 날개를 펼친 천사들이 검으로 그 손을 막아낸다.
“비켜라!!”
하지만 마기를 둘러 강화한 마왕의 주먹은 검을 녹이고 막아내던 천사들의 몸이 썩어가게 했다. 몸이 반쯤 녹은 천사는 땅바닥에 고꾸라진다.
그리고 마왕은 기도를 하고 있는 애런을 향해 주먹을 뻗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주먹은 닿지 못했다. 그 앞에는 순백의 날개 4장을 펼친 지천사 두 명이 막아섰다. 마왕의 주먹을 가볍게 한 손으로 막은 지천사가 손짓하자 하얀 기둥이 떨어지며 마왕의 몸을 짓누른다.
마왕은 땅에 박힌 채로 고개만을 들어 기도하는 애런을 올려다본다.
“거룩한 천사님에게 마왕 봉인의 합당한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부활한 마왕이 헛된 욕망속에서 죄를 범하기 전에 부족하고 연약한 저에게 그를 막을 힘을 주시옵소서. 부디 천사님의 대행자 역할을 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애런의 머리 위에 있는 거대한 문이 열리며 치천사, 미카엘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있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하다. 허나 마왕을 제 몸에 봉인하겠다는 마음가짐은 부족한 믿음을 채우고도 충분하다.”
미카엘이 손가락을 펼치자 애런의 손에는 새하얀 십자 모양의 단검이 생겨난다.
“그 단검으로 너의 각오를 증명하라.”
애런은 단검을 두 손으로 쥐고 힘겹게 일어선다.
‘이걸로 마왕을 찌르라는 건가.’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고 마왕에게 다가간다. 애런이 가는 길을 막지 않도록 천사들은 길을 비켜준다. 그리고 전생에 이어서 이번 생에도 숭고한 희생을 하려는 애런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담아 고개를 숙인다.
“네 놈이..! 네 놈이 또 나를!!”
마왕은 기둥이 짓눌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짙은 마기를 뿜어내며 위협한다. 하지만 밝은 태양의 빛에 마기는 정화되어 사르르 사라진다.
“기어코 나를 제 몸에 봉인하려는 것이냐!! 그렇게 된다면 이제 너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텐데!”
“... 그렇겠지.”
애런은 두 손으로 단검을 쥐고 들어올린다. 단검의 날이 태양의 빛을 비춰 반짝거린다. 마왕의 눈은 공포에 파르르 떨리며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른다.
“전생처럼 완벽하지 못하니까… 평범한 몸이니까 내 몸 성히 끝내지는 못하겠지. 그러니 너는 내 동생을 입 밖에 꺼냈으면 안 됐어. 그러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나에게 이런 각오가 서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푸욱!
애런은 단검으로 마왕의 등을 내려찍는다. 단검에 찔린 마왕의 몸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마왕의 몸은 스르르 사라지며 단검을 타고 애런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온몸이 썩어가는, 터지는,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어깨에는 역십자가의 흉터가 생긴다.
“크으..!”
몸의 혈관을 타고 마기가 흐른다. 심장이 피를 펌프질할 때마다 피가 아닌 마기를 온몸으로 흘려보내며 전신이 썩어가는 듯한 고통이 몸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고통스럽다. 이가 부러질 정도로 입을 꽉 다물고 정신이 나갈 듯한 고통을 견딘다.
“너의 각오는 잘 보았다.”
미카엘은 문을 열고 나와서 직접 애런의 몸에 손을 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애런의 등에 거대한 십자가를 그린다.
피부가 타는 냄새가 나며 몸이 불타는 고통이 느껴지지만, 마기에 의한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애런의 등에 십자가가 완성되자 온몸의 마기는 진정되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생에 마왕의 목을 벤 용사 애런, 환생하고는 마왕을 제 몸에 봉인한 애런 베커. 네 몸에는 비록 마왕이 있고 네 존재는 이제 인간이 아니지만…”
미카엘은 휙 돌아서며 문으로 다시 걸어가고 그 뒤를 지천사와 다른 천사들이 따른다.
“네 죄를 사하마.”
문은 닫히고 방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애런은 아까 겪었던 고통 때문에 입에 거품을 물고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금방 깨어났다.
손을 쥐었다 펴며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서보니 몸이 평소처럼 잘 움직여졌다.
“몸이 멀쩡해.”
부러졌던 뼈는 다시 붙어있고, 터졌던 혈관도 정상이 되어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등에 그려진 십자가와 어깨에 그려진 역십자가의 흉터뿐이다.
“... 으으... “
마기에 숨이 막혀 기절했던 이자벨라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애런의 등과 어깨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애런 님, 등과 어깨에 생긴 것들은…”
“아, 정신 차렸어요? 몸에 붙여줄게요.”
“아니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마왕은 어디 가고 등에 생긴 십자가랑 어깨에 생긴 역십자가는 뭐고요?”
“힘이 부족해서 천사를 불러서 제 몸에 마왕을 봉인했어요.”
“네?! 어… 잠시 상황 파악을 못 하겠네요…”
눈살을 찌푸리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했던 이자벨라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방에 남아있었던 것인지를 떠올렸다.
“애런 님, 제 말 잘 들으세요.”
머리를 몸에 붙여주려고 하는데 이자벨라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기에 머리를 들어서 눈을 맞췄다.
“네.”
“곧 아일라 님이 성기사들을 데리고 올 겁니다. 그때 당신을 본 성기사들을 전부 죽이세요.”
“네?”
애런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굳이 그들을 죽여야 하는가.
“전부 아일라 님을 위한 것이니 제 말을 들으세요. 그동안 정이 들었다고 그들이 애런 님을 죽이는 것을 머뭇거릴지언정, 당신은 그들을 죽이는 것을 머뭇거리지 마세요.”
“네? 영문을…”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애런 님의 어깨에 있는 역십자가 흉터를 보게 된다면 그들은 당신의 동생인 아일라 님을 인질로 잡을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해 애런 님이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아일라 님은 악마의 아이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교황에게 잡혀갈 거에요.”
이자벨라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애런은 얼굴을 구겼다. 몇 년이나 봐왔던 사람들인데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성녀님!!”
그때 중년의 성기사 모리스가 악마의 아이가 성녀를 습격했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다. 이제 여유롭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안 이자벨라는 급하게 남은 할 말을 한다.
“2년 후… 저와 제 동생이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앙겔로크라티카로 돌아와주세요. 애런 님에게는 부탁할 일이 있으나 지금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그때 말할게요. 그리고 당신을 본 성기사들을 죽이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이자벨라는 애런을 본 성기사를 죽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줘서 강조했다.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자벨라의 머리를 땅에 살포시 내려준다. 그리고 검을 두 손으로 쥔다.
“애런! 이게 어떻게 된… 성녀님?!”
모리스는 목이 베어 떨어진 이자벨라의 머리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뛰어오다 애런의 어깨에 있는 역십자의 흉터를 발견한다.
“죄송합니다.”
“응?”
툭. 애런과 아일라를 제 자식처럼 여겨주던 모리스의 목은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진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 하고 죽었다.
“오빠!!”
그리고 곧 아일라와 지원을 하러 오는 성기사들도 방으로 들어온다. 애런은 순식간에 그들의 목을 베어 고통 없이 죽인다.
“오빠..?”
아일라는 성기사들의 목을 벤 애런을 새파랗게 질려서 쳐다본다.
“오빠 맞아..?”
“아일라,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그냥 들어줘.”
애런은 아일라의 어깨를 잡고 말한다. 아일라는 흠칫 놀라며 살짝 뒷걸음질을 쳤지만, 애런의 어깨를 보고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몸에 마왕을 봉인해서 나는 악마의 아이가 되었어. 그래서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어서 도망쳐야 해. 내가 없더라도 성녀님이랑 같이 잘 있을 수 있지?”
“어..? 마왕? 그건 무슨 소리야.”
“자세한 건 성녀님이 말해줄 거야. 알겠지?”
애런은 아일라의 파르르 떨리는 눈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준다.
“울지 말고. 이제 아일라도 강하니까 혼자서 잘 있을 수 있지?”
“ ... 으응...”
아일라는 코를 훌쩍이면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겨우 참으며 대답했다.
“이제 다 컸네.”
자세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이해해주는 아일라가 대견해서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오빠...”
“성녀님!!”
“빨리도 오네.”
성기사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애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창문으로 사라졌다.
“꼭 돌아와야 해.”
아일라는 점점 멀어지는 애런의 뒷모습을 조금이라도 눈에 새기기 위해서 끝까지 쳐다보며, 애런이 선물해줬던 목걸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