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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15화 (15/92)

〈 15화 〉 악마의 아이

* * *

“다행히 화해했나 보네요.”

싱글벙글 웃으며 팔짱을 끼고 방으로 들어오는 애런과 아일라를 보고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하는 이자벨라.

“성녀님, 선물 고마워요.”

“생각했던 대로 잘 어울리시네요.”

아일라의 머리를 보고 있으니 밤하늘의 아름답게 빛나는 은하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아일라의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를 보고는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다.

“어… 그 반지는 어떻게 된 건가요?”

“이거요? 꼈더니 안 빠져요.”

아일라는 반지를 빼보려고 힘을 줬지만 역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제가 묻고 싶은 건 왜 왼손 약지에 꼈냐는 건데… 보나마나 무슨 뜻인지 모르고 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일단 물어는 볼게요.”

“제 엄마가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게 생각나서 꼈는데… 문제 있어요?”

아일라는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걸 보고 이자벨라는 손가락으로 눈썹을 꾹 누른다.

“아일라 님, 잘 들으세요. 왼손 약지는 사랑과 결혼을 의미해요. 보통 결혼반지나 약혼반지를 끼는 손가락이죠.”

“... 네?”

아일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이 붉어진다. 제 한 몸이 된 것처럼 빠지지 않는 반지. 이제서야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다.

“애런 님은 알고 계셨을 텐데… 미리 말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아일라도 알고 있을 줄 알았죠.”

“아니면 알고 낀 것일 수도 있죠.”

이자벨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아일라는 귀까지 붉히고 당황해하며 대답한다.

“모, 몰랐거든요?”

“진짜요~? 정말 좋아하는 오빠랑 결혼하고 싶다거나 그런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아일라에게 장난쳐서 화나게 하고 화해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다. 저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의 이자벨라는 그새를 못 참고 장난을 친다.

“진짜 몰랐다고요!”

발을 쿵쿵 구르며 몰랐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애런을 쳐다보며.

“알고 낀 거 아니거든?!”

“알고 있어.”

“역시 아일라 님이 있어야지 분위기가 살아나요.”

어제 애런과 이자벨라만 있을 때보다 아일라까지 있는 편이 훨씬 시끌벅적하다. 이자벨라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언젠가 동생도 이 자리에 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매일 밤 기도를 한다.

“아 참 그거 아세요?”

이자벨라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박수를 치며 시선을 끌었다.

“뭐를요?”

“며칠 후에 모노크롬에 백기사님이 오신다고 해요.”

“백기사..?”

애런과 아일라는 동시에 대답했다. 이자벨라는 미소를 지으며 얘기한다.

“앙겔로크라티카의 성기사 필두에요. 교황님을 수호하는 성기사답게 엄청나게 강하세요. 저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애런 님과는 다르게 아주 신앙심이 강하신 분이더라고요.”

신앙심 얘기에 애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애런은 10살 이후로 아직도 신성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그 이유를 욕 한 번 했다고 속 좁은 천사가 무시한다고 하지만 성녀인 이자벨라가 봤을 때는 그냥 신앙심 부족이었다.

이자벨라가 신성 마법은 쓸 수 있는 편이 좋다며 진심으로 애런에게 신앙심을 만들어주려고 5년 동안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천사가 싫다며 치를 떨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이유를 이자벨라는 알 수 없어서 물어보면 항상 말했다.

­ 전생에 나를 용사로 만들어놓고 마족을 죽이는 기계처럼 썼어요. 그래놓고 이제 와서 욕 한 번 했다고 안 들어주는데 꼴 받지 않겠어요?

라고.

저 정도면 중2병이 아니라 전생에 용사라는 게 진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백기사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세요. 한 번 만나봐서 대련이라도 해보면 실력이 늘지 않겠어요?”

“뭐, 좋아요.”

애런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다고 이러는지 코웃음을 친다.

똑­똑­.

두 번의 노크 소리. 이자벨라를 호위하는 성기사가 노크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악마의 아이가 나왔나 보네요.”

쾅!!

그때 성기사가 방문을 부수며 날아온다. 성기사는 몸이 쥐어짜인 듯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헤일로 님?!”

이자벨라는 성기사의 상태를 살펴보지만 이미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내장은 터진 상태여서 치료를 하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방 안에 있는 세 명은 모두 부서진 방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방문을 바라본다.

“크르르…”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다가오는 장신의 남자는 이미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기에 몸을 침식당해 피부는 보라색으로 변해있었다.

“헬슨?”

“아일라, 아는 녀석이야?”

“나한테 맞았던 헤드릭 부하야.”

헬슨이 숨을 내쉴 때마다 나오는 마기는 지금까지 상대한 악마의 아이보다도 훨씬 농도가 짙었다. 애런은 그것만으로도 이때까지 만난 상대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일라, 너는 밖에 나가서 성기사들을 불러와.”

“어? 나도 같이 싸울게.”

“안 돼. 너까지 지키면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나도 이제 강하졌는데…”

“너 마법 쓰고도 나한테 이긴 적 없잖아. 그러니까 방해야.”

애런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일라는 입을 꾹 다문다. 자기 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에 분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끼어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알겠어… 빨리 데려올 테니까, 그때까지 당해서 쓰러져 있지나 마.”

그리고 성기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간다.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자벨라는 꿈에서 봤던 미래가 지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일라가 성기사를 데리고 돌아올 때 즈음이면 애런은 악마의 아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곳이 미래를 나누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성녀님도 밖에 계시죠.”

“걱정 마세요. 안타깝게도 저는 죽지 못하는 몸이라서요.”

그러니 자신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여차하면 몸을 내던져서라도 미래를 바꿔야 한다. 그리 생각하며 방에 남는다.

이자벨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를 시작한다. 애런은 성기사가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든다.

오랜만에 만지는 진검은 생명을 빼앗기 위한 무기답게 무겁고 차갑고도 날카로웠다.

“... 부디 이 고난을 헤쳐나갈 힘을 주시옵소서.”

이자벨라의 기도가 끝이 나자 몸이 가벼워지고 마기 때문에 탁해지던 정신이 깨끗해진다.

“아일라… 죽인다.”

헬슨은 마기에 침식당해 정신을 잃었음에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여자에게 맞아서 꼴사납게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또래에게는 패배를 해본 적이 없는 헬슨에게는 죽을 만큼 굴욕적인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 깨어나고 나서는 그 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헤드릭이 아끼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아일라를 울면서 빌 때까지 때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찢어 죽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헤드릭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이라며 어떤 약을 주었다. 이걸 먹고 아일라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걸 먹으니 어깨에 불에 타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그 고통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어깨에는 역십자가 모양의 흉터가 생겼다.

악마의 아이가 된 자신은 곧 성기사에게 죽임당하겠지. 하지만 죽기 전에 아일라를 죽일 힘을 얻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마기에 정신을 침식당하며 아일라가 있을 만한 성녀의 방으로 곧장 달려왔다.

“방해하지 마라… 그년은 내가 죽인다…”

“내 동생한테 졌다고 꼴사납게 악마에게 힘을 빌렸냐?”

애런의 말에 헬슨은 이를 까득 간다. 얼마나 세게 갈았는지 이가 부러지며 하나, 둘… 땅으로 떨어진다.

“너, 아일라의 소중한 사람?”

분노 때문에 마기에 잠식되는 속도가 빨라진 헬슨은 이제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닮았다. 너, 아일라의 오빠. 죽이고 그년한테 보여준다. 우는 모습. 즐겁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미친 듯이 웃는 헬슨을 바라보며 애런은 눈살을 찌푸린다.

“죽어!!”

콰앙! 헬슨은 땅을 박차며 순식간에 애런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가슴을 향해 손을 내뻗는다.

“..!”

생각보다 더 빠른 헬슨의 움직임에 놀랐지만, 눈으로는 그 모습을 똑바로 좇았다. 빠르지만 못 피할 정도는 아니다.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주먹을 스친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애런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반격한다.

카각! 팔의 신경을 끊을 기세로 검을 휘둘렀지만, 마기로 강화된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했고 작은 생채기 밖에 내지 못하고 튕겨난다.

“크하하하하!!!”

헬슨은 마기로 강화된 자신의 몸에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전능감을 느꼈다. 그래서 방어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주먹을 휘두른다.

바닥이 부서지고 파편이 튀기며 뿌연 먼지가 일어난다. 자신의 공격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헬슨은 손을 휘둘러서 먼지를 걷어낸다.

“성녀님, 공격을 강화할 만한 기도 좀 해줘요!”

애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자벨라는 펙토랄레를 쥐고 다음 기도를 한다.

“죄지은 자를 보며 불쌍하다 하며 구하라 하신 천사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고 용서하여 천사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신성한 기운이 이자벨라의 몸을 감싼다. 정신이 나간 헬슨이라도 눈앞에 있는 애런보다도 저기서 기도를 하고 있는 이자벨라가 더 위험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콰앙! 땅을 박차고 이자벨라를 향해 멧돼지처럼 달려간다.

“네 상대는 여기 있잖아!”

달려가는 헬슨을 막기 위해 목을 베어보지만 검은 단단한 목에 부딪혀 튕겨져 나와서 떨릴 뿐이었다.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

애런은 15살이 될 때까지 전생처럼 몸이 강하지 않은 것을,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을, 강한 정령이 말을 걸지 않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전생에 다시 살 게 된다면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있는 광기 어린 이 녀석에게는 평범한 몸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무력해서 이자벨라에게 뛰어가는 헬슨을 막을 수가 없다. 처음으로 평범한 몸이라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헬슨은 애런의 공격을 모두 맞아주면서도 애런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지금 당장 죽여야 할 상대는 기도를 하는 성녀. 그것 외에는 무시한다.

“성녀님, 피해요!”

애런은 가만히 기도를 하고 있는 이자벨라에게 소리쳤지만 이자벨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한다.

“신앙심이 부족한 자입니다. 하지만 천사님의 자비로 그의 마음을 성결케 하시고 천사님의 기적을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천사님의 일꾼, 이자벨라 마이어가 바랍니다. 저 자에게 천사님의 말씀을 행할 능력을 주시옵소서.”

콰가가가!

헬슨이 크게 휘두른 손은 벽을 너무나도 쉽게 부수며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 손은 결국 이자벨라의 머리를 강타한다. 피할 생각도, 방어할 생각도 없이 헬슨의 손을 끝까지 보고 있던 이자벨라의 머리는 힘없이 뜯겨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떨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벽을 뚫고 애런에게 내려온다.

하얀 날개를 펼친 작은 천사들이 내려와 애런의 몸과 검에 깃든다. 신성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빛이 난다.

“씨발.”

애런은 꽉 깨문 이빨 사이로 피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 이 기운. 마치 그토록 싫어하던 전생의 용사 시절의 자신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힘을 바랐던 건 이런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해 바랐던 것인데 이미 늦었다.

천사는 왜 이리도 무정하단 말인가. 자신을 그렇게나 믿고 따르던 이자벨라를 지키도록 진작에 도와줬으면 좋지 않은가.

거기다가 피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를 마친 이자벨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도를 끝마칠 기회는 이 뒤로 얼마든지 있을 텐데. 기도를 마칠 틈을 애런이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무리를 했는 것인가. 애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헬슨은 휘광을 두르고 있는 애런을 눈부시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쳐다본다. 하지만 애런의 위압적인 존재감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고 압박감에 고개를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다.

“뭘 봐.”

애런은 들고 있는 빛나는 검을 부드럽게 허공에 한 번 휘두른다. 검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느렸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보인다고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검은 허공을 가른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터인 공간이 물살이 일듯 검 끝에 끌려간다.

그리고 일섬과 함께 공간이 베어지며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아?”

베어진 공간에 있던 헬슨은 자신의 목이 베었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머리가 떨어지며 빙글빙글 도는 광경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뒤늦게 알게 해주었다.

툭. 헬슨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애런은 떨어진 헬슨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고는 떨어져 있는 이자벨라의 머리로 다가간다.

“하아… 성녀님, 왜 그런 무리를 해요.”

역시 억지로라도 성녀도 도망치게 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면 헬슨을 죽이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이자벨라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애런 님이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는군요.”

머리만 달랑 남아있는 이자벨라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애런은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뭐야?!”

“말했잖아요. 죽지 못하는 몸이라고요.”

“아니, 그래도 머리랑 몸이랑…”

“제가 목을 베어서 자살을 시도했더니 머리가 떨어져도 죽지 않는 몸이 되었더라고요. 아, 제 몸에 머리를 붙여주시겠어요?”

“네.”

저주다. 목이 베어져도, 머리가 밟혀 터져도, 온몸의 내장이 쏟아져 나와도 죽지 못했던 전생의 애런이 걸렸던 천사의 저주와 똑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전까지는 편안하게 죽음을 바라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역겨운 저주다.

‘천사 놈들… 내가 용사일 시절 때랑 바뀐 게 하나도 없어.’

애런은 역시 천사에 대한 신앙심 따위는 생길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자 머리만 있는 이자벨라가 말한다.

“애런 님,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네요.”

“네?”

이자벨라의 말에 몸과 머리가 분리된 헬슨을 보니 머리가 액체로 변해서 몸으로 꾸물꾸물 기어가서 다시 몸에 달라붙는다.

“요즘은 목을 베어도 안 죽는 것들뿐이야?”

애런은 한숨을 쉬며 검을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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