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마법
* * *
언제까지고 응석을 부리면 안 된다. 오빠랑 헤어지게 되면 어떡할 거냐.
머릿속에 맴도는 그 말이 짜증 난다. 오빠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이제는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겠지…”
반년을 이자벨라와 같이 지내며 그녀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심성이 고약하다. 툭하면 나를 놀리려고 들고 내 반응을 즐기면서 쿡쿡 웃어댄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놀리면서도 왠지 나를 잘 챙겨주려고 하는 것이 느껴진다. 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동생한테 못 해준 것을 나한테 해줌으로써 대리 만족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애처롭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싫은 소리는 싫은 거다. 다음에 만나면 이자벨라가 했던 말 반대로 행동할 거다.
오빠한테 이제껏 그런 적 없을 정도로 응석 부리고 네 말은 싫다고 싫은 티를 팍팍 낼 것이다.
….
“성녀님 싫어.”
아일라는 침대에 누워서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가기 싫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래도 성녀님이 사과도 하고 맛있는 것도 준비해둔다고 했는데.”
맛있는 것이라는 부분에서 움직임이 살짝 멈춘다. 관심은 있는 모양이다.
“맛있는 거… 아니, 그래도 분명 할 얘기가 많다고 했는데… 방도 바꾼다고 했고.”
“방은 안 바꿔도 된다고 했어.”
“으으음… 그래?”
갈지 말지 고민을 하는 아일라. 분명 싫은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 본다? 그건 조금 싫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일라도 이자벨라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성녀님이랑 화해도 해야지. 이제 친해졌는데 안 보고 살 거야?”
“응, 화해해야지…”
“그래.”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
똑똑.
이자벨라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목을 가다듬고 말한다.
“큼… 들어오세요.”
끼익. 문이 열리고 애런이 방으로 들어온다. 아일라는 애런의 등 뒤에 숨어서 고양이처럼 이자벨라를 쳐다보고 있다. 그걸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자, 아일라 너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일단 앉으세요.”
애런과 아일라는 소파에 앉고 이자벨라는 따로 떨어진 의자에 앉는다. 어제 이자벨라가 했던 말에 반항심이라도 생겼는지 팔짱을 끼고 아주 달라붙는 아일라.
“아일라, 너무 붙는 거 아니야?”
“가족은 이 정도 거리감이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곁눈질로 조심스레 이자벨라의 눈치를 살핀다.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붙어있으세요.”
“..?”
어제랑 다른 태도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자벨라를 바라보며 애런에게 더욱더 달라붙는다.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자 숨을 죽이고 달라붙는 정도를 더 높인다.
“??”
왜 뭐라고 안 하지? 라고 생각하는 게 벙찐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
‘이래도 뭐라고 안 할 거야?’
아일라는 애런의 볼에 키스한다. 그래도 미소를 망가뜨리지 않는 이자벨라. 이 이상으로 친근함을 표현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얌전히 자리에 앉는다.
“성녀님 정신 차리고 있는 거 맞죠?”
“네, 다 보고 있었어요. 팔짱을 끼고 몸을 밀착시키고 볼을 비비고 볼에 키스까지 하는 거 다 봤어요.”
“??? 왜 뭐라고 안 해요?”
어제까지만 해도 오빠한테 너무 응석 부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나 응석 부리는데 뭐라고 하지 않는 거지? 방도 떨어뜨린다고 해놓고 안 그런다고 했다 그러고… 아일라는 도통 이자벨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그때는 말리려고 했어요.”
어제 애런과의 대화로 둘이 추억을 쌓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 정도는 가족으로서 친근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남인 제가 가족에게 떨어지는 게 어떠냐고 참견하는 건 주제넘는 말이었어요.”
“네에…”
“그리고 별거 아니지만… 사과의 의미로 아일라 님이 좋아할 만한 디저트를 준비했어요.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방금 만든 듯한 밀푀유, 몽블랑, 프랄린 에클레르, 퐁당 쇼콜라, 바바루아, 샤를로트… 수많은 디저트들이 탁자에 올라온다.
아일라는 눈이 커진 채로 침을 꼴깍 삼킨다. 애런도 탁자를 가득 채운 디저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애런과 아일라가 나간뒤로 이걸 사기 위해서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이걸 다 언제 사셨대요?”
“다 산 건 아니고 몇 개는 만들었어요.”
“와아… 성녀님 좋아요… 성녀님 최고…”
어제 먹을 거로 기분 나아지는 쉬운 사람 아니라던 아일라는 어디 갔는지, 이미 기분은 다 풀린 것 같다.
“우응... 이거 맛있다.”
아일라는 이자벨라가 준비한 디저트를 만족스레 웃으며 모두 먹어 치웠다.
….
“너무 많이 먹었어…”
애런의 허벅지를 배개 삼아 소파에 드러누운 아일라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구 먹은 것을 후회했다.
“다 먹었으면 어제 못 했던 거나 이어서 하죠.”
“어제 못 했던 거? 설마 저한테 하려고 했던 말인가요..?”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아일라에게 미소로 답을 한다.
“아니죠? 아까 참견 안 한다고 말했으니까 다른 거죠? 네? 대답 좀 해봐요. 성녀님.”
“마법 얘기면서 왜 웃고만 있어요.”
“네, 맞아요. 마법 얘기였어요.”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자신의 반응을 보면서 즐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아일라는 이자벨라를 쏘아본다. 아일라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한다.
“신성 마법부터 할까요?”
이자벨라는 두 손으로 깍지를 낀다.
“신성 마법은 자비로운 천사님의 배려로 신앙심만 있으면 사용이 가능해요. 마나를 필요로 하는 평범한 마법이나 마기나 생명력을 대가로 사용하는 흑마법, 정령과 계약을 해야지만 사용이 가능한 정령 마법과는 접근성에서 궤를 달리하죠.”
방이 조금 환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룩하신 천사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치천사 미카엘 님에게 선택받은 성녀로서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이자벨라에게 빛기둥이 내려와 방을 따뜻하게 만든다.
“이곳에 기적을, 그 위대한 권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소서. 부족한 제가 이들에게 천사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도록 기도를… 저에게 영광을 주시옵소서.”
화아악!
빛기둥이 퍼져나가며 방 안의 풍경이 바뀐다. 조금 전까지 벽이 있던 곳은 뻥 뚫린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있고 천장에는 빛나는 별들과 태양이 따뜻하고 눈 부신 빛을 내리쬔다.
작은 천사들이 그 날개를 펼치고 애런과 아일라를 바라보고 있고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끼이익.
그리고 이자벨라의 뒤에 있는 거대한 문이 열리며 신성한 기운을 뿜는 6장의 새하얀 날개를 펼친 금발의 미형의 천사가 애런과 아일라를 끝이 안 보이는 깊은 바다같은 눈동자로 내려다본다.
‘6장의 날개… 치천사잖아.’
전생 용사일 적에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든 천사를 다스리는 치천사, 혹은 세라핌이라 부르는 천사의 정점.
그리고… 전생의 애런을 용사로 선택한 천사.
애런은 괴롭고 고독했던 전생. 그런 인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용사로 자신을 선택한 치천사를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성스러운 모습은 감히 무어라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저런 존재에게 선택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느껴질 정도의 존재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은 애런과 아일라를 슬쩍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꿀꺽. 문 너머로 보이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마른 침을 삼킨다.
금발의 천사는 조용히, 하지만 방 안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믿어라.”
그리고 곧 방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
방금 보았던 광경을 본다면 없던 신실한 믿음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일라는 아직도 신성한 광경의 여운에 빠져 입을 쩌억 벌리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애런도 천사에게 욕을 했었지만, 지금만큼은 천사의 존재에 욕을 할 수 없었다.
“어떤가요?”
이자벨라가 행한 기적 때문인지 초승달처럼 휜 눈매가, 긴 속눈썹이, 장난스럽게 웃느라 올라간 입꼬리마저도 아까의 광경 때문인지 평소와 다르게 신성해 보였다.
“와아… 성녀님은 역시 성녀님이었네요.”
“이런 걸 보여주면 확실히 신앙심이 생기겠네요.”
아일라와 애런은 각자 대답했다. 이자벨라는 그 대답에 일부러 노력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짝 웃는다.
“좋아요, 한 번 따라 해볼까요?”
“근데 저는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요.”
“후후, 그건 상관없어요. 그저 아일라님의 신앙심을 천사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그런가요?”
아일라는 두 손을 모아 눈동자를 굴리며 익숙하지 않은 기도를 생각하며 이자벨라가 했던 것을 떠올리고 부족하지만, 신앙심을 담아 천천히 말한다.
“어… 천사님, 믿습니다. 저한테도 성녀님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기적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아일라의 기도에 답하듯 하나의 빛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됐다!”
비록 작은 빛줄기였고 곧 사라졌지만 아일라는 처음 사용한 마법을 방방 뛰면서 기뻐했다.
“천사님에 대한 신앙심을 늘리게 되면 더 강한 기적을 부릴 수 있을 거예요. 다음은 애런 님이 해볼까요?”
이자벨라는 고개를 돌려 애런을 쳐다보는데, 환생 후 처음으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들뜬 애런은 이미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 음…”
“왜 그러시죠?”
아일라와 이자벨라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곤란해하고 있는 애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봤던 금발의 천사한테 전에 욕했던 것 때문에 빠꾸 당했어요.”
“크흡..! 아하..! 아하핫!!”
웃음을 참으려던 이자벨라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 내서 웃는다.
“그건 다른 의미로 대단하시네요..! 미카엘 님에게 직접 퇴짜를 당하다니!”
“오빠… 천사님한테 욕을 했었어?”
아일라가 경악을 하며 물어봐서 전에 하늘에 손가락 욕을 날렸다고 하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믿을 수 없어 한다.
“어쩔 수 없네요. 애런 님은 저만큼 신앙심을 쌓지 않으시면 신성 마법을 쓰기는 힘드시겠어요.”
“이런 씨… 아니, 후우…”
전생에 용사로 그렇게 고생을 시켰으면 욕 한 번 한 것 정도는 봐줘도 되잖아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심호흡을 하며 욕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을 진정시킨다.
“애런 님은 마나를 이용한 마법으로 넘어가죠.”
“네…”
“마나를 이용한 마법은 몸 안에, 밖에 흐르는 마나를 느끼는 것이 먼저예요. 혹시 느끼신 적 있나요?”
“아니요, 없는 것 같네요.”
이자벨라는 애런과 아일라의 손을 잡는다.
“눈을 감고 손에 집중해보세요. 무언가 꿈틀거리거나 손을 간질인다거나 여러 가지 감각으로 느껴질거에요.”
그 말에 애런과 아일라는 눈을 감고 손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아직까지는 잡고 있는 이자벨라의 손의 따스함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Owom jaiga ooue.”
영창을 하자 이자벨라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이 든다.
“느껴지시나요?”
“네, 부드러운 손가락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이 들어요.”
“어… 그건 제 손가락이에요.”
“네?”
애런은 눈을 뜨고 자신의 손을 본다. 이자벨라는 손을 펴고 가만히 있지만 자신의 손이 움직이며 이자벨라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야?”
“마법이죠. 아일라 님은 어떤가요?”
“저는 뭔가 느껴져요. 손을 감싸고 있는 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에요.”
“아일라 님은 마법 쪽으로도 재능이 있으시네요.”
그리고 애런을 애처롭게 쳐다보는데 자신을 곧 죽는 사람인 것마냥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정작 애런 본인은 재능이 없는 것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애런 님은… 접근성이 가장 좋은 신성 마법은 미카엘 님에게 퇴짜 맞으시고, 마법에는 재능이 없어 보이시네요. 흑마법은 당연히 논외고, 정령 마법은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안 되고요.”
“이 몸 진짜 평범하네…”
애런은 너무 평범하기 그지없는 몸뚱이에 감탄했다.
얼굴도 전생보다 못 생겼어. 전처럼 정령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아. 신성 마법은 미카엘에게 빠꾸 먹었다. 마나는 느껴지지도 않아.
하지만 짜증은 나지 않는다.
자신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으니 이 만큼이나 평범한 몸뚱이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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