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모노크롬
* * *
아이들이 있는 격리 시설은 모노크롬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흑백을 가리기 위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악마가 아니면 무조건 백이라고 한다.
즉, 애런과 아일라에게 시간만 나면 시비를 걸어대는 헤드릭 일행도 모노크롬에서는 백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미천한 것들이 나를 무시해?!”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헤드릭도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헤드릭을 뒤로 하고 애런과 아일라는 제 갈 길을 간다. 직접 손을 대기는 무서운지 저 멀리서 소리만 질러대는 헤드릭.
“수업은 별로였어. 나는 조금이라도 유익한걸 알려줄 줄 알았는데, 전부 천사님들에 대한 거라니.”
아일라는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모노크롬에서의 생활은 자유롭다. 말 그대로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싶으면 듣는 것이고, 운동을 하고 싶으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면 된다.
성녀에게 감명받은 아이들은 천사에 대한 수업도 잘 듣는 모양이지만, 아일라는 별로인지 수업 도중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일라, 흥미 생기는 거 없어?”
모노크롬은 한정된 공간이지만 넓고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별로인지 아일라는 매일 애런과 산책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천사님에 조금 흥미가 있었는데… 가르치는 수녀가 이상해서 수업을 듣기 싫었어.”
수업을 하는 도중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서 천사님의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미친 것처럼 머리를 흔들며 이상한 소리를 내던 수녀를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걸 계기로 아일라는 천사에 대한 수업에 발걸음이 뜸해지고 결국은 수업 도중 나올 정도가 되었다.
“10년 동안 여기에 더 있어야 하는데 벌써 흥미 가는 게 없으면 큰일인데.”
“하고 싶은 게 없는걸, 어떡해.”
애런은 아일라가 시간을 유의미하게 보내기를 바랐기에 아일라가 흥미를 느낄만한 것을 생각한다.
집에 있을 때부터 아일라가 좋아했던 것… 독서는 아니다. 애런이 같이 책을 읽자고 하면 몇 분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갔다.
운동? 땀 나는 것이 싫다고 애런이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음… 칼싸움이나 할까?”
“응.”
칼싸움은 마법의 단어였다. 이걸 하자고 하면 웃으면서 마당으로 뛰어나왔고, 안 해준다고 하면 아일라가 유일하게 어린애처럼 울면서 떼를 썼다.
….
모노크롬의 체육관에는 여러 운동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농구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 배드민턴을 하는 아이도 있다. 그중에는 목검으로 칼싸움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딱! 딱! 따악!! 다른 운동을 하는 소리도 컸지만,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유난히 잘 들렸다.
“우리 말고도 칼싸움을 하는 애들이 있네.”
“칼싸움이라기보다는… 쟤들은 훈련 같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또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우리도 하자!”
아일라는 다다다 뛰어가 목검 2개를 가지고 온다. 애런이 목검을 쥐어보니 집에서 쓰던 것보다는 조금 묵직하지만, 문제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딱! 딱! 체육관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흐읍!”
저번처럼 빈틈이 많게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애런의 몸을 노리는 목검의 움직임은 마치 뱀 같았다.
부웅! 애런이 위에서 검을 내리치자 자연스럽게 아래로 공격을 흘리고 날을 앞으로 내지른다. 회심의 일격이었는지 승리를 확신하고 미소를 짓는 아일라.
“좋은데?”
애런은 검을 위로 들어 다가오는 검을 쳐내면서 앞으로 다가가 목에 날을 갖다 댄다. 아일라의 검은 애런의 검에 막혀 어깨에 닿고 있어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예상하지 못한 방어면서 공격이었는지 아일라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목에 닿고 있는 목검을 내려다본다.
“졌어.”
아일라는 거의 다 됐는데… 라며 아쉬워한다.
“그래도 공격이 많이 다양해졌어. 거기다가 틈도 줄어들었고.”
애런은 따로 가르친 것도 없는데 급격히 늘어난 아일라의 실력에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천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하고 저럴 때는 이렇게 하고…”
“그건 좋지. 그런데 아쉬운 부분도 있었어.”
“아쉬운 부분?”
아일라는 숨을 가다듬고는 묻는다.
“검이 조금 무거웠지? 움직임의 방향성은 좋았는데 평소보다 검의 움직임이 느렸어.”
“집에서 쓰는 것보다 조금 무거워서 그랬나 봐.”
애런에게는 평소처럼 휘둘러도 문제가 없는 정도의 차이였지만 아일라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운동?”
대답을 한 아일라는 질색을 하며 눈살을 찌푸린다.
“운동은 땀나서 싫은데.”
“칼싸움도 땀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뭐부터 하면 되는데?”
“밸런스 있게 전부 다.”
그렇게 애런이 운동을 하면 옆에서 아일라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일라도 따라 할 수 있도록 가벼운 운동부터 시작해 점점 강도를 올렸다.
“자, 잠깐만…”
운동장을 5바퀴를 돌기 시작할 때 즈음 아일라는 숨을 헐떡이며 애런의 팔을 붙잡아 세운다.
“허억… 조금만 쉬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아일라.
“이제는 꽤 잘 따라오네?”
“후우… 그래도 아직 오빠가 봐주면서 뛰고 있잖아.”
“나는 몇 년 동안 했던 거니까 당연하지.”
애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몇 주 만에 체력이 눈에 띄도록 붙은 아일라는 운동을 시작했을 처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때는 이 넓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숨이 안 쉬어져… 토할 것 같다며 고통스러워했는데 이제는 3바퀴 정도는 안정적인 호흡으로 돌 수 있게 되었으니 엄청난 성장이다.
“이제 근육도 좀 붙은 것 같고.”
“마, 만지지 마아…”
아일라의 몸을 만져보니 말랑말랑했던 허벅지가 단단해졌다. 가늘었던 팔도 근육이 붙어서 조금은 두꺼워졌고.
“그래도 몸이 조금 뻣뻣하네.”
“어?”
자리에 앉은 아일라의 다리를 잡아 벌려보려고 해도 직각으로 벌리는 것이 최대인 것을 보고 애런이 말했다.
“돌아가서 유연성도 조금 기르자.”
“싫어. 나는 칼싸움을 잘하고 싶을 뿐인데…”
“이것도 전부 필요한 거야.”
평소라면 아일라가 쉬고 싶어 하면 쉬게 해줬겠지만, 생각보다 잘 따라오고 그만큼 결과도 나오고 있기에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더 챙겨주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쉴 거야.”
아예 땅바닥에 대자로 자리에 누워버리고 버티는 아일라.
“그래, 쉬고 있어.”
“꺄앗?”
누워있는 아일라를 그대로 안아서 옮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안겨서 옮겨지는 아일라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귀가 빨개지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내, 내릴래…”
“쉬고 싶다며? 숙소까지 쉬게 해줄게.”
창피해하는 아일라의 반응이 귀여워서 괜히 심술궂게 내리려고 몸부림을 치는 아일라를 꽉 잡아서 내리지 못하게 했다. 그 덕에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있었다.
“충분히 쉬었어?”
“...덕분에.”
“그럼 계속해서 해볼까?”
*
따악… 탁.
이제는 체육관에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 다른 아이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칼싸움을 하는 남매의 곁으로 모인다.
오전 10시마다 하는 애런과 아일라의 칼싸움은 실제로 기사들이 싸우는 것 같다며 모노크롬에서 유명해졌다.
이걸 보겠다고 10시에 일정을 비우고 곧 모노크롬을 떠나는 19살의 성기사 지망생들도 보러 올 정도이다.
딱 따악.
더는 목검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뱀 두 마리가 엮인 것처럼 검은 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기교를 부리며 서로의 빈틈을 찾는다.
“오빠, 끈질기게 들러붙는 남자는 인기 없다구!”
퍽. 딱!
발로 애런의 허벅지를 차고 껌딱지마냥 달라붙어 있던 앨런의 검을 쳐낸다.
“이거 칼싸움이지 않았나?”
발로 맞아 바지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내며 묻는다.
“칼싸움에 발을 쓰면 안 된다는 법이 있어?”
“... 없지.”
“그렇지?”
아일라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땅을 박차고 다시 달려든다.
부웅! 높이서 내려찍는 검을 애런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흘리려고 했지만, 순간 검을 비스듬히 세워 찌른다.
“전과 똑같은 과정인데 이제는 다르네..!”
다시 검을 올려 막아냈지만, 힘의 차이가 전처럼 크게 나지는 않아 높이 올려 치지 못한 탓에 후속타가 이어져 온다.
빠르게 검을 애런의 몸쪽으로 밀어 넣어서 지렛대의 원리로 애런의 검을 누르고 검을 세워서 목을 겨눈다.
예상 못 한 공격에 당황해 눈이 커진 애런을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일라.
“내가 졌어.”
비록 봐주면서 상대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일라에게 지니 승리욕이 강한 애런은 어린애처럼 분해한다.
‘청출어람이라고 기뻐해야지… 애도 아니고 왜 분한 마음이 먼저 드냐.’
“와아! 드디어 오빠한테 이겼다!”
목검을 던지고 애런을 껴안고 좋아하는 아일라를 보며 지켜보던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드디어 이겼구나!”
“축하해.”
“오늘도 굉장했어. 아일라!”
애런에게만 집중을 하느라 주변을 보지 못했는지 둘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아일라는 긴장했는지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칼싸움만 했는데 유명해져 버렸네.”
어느새 이름만 알려진 게 아니라 검무의 아일라라는 낯부끄럽게 부르는 아이까지도 생겼다. 그 덕에 지나가다 아일라를 보는 아이들이 검무의 아일라다! 라며 말을 걸 때마다 아일라는 부끄러워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
“검무의 아일라.”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낯부끄러운 별명이지만 이 별명으로 아일라의 무용담이 모노크롬에 퍼지면서 이제는 헤드릭이 시비를 걸어오는 일도 없어졌다.
이제는 오히려 이제는 지나가다 눈만 마주쳐도 자기를 따르는 애들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뜰 정도이다.
“자, 스트레칭.”
애런의 말에 다리를 일자로 쫙 펴고 앉는 아일라. 전에는 겨우 직각으로 폈었는데 이제는 180도로 펴는 것도 여유롭다.
등을 살포시 눌러주자 쭈욱 팔을 펴고 몸을 천천히 바닥에 가슴이 닿을 정도까지 내린다.
“좋아. 이제는 탄성으로 안 내려가네.”
“오빠가 탄성으로 내려가면 스트레칭이 아니라고 혼냈잖아.”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혼자서 마저 몸을 푸는 아일라.
“그렇게 하면 다칠 수도 있어서 그래.”
“... 오늘은 다시 이길 거야.”
“그럴 수 있을까?”
“이길 거야.”
애런에게 한 판 이기고 난 뒤로는 칼싸움에서 한 판도 이기지 못한 아일라는 목소리에서부터 이기겠다는 의지가 묻어나온다.
‘그때는 방심해서 진거니까… 이제는 안 봐줄 거야.’
유치하게도 아일라에게 지고 분했던 애런은 전생의 용사 시절에 사용했던 검술을 100퍼센트 끌어내서 싸우고 있다.
몇십 년의 실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검술을 당연히 아일라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고 그 때문에 아일라는 최근 항상 완패하고 있다.
“오, 소문대로 체육관에 있네요.”
희한하게 집중하고 듣게 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자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이자벨라가 서 있었다.
“성녀님?”
누워서 다리를 꼬고 허리를 풀고 있던 아일라는 재빨리 일어선다.
“네~ 검무의 아일라님.”
“아, 앗… 성녀님도 알고 있어…”
“최근 모노크롬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니까요.”
같이 온 성기사들에게 괜찮다고 손짓을 하고 쿡쿡 웃으며 걸어온다.
“가장 유명한..?”
“네, 성녀도 있는데, 혹시 저 소녀의 정체가 용사인 건 아닐까? 라는 소문이 돌고 있죠.”
“용사.”
전생에 용사였던 애런이 죽었으니 새 용사가 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다. 물론 용사가 죽는다고 바로바로 보충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애런이 죽기 20년 정도 전에 성녀는 죽었다. 그런데 이자벨라는 애런과 아일라와 비슷한 나이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 시간차를 두고 후계자가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사 애런이 죽은 지 10년. 용사의 후계자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다.
“근데 나보다 오빠가 더 강한데 왜 저한테 용사라고 해요?”
“아마 이기지 못하는 상대에게 계속 도전하여 극적으로 이겼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분위기는 중요한 법이니까요.”
“그렇구나…”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자신도 분위기에 휩쓸려 생전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천사에 대한 믿음이 생길 뻔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녀님이 왜 이런 곳까지 행차하신 거죠?”
“아, 즐거운 얘기를 하느라 본론을 깜빡할 뻔했네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전혀 할 말을 잊은 것 같지는 않다. 초승달같이 웃는 눈으로 애런을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옆에 계신 분은… 애런 님이죠?”
“네.”
“애런 님이 자꾸 생각나서 찾아와봤어요.”
“네?”
애런과 아일라는 동시에 대답한다. 아일라는 눈이 휘둥그레 커져 이자벨라를 쳐다본다. 이자벨라는 그저 계속 웃으며 말할 뿐이다.
“애런 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대화를 좀 해보려고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