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문명인의 대화법
* * *
아직 무림과 지구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뭐, 게이트가 워낙 중구난방 어디 생길지 모르는 탓에 정말 없는 건지, 아니면 아직 발견을 못한 건지는 솔직히 모르지만.
적어로 릴리에게 지구에서 바로 무림으로 넘어가는 수단이 없다는 건 확실한 사실.
결국, 테라를 거쳐서 무림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모두 여권 챙겼지? 사진도 6개월 내에 찍은 거 맞고?”
“보통이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테클을 걸어야 정상일 텐데.”
“시대가 변한 거겠죠. 필요한 절차이기도 하고. 그보다 유리 선생님은 너무 유명하신데 괜찮으시려나?”
“교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리고 유명세 따지면 우리도 꽤 한다?”
“수학 여행 떠나는 기분이네요. 조교님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사도 코스프레 하신 분들은 아직 조심하셔야 하니까.”
유리의 호칭은 선생님으로 고정되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교수님 친구니까 선생님인 거라고.
실제로 분위기도 상냥한 여선생님과 비슷하다나 뭐라나.
아무튼 각설하고 릴리가 말한 여권에 관한 내용은 농담이지만, 그렇다고 완전 농담인 것도 아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진 건 사실이기 때문.
1년인가 반년 전부터 지구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테라로 도주하는 일이 왕왕 발생했는데.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는 합동으로 힘을 모아 기구를 창설.
관련 규정을 명확하게 정하고, 이계로 넘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테라와의 문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분쟁이 아닌, 테라와 지구라는 셰계 단위의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라 특히나 더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
덕분에 이제 테라로 넘어가는 건 보통 빡센 일이 아니다.
넘어가려는 게이트가 있는 국가의 허가서.
기관에서 발급한 신분 확인서가 추가.
테라에 가려는 사유과 그에 따른 서류들까지.
종이만 해도 이 정도인데, 그 밖에 이어지는 검사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여권으로 해결 가능한 해외 여행이 귀여워 보일 지경이다.
특히나, 시국이 시국이라 허가서 발급의 난이도는 흉악하다고까지 말할 정도인데.
솔직히, 관련 사업자나, 공무를 위한 출국이 아니면 허가 자체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뭐......어디까지나 남들이 그렇다는 거지.
릴리는 예외지만.
──타각!
릴리는 트레이드 마크가 된 손가락 튕기를 선보이며, 모두에게 각자 환영마술을 부여했다.
더불어 인식 저해까지 포함.
출국 기관을 통과하는 수준은 사실 시몬 쯤은 불러야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인데.
이제는 릴리도 예전의 릴리가 아니라는 건지 홀로 성공해 보였다.
“자, 받아. 예지가 미리 준비해둔 서류들이야, 거기에 이 프로필. 이게 지금 너희들 한테 건, 환영마술의 프로필이고, 검사 받기 전에 잘 외워두도록.”
“헐....이러니까 저희 무슨 스파이 영화 찍는 거 같네요.”
“기억력에 별로 자신 없는데.......”
“대충 대충 해도 돼. 어차피 서류를 철저하게 준비해 놨으니까. 그리 복잡한 질문은 안 물어 볼 거야. 아, 참고로 유리. 넌 특히나 내 옆에서 떨어지지마, 일단은 떨어져도 유지되는 마술이긴 한데, 그래도 만의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학생들이 말한데로, 유리는 보통 유명하다는 수준을 넘어선 사람이다.
움직이는 전략 병기 그 자체.
예지, 철수와 쌍을 이루는 발할라의 상징이지.
얼굴이 드러나면 보통 시끄러운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
릴리는 주의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리를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니.
“응! 걱정하지마! 그럴 줄 알고, 나도 마도구로 환영마술이랑 인식저해 부여하는 거 가지고 있어. 그런데, 이젠 릴리도 마찬가지 아냐?”
“쩝, 뭐......그건 그러려나?”
“물론 어디까지나 교수님으로서지만, 릴리도 이제 유명인이잖아? 거기에 여긴 꼭 그런 의미로만 조심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슬쩍 돌아본 주변.
나름 두 사람도 여기저기 팔려다닌 탓일까.
꽤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말한데로 지금 테라로 넘어갈 수 있는 인물들은 사업자나,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테라에서 벌이는 일들인 만큼 대다수가 정계과 커넥션이 있는 인물들이고.
몇몇은 아예 본인 스스로가 끝빨 좀 날리는 사람들인 상황.
당연히 릴리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 아는 인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뭐, 난 걱정하지마. 내 스타일 알잖아?”
“그래서 더 걱정이라는 건데....에휴.”
“저! 교수님 질문있습니다!! 왜 저희만 있는 건가요? 다른 분들은 어디 계세요?”
하늘이의 물음에 길수와 상협이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의문을 제시했다.
성환이는 물론, 민준이를 포함한 별무문의 사람들에, 알리샤까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일에 참여하는 걸로 들었는데
여기 모인 사람이라고는 고작해봐야 릴리, 유리, 하늘, 길수, 상협. 이렇게 다섯명 뿐이었다.
서류 또한 이에 맞춰 준비한 것인지, 더 올 것 같지도 않고 어떻게 된 일이냐는 것.
릴리는 ‘아하~’ 하는 소리를 내며 손벽을 치며 자기가 설명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그쪽은 신비 문파, 구원 담당, 우리는 깽판 담당이잖아? 당분간은 따로 활동할 거야.”
“얄리샤 님도요?”
“아니, 그쪽은 다른 준비 때문에 먼저 테라로 넘어간 거고. 알다시피 지구에서 테라로 넘어가는 것도 꽤 빡세지만, 테라에서 무림도 적지 않게 피곤한 일이잖아?”
이쪽은 그래도 절차를 따르면 통과 가능한데 비해.
지금 테라와 무림은 왕래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게 전쟁 발발 직전인데, 그게 가능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기에 알리샤는 테라에서 무림으로 넘어갈 수를 미리 준비해두기 위해 이미 테라로 먼저 건너간 상황이다.
“더불어서 이번에는 할 일이 상당히 많아. 그렇기에 서로 역할을 좀 나누기로 했어.”
“어떻게요?”
“우린 무림에 주력한다. 황궁은 성환이네 팀이 알아서 할 거야. 중간에 협력도 하고 정보도 주고 받아야겠지만, 기본 틀은 그래. 그리고 모선이랑 내가 같이 있는 만큼, 군주 관련한 일도 우리 몫이고.”
“헐.......그...그치만 저희는 꼴랑 다섯인데요?!”
“알리샤님 포함하면 6명이긴 하지만. 그대로 좀......”
“이정도면 노동 착취 아닌가?”
“혈교는 원래 사람 빡세게 굴리는 곳이다! 이 어리석은 신도들아! 그리고 내가 바보냐? 우리만 가지고 일을 벌릴 리가 없잖아?”
무려, 초마녀이자 타락교수이며 마황인.
그리고 이제 혈천마제를 꿈꾸는 강릴리가 아니신가.
그런 초라한 혈교 따위는 다른 누가 허락해도 릴리가 허락하지 않는다.
릴리는 드릴로 우주까지 뚫어버리는 인간들처럼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나, 강릴리에게는 생각이 있다!!”
“으음........얘들아,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보자.”
“소환수로 머릿수 체우고, 언데드 군대로 파티 퍼레이드 연다에 5만원.”
“난 혈천마제야 말로 진 무쌍. 혼자서 개돌한다에 10만원.”
“쯧쯧, 믿음이 부족한 아해들이구나, 우리 교수님이야 말로 혈천마제시거늘! 막장으로 일 벌리고 성녀님한테 어떻게든 해달라며 매달리는 게 국룰이지!”
“..........니들 다 나중에 두고 보자....”
패배한 악당마냥 부득부득 이를 갈는 릴리.
하지만, 결국 모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으니.
릴리의 수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출국 자체는 예지가 준비해둔 것처럼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테라로 넘어가 바로, 소환수를 통한 이동을 시작.
알리샤와 접선한 뒤, 무림으로 건너가면 될 일이었지.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알리샤는 접선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알리샤와는 다른 인물이 릴리의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여러분들은 만나고 싶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검은 로브 차림에 딱봐도 수상해 보이는 남자.
릴리는 바로 하늘이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 직후 시야에서 사라진 하늘은 어느새 손을 용의 비늘로 뒤덮고는 로브 차림의 사내의 목을 잡아 들어 올리고 있었으니.
“뭔, 빠꾸도 없이 따라오라마라야? 미쳤어? 우리 교수님이 그렇게 한가해 보이냐?”
“대갈통 속의 뇌가 아이스크림 마냥 흐물흐물 해지고 싶지 않으면, 알리샤부터 어디 있는지 말하고.”
“교수님, 그냥 죽여도 돼요. 시체가 되면 제가 사이코메트리로 단편적인 기억 정도는 읽을 수 있거든요.”
“주변에 쫙 깔린 건 제가 치우고 올까요? 간덩이 부은 놈들이 마술 준비 중인 거 같은데.”
하하호호하던 분위기 따윈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유리까지 옅은 살기를 드러내며 차가운 눈빛으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는 상황.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하늘이의 손은 당장이라도 목을 분질러 버릴 기세를 내비치자, 그는 서둘러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자자자잠깐!! 저..전 절대 여러분들의 적이─”
“알리샤 위치. 그거 말고 지금 너 한테 듣고 싶은 말 없다. 하늘아, 10초 안에 안 불면 그냥 그거 꺾어.”
“넵! 자, 시작합니다~~ 10, 8, 5, 2.....”
“그게 무슨!! 그보다 10초가 아니지 않습니까?!!”
“뭐래? 이게 하늘이식 10초거든? 어차피 불놈은 불고 안 불놈은 안 불잖아? 튜브도 앞부분은 10초씩 스킵하면서 듣는 시대에 기다려줄 시간이 어딨냐? 아, 시간 됐다. 하늘아, 그거 분질러.”
“바이바이~~”
릴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을 파고드는 손.
점점 머리를 붉은빛으로 퉁퉁 부어가고, 의식이 사라진다.
뭐, 당연히 이를 지켜볼 리 없었던, 조금 전 길수가 말한 주변의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마술 포격을 쏘아 댔지만.
릴리가 지켜줄 필요도 없이, 하늘은 등에서 큼지막한 날개를 펼쳐 이를 모두 쳐내고는 개구쟁이 악동 같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이거 진짜 이대로 두면 죽는데?’ 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결국, 상황 파악을 빠르게 한 어느 인물이 바로 릴리의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으니.
“저희는 제국 황실의 일레인 전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알리샤 족장은 정중하게 모시고 있으며, 위치는 여기서 서쪽 방향에 있는 황궁의 비밀 별장입니다! 거기서 지금 일레인 전하와 알리샤 족장이 함께 있습니다!!”
바라던 정보.
하늘이는 그제서야 손에 가한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대 방식이 상당히 예의 없었다는 건 엄연한 사실.
릴리는 무릎 꿇은 이의 안면을 그대로 걷어차 버리고는 바로 스켈레톤 킹, 카녹스와 어비셜 나이트, 플루라를 소환.
이들이 말한 그 별장으로 달려가 알리샤를 보호할 것을 지시했다.
그에 따라 주인의 명을 받은 두 기사는 사방에 폭풍을 흩날리며 사라지고.
릴리는 깊은 한숨과 함께 아까 걷어찬 이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고는 말했다.
“자, 이제 폭력 뒤에 찾아오는 문명찬 대화를 나눠보자. 내가 묻고 너희가 답한다. 심플하지?”
무림으로 떠나는 길.
가는 길목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