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릴리의 신도들!
* * *
갑작스러운 암중 세력의 등장은 어찌보면 무협지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의심의 여지를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뜸 갑자기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힘을 키운 혈교다!’라고 씨부려 봐야, 힘을 키운다는 게 뭐 어디 한두푼 드는 일도 아니고.
여기저기서는 릴리표 혈교의 기원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할 터.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릴리에게는 다~~~ 계획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계획의 첫 완성을 위한 안배는 미리 마련되어 있었으니.
이번 동료야말로 이 포석을 위한 첫 번째 열쇠!
“우리 성녀님에 이은 우리 족장님!! 알리샤 되시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얼떨결에 방문한 우리들을 환영하는 한 늘씬한 구릿빛 다크 엘프 누님, 대족장
그녀 또한 예전 첫 만남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인상이 바뀌어 있었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얄리샤ver 대족장은 야성석인 이미지에, 이런저런 의미로 잡아 먹힐 것 같은 분위기라면.
얄리샤ver 지구는 그런 야성미보다는 오히려 이지적인 인상이 강했다.
당장, 입고 있는 옷도 캐주얼한 정장풍에 사격형의 무테 안경, 손에든 신문.
귀만 빼면 어디 잘나가는 오피스걸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잘 지냈음? 이젠 완전 지구인이라고 해도 믿을 분위기인데?”
“우린 전 세계를 방랑하던 용병이다. 어딘가의 문화에 맞춰 생활하는 건 익숙하지. 하물며 여기 자리잡기 시작한 게 1년이 넘었는데, 이제와서 세삼스럽군. 그보다 오늘 무슨 날인가? 갑게 이게 무슨......”
어째 민준이와 같은 말을 하는 알리샤.
그녀는 당황해 하면서도 문을 활짝 열고 집안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그녀의 말마따라 벌써 지구에 자리 잡기 시작한지는 1년이 넘어가고, 다크 엘프 이주 문제 관련으로 테라에 있는 시간보다 지구에 있는 시간이 길어서 아예 주거지를 구한 것
당연히 집 안에는 알리샤를 제외한 시종과 호위를 겸하는 다른 다크 엘프들도 몇몇 있었고.
그녀들을 릴리의 방문에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아까 하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 동료?”
“단도 직입적으로 우리 무림 가는데 같이 갈래?”
“너무 단도직입적이군. 그보다 무림? 네게 분명 지금 무림과 테라의 사정에 대해 전해둔 걸로 기억하는데..........설명해보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동료를 하나하나 모으는 일은 보물섬의 보물보다 중요한 사안이기에.
릴리는 열심히 이번 무림 원정을 해야하는 당위성과 이유, 그리고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대관절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의 알리샤였지만, 군주의 이야기가 언급되는 부분에서는 그녀도 동의.
적어도 무림에 다녀와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제 다크 엘프의 터전이 지구로 바뀐만큼, 군주의 침략에 대해서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단지, 그녀는 이야기를 다 듣고 한가지 물음을 건네왔다.
“꼭 지금이어야 하나?”
“설명 했지 않아?”
“물론, 그대가 말한 부분에서는 지금의 시기가 적절하긴 하다. 하지만, 단편적이고 형편 좋게 생각한 것이야. 지구 입장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 그대도 알텐데?”
알리샤는 어차피 전쟁이고 동시에 합쳐질 세계라고 이야기했다.
같은 땅에 사는 이상 결국은 개방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
무림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고.
“당장, 무림도 그리 배척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이율배반적으로 마술을 자기식에 맞게 받아들였다. 그대가 이야기한 사술. 이는 이미 마술과 결합하여 주법이라고 불리는 실정이야. 왜 그럴 것 같나?”
“마술 없이 테라랑 떠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정답. 요는 필요의 문제다. 그리고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되던지 간에 지구는 이익을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전에 테라가 이기지 못하면 손해라고 했던 거.
그 역시 단편적인 생각이다.
무너진 것을 복구하려면 많은 인력과 자본, 기술이 필요로 하고, 지구는 합쳐지는 세 개의 세계중 가장 월등한 기술력을 보유한 세계다.
결국, 테라든 무림이든 간에 지구에게 손을 벌릴 것은 자명한 사실.
“물론 테라에 이미 많은 것을 쌓아두었으니, 테라가 이기는 게 보기는 좋겠지. 그러나 먼 시선에서 보면 결과는 다르지 않아.”
“으음.......인정. 네 말이 맞기는 맞아. 하지만, 한가지는 정정해야 할 것 같네.”
“호오? 들어보지.”
대접 받은 홍차를 차분히 내려놓는 릴리.
알리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릴리를 바라보고, 릴리는 장난기를 완벽히 지운, 차갑게 벼려진 얼굴을 지으며 알리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럴 시간 없어.”
“무슨 의미지?”
“멀리 보면 내 의견이 옳다는 건 알아. 하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이 바다까지 달려갈 순 없는 법이지. 예지랑도 이야기 나눈 거지만, 우린 성인군자가 아냐.”
예를 들어 지구의 도시 하나를 구해야 하는데, 이걸 실행하면 무림 전체가 초토화 된다고 가정해보자.
목숨의 가치를 숭고하게 여기는 이라면 당연히 도시가 아니라 무림을 택할 테지.
그도 그럴 게 인간의 목숨은 수로 여길 수 없다고 해도, 같은 인간의 목숨을 저울대 위에 올리면 결국 숫자 문제가 되니까.
하지만, 릴리도 예지도 그럴 생각이 없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시를 구할 테지.
이유?
당연히 지구가 그녀들이 삶을 살아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르는 무림을 위해서 희생해줄 용의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다.
“언젠지는 몰라도 군주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들에게는 지구를 노렸던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시금 전장은 지구가 될 거야. 미안하지만, 우린 그꼴을 다시 봐줄 생각이 없어.”
“..........무림을 지옥으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테라와의 전쟁에 발할라와 군주의 격돌까지 발생하면 무림이 어떤 피해를 입을지 알고서도 그렇게 여긴단 말인가?”
“물론이지. 그리고 전쟁은 무림이 일으키는 거잖아? 알빠냐?”
조금 아깝긴 하지만, 이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릴리는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리샤는 되려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족장 시절의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이니.
“훌륭해. 역시 지구에 자리를 잡은 건 잘한 선택이란 확신이 든 답변이었다. 나도 손을 거들어 주지.”
릴리는 알리샤를 손에 넣었다!
* * *
대망의 마지막 동료.
아니, 동료들이라고 해야 하나?
이미 별무문이라는 집단형 동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신비문파로서 ‘구원’을 담당할 자들이고.
이번에 만날 자들은 혈천마제 강릴리를 교주로 삼아 무림에 혼란을 일으킬 혈교의 신도들이다.
릴리의 1년 반 동안의 성과.
어차피 사표 용지도 수리 못 받은 마당에, 릴리는 당당히 학교로 돌아가 신도들을 소집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는가?”
“움츠리고 있던 시간은 끝났다.”
“마황이 부활의 때와 왔으니!!”
이제는 거의 공용 주거지가 된 릴리의 연구실과 숙소 및 개인실.
머리에 책 덮어두고 자던 놈.
소파 뒤에서 쪼그려 앉아 게임하던 년.
갸차 망치고 훌쩍이고 있던 년놈 쌍.
그 밖에 이런저런 굉장한 재능으로 릴리의 수하를 자청하는 무리들.
릴리는 바로 동아리 카톡방에 혈천마제 강릴리의 부활을 알렸고, 학생들은 바로 달려와 이런 릴리를 찬냥하며 드디어 고대하던 때가 왔음을 노래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릴리 파티원들은 그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대체 저 미친년은 학교에서 무슨 짓거리를 한 거냐며 한탄했지만.
이후 쫄래쫄래 다가온 머리에 뿔난 여학생 한 명과의 대화로 이 진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손님이신가요?”
“저....저거 무슨 꼬라지야?! 쟤 학교에서 사이비 만들었냐?”
“아무리 릴리라도 순수한 학생들을 저렇게 만들다니....”
“학교에서 이거 보고만 있어요?”
누가 보아도 미친 년놈들의 향연
심지어 옷까지 이상한 걸로 알아입고 날 뛰는 학생들까지 있다.
하지만, 여학생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손을 저으며 답하니.
“아하~~~ 저희가 그런 오해를 좀 사기도 하죠. 그냥 교수님 개인 동아리 모임이에요.”
“누가 이게 개인 동아리 모임이라고─”
“교수님이 내내 자긴 타락마황마녀 교수라고 하시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같이 악당영애, 망나니, 마왕 같은 거 컨셉 잡고 노는 거죠! 거기다가 같은 취향이라고 교수님이 엄청 잘 챙겨주세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릴리의 컨셉에 맞춰 여기 악당들도 굉장히 특이하다.
악당영애는 따돌림 당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봉사활동을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다니며.
망나니지만 경찰 공무원 준비 중.
마왕은 마황의 따까리가 되기 위해 전문 조교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야말로 엄청난 악당들이 모인 마의 소굴이다.
“헤헤! 전 악룡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열심히 신성마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 새하얀 신성 브레스도 뿜을 수 있다구요! 캬오~~~”
귀염뽕짝하게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입으로 진짜 새하얀 불꽃을 보이는 악룡 소녀.
릴리의 일행들은 이미를 탁! 치며 절망했다.
“혼돈이다.”
“카오스여......”
“젤나가 부디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그에 비해 릴리는?
“드디어!! 나 강릴리! 타락 마황 혈천마제 마녀 교수가 된다!!”
“““와아아아!!!”””
어느새 학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책생 위로 올라가 손을 치켜드고 있는 중.
참고로.
“악의 신도들이여 나를 따르라!!”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 * *
뭐, 당연한 말이지만, 무림은 위험한 곳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연히 학생들이라고 막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지.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것이, 더는 지구는 나이가 많다고.
건장한 성인이라고 강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학생 중에도 충분히 수위권에 드는 강함을 자랑하는 학생들이 두루 존재했고.
거기에는 무려 용제전에 참여한 자랑스러운 한국의 랭커들도 몇몇 있었다.
“헤헤, 종족 용인!! 판타지아 랭킹 176위였던 룰라룰라탈룰라에요!! 지금은 본명인 강하늘을 쓰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음, 저도 이하 동문 판타지아 랭킹 222위였던 고여라입니다. 본명은 배길수이고, 종족은 그냥 평범한 인간이예요. 뭐, 이젠 평범하다곤 할 수 없겠지만.”
“이터널 67위였던 453번째 젤나가입니다. 본명은 남상엽이고, 모선 미만 잡이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 순수 에스퍼 타입으로 전향한 어리석은 중생입니다. 교수님도 그렇게 성유리님을 만나뵙게 되어 무한히 영광입니다.”
길고 긴 학생들의 면접을 뚫고 온 학생들은 역시나 이 세 명.
전 랭커 출신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그들에게 바로 쏟아지는 성환의 질문.
“학교 왜 다니냐?”
랭커 쯤 되면 다닐 이유가 없을 진데, 굳이 학교를 다는 이유가 뭐냐는 것.
실제로 릴 리가 이들을 받은 이유 역시다 따로 가르칠 것이 거의 없다는 이유가 컸다는 걸 보면, 이들은 전부 대학교에 있을 레벨이 아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첫 번째로 답하는 하늘은
“엄마가 대학교까지는 꼭 졸업해야 한다고 해서요!!”
“여기 새로 생긴 학교잖아? 원래 다니던 곳은?”
“제주고등학교였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는 영하를 뚫고 내려갔다.
제주도.
하물며 본인이 랭커라면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으니까.
거기에 엄마가 ‘했다’라는 언급이 맞물리면.....
성환이는 바로 머리를 숙였다.
“실례했다. 정말 미안.....”
“예? 왜요?”
“그....그게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 잘 살아 계신데요?”
“엥?”
“푸흡! 아저씨 바보! 저희 엄마 딱 마침 친정에 가 있으셔서 한 군데도 안 다치셨지롱.”
“이.....이게!!”
하늘이는 쏜살같이 바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쪽은 무검산 10대 고수.
도망이 성공할리 만무했고, 바로 잡혀서 머리에 큼지막한 꿀밤이 선사 되었다.
유리는 그런 둘의 모습에 그저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릴리는 조용히 유리의 옆으로 가가가, 옆구리를 찌르고는 귀에다 대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엄마만 살고, 나머진 다 죽었어. 아빠랑 남동생 친척들 다. 나중에 말 실수 안 하게 미리 알아둬.”
“에....그...그럼 저건........”
“원래 저래. 자기 가족만 죽은 거 아니라고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거지. 바보 같이.”
릴리는 쓰라린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물론 그녀의 말 대로 죽은 건 그녀의 가족만이 아니다.
제주도은 당시 7할이 몰살 당했으니까.
랭커나 상당히 실력을 쌓은 플레이어를 포함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은 셈.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상실의 슬픔이 가벼울 순 없는 법.
실제로 제주도 출신이었던 플레이어는 전쟁이 끝나고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연합으로서 전선이었던 곳을 지켰고, 예지의 간곡한 설득에서야 삶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남았던 사람은 하늘도 마찬가지.
그녀 또한 마지막까지 제주도를 지켰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성환이와 유리가 그녀를 떠올리지 못하는 건, 그저 지금이 인간 모습이라서 일 뿐,
모든 장비를 갖춘 하늘이의 모습은 두 사람의 기억에도 생생히 남아있을 것이다.
반쯤 미친 것처럼 용들을 학살했던 악룡으로서.
애초에 저런 장난을 치는 것부터가 하늘이 쪽에서 성환과 유리 및 여기 있는 대다수를 일방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
근본적으로 말이 엄마가 대학교까지 나와야 한다고 해서 이곳에 왔다고 하지.
그녀는 대놓고 ‘릴리’를 만나러 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그리고 용제를 죽일 유일한 인물을 곁에서 지켜보기 위해서.
숙연해진 유리는 그저 고개를 숙였고, 릴리는 괜히 또 그때의 생각이 떠올라 복잡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길수.
“전 사실 여러분들 실물로 뵙는 거 처음이예요. 대전쟁 때 전 프랑스에 여행가 있었거든요.”
“와~~~ 잘도 프랑스가 널 도로 보내줬구나.”
“보내주긴 무슨, 반쯤 억지로 비집고 나온 거예요. 에휴~~ 전쟁 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열심히 싸웠는데, 끝나고도 못 돌아가게 하니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민준의 질문에 길수는 그때만 떠올려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길수도 사실은 릴리 때문에 겸사겸사 대학교를 마저 다닐 겸, 이곳에 입학한 것이엇는데.
릴리와의 첫 만남은 교수와 학생이 아닌, 밀입국자와 우연히 그거 때려 잡으러 온 마녀로서 였다.
후에 오해를 풀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와중, 길수는 한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그리고 릴리는 보다 자세히 유럽에 나타난 군주들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
때문에 길수도 성환이 못지 않은 필수 맴버다.
혹여나 다른 군주를 만날 경우 그를 알아볼만 한 건 길수였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상협이.
“..........왜 453번 째냐?”
“첫 번째부터 계속 입력하다가 453번째에서야 등록됬거든요.”
젤나가는 사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