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다시 이세계로
* * *
“기어이 왔네요.”
학생들도 릴리의 사표 소식을 알고 있는 마당에, 그녀가 이 소식을 몰랐을리는 만무.
역시나라고나 할까.
학장실에서 릴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성녀파 학장이 아닌, 아예 성녀 본인이었다.
이에 릴리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정작 본인은 여유로운 티타임과 함께 한쪽 다리까지 꼬며 자리를 권하는 중.
결국 릴리 역시 마지못해 자리에 앉고는 바로 들고 있던 사표를 테이블에 던졌다.
“이번에도 수리 안 해주면, 진짜 곤죽으로 다져주지.”
“진짜 저한테만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곤죽이지, 진짜 곤죽이 어딨어?! 나니까 산 거야. 나니까. 알아?!”
“뭐래, 너님만 저한테 지랄이잖아요. 아 몰라, 진짜 샌드백 되기 싫으면 당장 수리해. 1년 반이면 요즘 군대도 다녀올 시간이야. 난 할 만큼 했어.”
참고로 릴리는 군 복무 기간은 1년 8개월 24일 이었다.
1년 9개월에서 1년 6개월로 군 복무가 줄어드는 시기에 있던 병사였던 탓인데.
그 당시 초과하는 군 복무 기간에 따라 약간의 복무기간을 줄여주는 제도에 적용을 받은 사람인 것이다.
뭐, 당시에는 그래도 후임이랑 같이 전역 안 하는 게 어디냐며 만족했는데.
전역한 뒤로는 1년 반이 군대냐며 심성이 꼬일대로 꼬여버리고 말았다.
“치......딱 1년만 더, 아니 반년만 더 해서 2년 채우고 가지. 아직 단물 쪽쪽 더 빨아야 하는데.”
“아.....골이야, 이년이 이젠 사람을 대놓고 꿀물로 보고 앉았네.”
“히히, 이제야 딱 이름값만으로도 주가가 팍팍 오르는 시기인데, 꿀물이 뭐에요. 아예 농충된 꿀 그 자체지. 아무튼 딜을 제안합니다. 일하는 여건 더 편하게 해드릴 테니까, 딱 1년만 연장 근무! 콜?”
“콜?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내가 수리 안 하면 뒤진다고 했지? 진짜, 샌드백에 다시 들어가고 싶냐?”
어느새 탁상까지 밟고 올라서서 한쪽 팔을 걷어 부치는 릴리.
예지는 바로 양 손을 들어 올리며 ‘폭력 반대’를 외쳤다.
그에 결국 릴리도 일단을 도로 자리에 돌아오고서는 다시금 사표를 예지에게 밀어 넣으니.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장단스러운 분위기를 지우고 보다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알잖아? 내가 지금 학교 관두는 이유. 이제 시간이 됐어. 나 가야 해.”
“알죠.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물었잖아요? 기어이 왔냐고.”
솔직히 말해서 졸업식이랑 은퇴식이 겹친 건 그저 우연일 뿐이다.
릴리는 기다리던 소식이 있었고, 그게 도착했기에 학교를 나오고자 하는 거지.
그리고 당연히 그 소식이란 놈은 예지 또한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녀는 무겁게 내려앉은 얼굴로 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역시 알리샤로부터 들었어요. 무림의 움직이기 시작했다죠. 뭐, 예상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만큼 제대로된 준비는 모두 갖춘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러니까, 가야지.”
“뭘 그러니까 가야인지......전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지구는 이번 테라와 무림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기로 한 거 당신도 아시잖아요?”
그나마 데지르가 테라에 남았다면 릴리가 이러는 게 납득되겠지만.
지금 릴리에게 테라와 무림의 싸움에 끼어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 오히려 끼어들어선 안 될 명분만 차고 넘치지.
“가서 뭐하게요? 테라에서는 마황 찍고 왔으니까, 무림에서는 천마라도 찍고 오게?”
“올~~ 좋은 아이디어인데? 이번 기회에 장 첸 부활시켜서 무림 천마로 등극 시켜볼까?”
“제가 지금 장난하는 건 줄 아세요?!! 진짜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요?!”
탁상을 탕! 하고 내려치며 진짜 화난 건지, 거세게 인상을 찌푸리는 예지.
그녀는 자길 납득 시키지 못한다면 절대 보내주지 않겠다며 언포를 놓았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 릴리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향해 조소를 보이니.
슬쩍 몸을 앞으로 내밀며,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예지를 향해 말했다.
“너도 이제 완전 능구렁이구나. 뭐? 끼어들지 않아? 양심 상태 안녕하냐?”
“큭!”
“1년 반 전과 지금이랑 상황이 바뀌었다는 건 지나가는 어린애를 붙잡고 물어도 아는 사실이야. 넌 날 뭘로 본 건데?”
확실히 예지의 명분상으로는 예지의 말이 옳다는 건 릴리도 안다.
그냥 전쟁도 아니고 세계 단위의 전쟁.
그 안에 얼마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엄연히 제 3자의 입장인 지구가 끼어들어봐야, 어떤 식으로든 좋은 꼴을 못 보는 게 분명한 사실이니.
이를 인지했기 때문에 발할라는 지구의 선봉대로서 최초로 맺은 조약에 이 부분을 명시했다.
지구는 절대 테라와 무림 간에 갈등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뭐, 현명했지. 사람들도 우리가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라고 했고,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여기에 동의했어. 하지만 지금도 그래?”
“아니겠죠......”
“1년 반 내내, 테라 주가는 상한선을 쳤어. 관련 인프라는 계속해서 확충되는 중이고, 이제는 대규모 무역도 열리려는 추세야. 다크 엘프들은 중국 따위 거들떠도 안 보고, 그냥 사회에 자리를 잡았지.”
“알리샤는 요즘 테라에서 있는 시간보다,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정도니까요.”
“처음에는 그리 찬양했던 그 조약을 이제는 거슬리게 보는 놈들 천지인 거 너도 알잖아? 국가는 물론이요. 기업들까지 침 줄줄 흘리면서 어떻게든 이번 전쟁에 한 발 걸쳐보려고 지랄 발광을 시전 중인데.”
예지에게도 분명 압박이 들어왔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테라가 무림에 패배하는 그림은 없도록 하라는 그런 내용의.
거기에 더해 무림 역시 배타적이긴 해도, 테라 못지 않은 기회의 땅.
전쟁의 후를 대비하기 시작하는 무리들도 속속들이 등장하며, 역시나 이 선봉을 다시 발할라가 잡아주길 바라는 이들이 많았다.
즉, 지구는 어떤 형식으로든 결국 이번 판에 끼어들 수 밖에 없다.
“아까는 농담식으로 말 했는데.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아. 테라에서 마황 부캐 하나 파 놨잖아? 이번 기회에 무림에도 하나 만들어두려는 거지. 특히나 무림은 사흉의 흔적이 가장 진하게 발견되는 곳. 운이 좋으면 군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야.”
“거짓말, 당신은 이미 군주들이 전부 무림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잖아요? 마계를 폭주시켜 테라를 그만큼 이잡듯이 뒤졌는데, 흔적도 보이지 않으니 이제 남은 건 무림 뿐이다. 이렇게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뭐........부정은 안 할게.”
피식, 미소를 지으며 릴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사흉, 혼돈.
다른 군주들과는 다르게 확실하게 연결고리를 쥐고 있는 군주.
대전쟁 시절 릴리를 필두로한 한국은 혼천석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해, 사흉의 몸체 절반을 봉인 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물건들은 보관 중에 있지.
만약 이를 미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사흉은 절대로 물지 않을 수 없을 터.
그리고 그렇게 사흉이라는 군주 하나를 낚아 올리는데 성공하면, 다른 군주들 역시 하나 둘씩 전부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다.
‘아직, 아리아스타가 남긴 별의 심장으로 향하는 문은 나타나지 않았어. 뭐, 나타났지만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그럼 군주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누군가가 그곳으로 향하는 문을 찾아주거나 열어주기를
지구에 바로 다시 싸움을 걸기에는 이쪽의 저력도 보통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으니.
재차 수색을 위한 침공은 더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그저 누구라도 좋으니 문을 열어주면 그때되서야 힘을 가로첼 심산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를 대비해 힘을 비축해두는 것일 테고.
릴리는 이를 깨닫고는 사나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이를 갈기 시작했다.
‘그 꼴을 기다려 줄 수 있나. 그 전에 찾아서 모조리 갈아버려야지.’
군주들이 다시 지구에 강림하면 그 피는 전부 다시 지구의 모든 이들이 받아야 한다.
대격변 초기에 벌어진 대전쟁의 재림.
아니, 이제는 그들 역시 본격적인 힘을 쓸 수 있을 터이니, 더 큰 재앙의 불꽃이 지구를 덮칠 터.
그걸 감수하며 기다려 주는 건 바보 같은 일 아니겠는가?
“미리 선수를 쳐야지. 안 그래?”
“살기 등등하네요.......군주들을 그렇게 싫어했어요? 하긴 뭐, 그 개자식들 좋아하는 인간이 이 지구에 있을 리가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무림이면 안성맞춤.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도 있어. 우리가 무슨 성인군자가 아니잖아? 싸움터가 다른 집 앞마당이면 쌍수들고 환영할 일이지”
테라와 무림의 전쟁은 확실할 정도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분란 자체가 판에 끼어들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무림 내부에 틈이 반이 생기는 시기일 테니까.
결국, 예지는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은 납득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완전히 릴리의 의견에 동조한 것은 아닐지니.
그녀는 짜게 식은 시선을 릴리에게 향하며 팔짱까지 낀 체 입을 열었다.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테라만 하더라도 그런 개떡 같은 대형 사고를 쳤는데, 이제는 전쟁 한복판에서 날뛴다니, 꿈에 나올까 무섭네요.”
“헐.....그....그래서 뭘 어쩌려고?”
“그건 기대하고 있어요. 저희들 나름 준비를 해서 당신을 보내줄 테니까. 애초에 테라에서는 당신이 무슨 지랄을 하는지 갈피를 못 잡아서 문제였지. 이번처럼 제대로 목적이 있으면 훨씬 수월하게 당신을 서포트 할 수 있어요.”
예지는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릴리 역시 따라서 일어났는데, 그때 문뜩 눈에 들어오는 사표 용지를 예지는 들어 올리고는 한참이나 이를 바라본 뒤, 조용히 품에 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릴리는 바로 낫을 꺼내드는데.
“어이, 무슨 개수작이지. 수리 안 해?”
“어......음......에.....무림 갔다 온 뒤에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콜?”
“콜 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야. 이년아 거기 안 서?!!”
“아~~ 왜?! 당신 부모님들도 자식 교수됐다고 엄청 좋아하시더구만!!”
혹여라 잡힐세라 쏜살 같이 도망치는 예지와 낫을 붕붕 휘두르며 잡히면 죽는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릴리.
그렇게 이제 다시 테라로.
아니, 새로운 세계 무림으로 발할라는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뭐, 물론 이번에도 대환장 파티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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