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발할라
* * *
아담한 등에서 터져나오는 용의 날개.
목 위로 기어오듯 서서히 드리우는 가시넝쿨의 문신들.
그동안은 데지르에게만 써주던 소환수 융합을 몸에 두른 난, 드디어 대망의 마황 제 2페이즈의 서막을 올렸다.
“음하하하!! 어리석은 불나방들아!”
심지어 이렇게 멋있는 대사까지 애드립으로 날려주시는 나님.
생각보다 배우로서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니, 절로 어깨에 뽕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 엄격한 각본가님께서 바로 치고 들어오시니.
우리 동생께서 귀가로 전언을 보내셨다.
“언빠, 그거 표절! 다른 거!”
“엥? 그딴 게 어디있어?!”
“그거 단풍나무 깎아서 몬스터 줘패는 게임 보스가 치는 대사잖아! 딴 거 딴 거!”
이런
감히 내 명대사를 미리 땡겨서 도용한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뛰어난 배우라면 이럴 때야 말로 진정한 실력이 나오는 법!
난 재빠르게 짱구를 굴려 다시금 자세를 잡고, 목을 가다듬은 다음 소리쳤다.
“음하하하! 어리석은 물나방들아!”
“배우 실력이 죽이네.”
“그러게, 무대와 각본을 죽인다.”
“그런데 물나방이 뭐냐? 그런 거 있긴 함?”
“아, 초파리를 물나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데, 뭐, 은유적인 말로.”
“뭐야, 그럼 나방에서 파리인 거야? 야! 바꿔! 차라리 나방이 났지! 파리가 뭐냐 파리가!! 이렇게 예쁜 파리 있으면 데려와봐!”
“연주 씨, 화낼 포인트는 거기가 아냐......”
뭐, 이런저런 볼맨 소리들이 나오긴 하지만 괜찮겠지.
어차피 이제는 마황의 시간이니까.
사실 나의 2페이즈 같은 건 계획에 없던 거다.
당연하게도 그런 걸 써서 굳이 타인에게 내 전력을 보여줄 이유도 없으며.
이미 엘프들에게 마황과 성녀, 그리고 사도는 신화의 영역에 이른 존재임을 과시한 상태이기 때문이지.
당장, 내가 왜 소환수를 아끼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 소환수가 나중에 드러나서 나와 마황의 연결고리가 되면 곤란하니 그러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서 마의 소환수 융합도 드러나서 좋은 건 없지.
하지만.
“그렇다면 마황의 이름이 울지!”
가뜩이나 이뭐병 같은 용사 나부랭이들 때문에 실력 발휘를 할 기회가 없었다.
예지랑 한 판 했을 때 제법 나의 이름이 울리는 거 같긴 했지만, 결국 그 싸움의 승자도, 주연도 예지였고.
대마녀 둘을 사로잡았다고 해도, 결국은 사로잡혀 나와 직접 주먹다짐을 한 사람은 손에 꼽지.
“그래, 이건 절대 나의 화풀이 같은 게 아니야! 엄연히 마황의 힘을 테라에 각인시키기 위한 싸움, 연출이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당연히 이에 대해 다른 배우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니.
“지랄, 딱봐도 아까 걸래처렴 밟힌 거 때문이구만.”
“쟤 옹졸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뒤끝도 작열이고.”
“뭐, 시원 털털하게 넘기는 일도 많지만, 은근히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다들 아무래도 후회막심한 얼굴인 거 같은데 이미 때는 늦었다.
지금부터는 마황의 시간.
마황 타임!
나의 무쌍이 시작될 순간이니까!
하지만, 이런 날 보며 예지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더이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한 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콜사인, 정화 시작.”
“네?”
“레이드 안 뛰어 봤냐? 요즘은 극딜 메타야. 보스 페이즈를 누가 다 봐줘? 스킵할 건 스킵하고 가야지. 시간이 금인 시대인데.”
난 그제서야 하늘 위에 무엇이, 그리고 누가 있는지 깨달았다.
발할라 내에서는 나를 최대 전력이라고 말하지만, 타국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발할라의 최강의 존재라고 본다.
아니, 더 정확히는 최대의 전력.
여전히 지금도 미국에서는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연신 연력을 보내고 있을 정도라고 하는 대전쟁 시기 용제전의 또다른 주역.
모선 에테르나.
샨사스, 성유리.
그러나 난 얼른 정신을 차리고 예지에게 소리쳤다.
“성녀여! 비겁하다! 판타지에 SF가 웬말이냐?!”
“뭐래? 닌 저거 안 보임?”
“저거 뭐?!!”
“저기, 뒤에 소라를 봐봐.”
난 그녀의 말대로 소라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늘로 양손을 올린 소라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으니.
그녀는 지금.....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잖아?!!”
그냥 팔만 들어올렸을 뿐이다.
마력이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히죽이죽 거리며 나를 본 체 팔만 하늘로 뻣어 있는 상태.
하지만, 예지는 이를 보며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이고는 말했다.
“아니지, 마술을 쓰고 있잖아, 극대마술, 이름하여 에테르나.”
“쓰벌, 이거 용사전에서 썼던 사기─”
“올~~~ 보고 있었네? 참고로 아이디어 발안자 사실 나야. 오늘 이렇게 쓰려고 예행연습 겸 시켜본 거지.”
“성녀여! 네가 그러고도 성녀라고 할 수 있는가?!! 감히 신성한 마황과 사도의 혈투에 SF를 난입시키다니!!”
그리고 그 순간.
나의 앞에 익숙하기 그지 없는 푸른 창이 나타났다.
[Hello and Goodbye]
“야! 니가 여기 끼는 건 아니지!! 모선이 웬 말이냐고?!!”
[ㅋㅋㅋ]
“아....안 돼.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그리고 이 세계수 이거 가져가야 한다고! 우리 엘라임 강화 제료란 말이야!”
[몰?루]
“쓰벌 몰?루 이건 또 뭐야?!!”
드디어 무쌍 한 번 찍어보나 했는데......
이렇게 나오는 건 아니지.
난 글썽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쳐내며, 다시금 예지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성녀여! 마황은 이렇게 죽지 않는다!”
“알지. 니가 안 죽을 거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발할라 사람들, 심지어 쏘는 유리까지 다 알지.”
“언젠가 마황은 부활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죽을 거라는 건 부정 안 하네. 하여튼 눈치는 좋아가지고.”
그야 나도 바보는 아니니까.
모선의 포격에도 살아남는다?
그럼 그 순간 바로 난 최종 보스 마황으로 테라에 뿌리 박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우리가 하는 건 연극
진짜 힘 겨루기보다는 일종의 연출 싸움이니까.
모선의 정화포보다 화려한 기술?
그 딴 게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최소한 나는 없다.
그러니 진짜 마황이 되고 싶지 않다면 난 여기서 죽어야 한다.
예지 또한 그걸 알고 있으니, 정화포를 준비시켜 둔 거겠지.
무대 종료의 마지막 퍼포먼스로.
단지 내가 억울한 건 기껏 융합 마술까지 써서 이렇게 무쌍전 준비를 마쳐놨는데.
여기서 스킵 버튼을 눌러버런 저 잔혹한 성녀의 행태 때문이다.
“흐흑! 나도 무쌍 찍고 싶었는데.............”
“뭐래? 니 말 제국 사람들이 들었으면 뒷목 잡고 쓰러져. 알간?”
그렇게 서서히 하늘에는 또 하나의 태양이.
극광의 빛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이곳 신전을 넘어 모든 알브 헤임의 엘프들이.
아니, 그조차 넘어서 이 땅이 보이지 않는 모든 이들마저 본능적으로 알브 헤임의 방향에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고.
세계수와 마황.
성녀와 사도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 * *
하늘이 열리고 빛이 내려온 날.
단 한 번도 기록된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힘의 파동이 테라 전역을 강타한 그날.
드디어 이름 모를 성녀와 이름 모를 마황의 서사시가 막이 내렸다.
최후의 격전이 이뤄진 장소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요정들의 땅, 알브 헤임.
결과부터 말하자면.........죽었다.
성녀도 사도도
그리고 마황도 모두
당시 싸움을 지켜보던 엘프들이 증언하길, 마황의 힘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이 강대했다고 한다.
이미 단신으로 알브 헤임을 점령하기 충분했고.
그녀의 수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나그나스 홀로 알브 헤임 전체를 유린했을 정도이니.
더 자세히 묘사하고 싶어도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수준이라고 했지.
하지만, 강대했던 건 성녀와 사도들도 마찬가지.
비록 하나하나의 힘은 나그나스에게 그리고 마황 기사에게 약간 뒤쳐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들 모두는 서로 힘을 모아 나그나스와 마황기사를 말살하는데 성공했다.
마치 용사의 이야기속 그들처럼
위험이 닥쳐와도 서로를 의지하며 넘어서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용사 그 자체였다고 해도 무방했지.
그렇게 수하들을 뛰어넘어 마황에게까지 검을 겨눈 그들.
당연히 마황의 힘은 그런 수하들보다 훨씬 강했지만, 성녀와 사도들은 모든 위험을 돌파하며 마황의 목덜미까지 검을 겨누는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승리가 코앞이었던 상황.
마황기사와 나그나스마저 말살 당하고 드디어 알브 헤임을 침략한 마황의 최후만이 남을 거라고 생각한 그 순간.
희망이 있었다.
그래.....희망이 있‘었’다.
마황이 죽은 자기 수하들을 먹어치우기 전까지는.
쓰러진 부하들을 흡수하고 다시금 힘을 키워버린 마황.
그녀는 이미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있던 엘프들 대부분이 그녀를 본 순간 정신을 잃었고 순도 높은 마력이 유형화 되어 보일 상황에 남은 엘프들마저 정신을 가누지 못 했다고 했으니.
마황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마, 성녀와 사도들도 이를 알고 있었던 거겠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걸.
결국 그들은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마지막 마술을.
마지막 희생을.
훗날 이름 불리길 에테르나
영원한 안식
성녀와 사도들이 꺼낸 최후의 비기는 타락한 세계수를 일소하고.
강대하진 마황마저 딱딱하게 굳은 석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
정신을 차린 엘프들은 자신들이 죽지 않았음에 성녀와 사도들의 승리를 확신하며 환호성을 내실렀지만.
이내 싸움터의 중심에서 그들이 발견한 건 파스러져 흩어지는 사도들의 무기들과 남겨진 옷가지.
합장을 하는 자세로 마황과 함께 딱딱한 석상이된 성녀.
그리고 똑같이 굳은 마황의 모습이었다.
무엇을 대가로 마황을 쓰러트렸는지 모르는 이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성녀와 사도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바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신화의 결말은 비극.
구원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후 밝혀지기 시작한 마황에게 희생된 또다른 사람들
제국의 황태자였던 데지르 폰 카이사르
그의 시신은 마황의 성의 한구석에 발견되었다.
소드마스터인 그라면 마황이 필시 데스나이트로 만들기 충분했을 터인데도, 그러지 못했던 흔적으로 미루어, 죽어서도 마황에게 저항했던 그의 모습.
제국은 국장으로 치르고 그를 호국령의 자리에 올렸으며
더불어 마지막이나마 제국 제 2검의 자리를 수여했다.
책의 대마녀, 그리시아.
시공의 대마녀, 바네사.
둘의 희생 또한 발견되었다.
마녀의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마황에게 달려든 두 사람이었지만.
마황성 지하 감옥에서 발견된 그들의 흔적과 시신은 차마 말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마녀들이 모여 달이 뜬 어두운 밤 두 사람의 죽음을 애도했고.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사람들은 마녀들의 밤을 발푸르기스라고 불렀다.
이 사건은 마녀들에게 하나의 구심점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흑색 상아탑에서 마황의 책임을 마녀에게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다음 날, 두 대마녀와 고위 마녀들은 흑색 상아탑을 그날 단 하루만에 지워버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역마살, 삶의 방식으로 뭉치지 않았던 마녀들의 저력이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제국은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마녀들에게 묻지 않았다.
그게 상아탑의 문제가 되었건 마황의 문제가 되었건 모두.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쓰러져 나간 사람들을 애도하는 시간.
애석하게도 모두가 그저 희생을 슬퍼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검은 로브를 뒤짚어쓴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굳어버린 마황의 동상이 탈취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엘프들은 이게 나그나스를 부활시킨 카오스 엘프들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었는데.
정작 카오스 엘프의 존재 자체가 이미 드러나버린 순간이라 오히려 책임 소재가 엘프에게 몰려 가뜩이나 알브 헤임의 멸망으로 입지가 좁아진 엘프들은 더더욱 쓰라린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그나마 엘프라는 종 자체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건 12인의 사도에 엘프들이 있었기 때문일 뿐.
엘프들은 마황의 습격으로 그동안의 쌓아온 원한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교단 또한 마찬가지.
그들은 성녀와 사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의 휘광을 빼앗기 위해, 부랴부랴.
성녀를 정식 성녀로.
사도들을 성녀의 선택을 받은 용사로 임명했는데,
이 수작의 속셈을 모를리 없는 사람들은 교단의 윗층을 질타하며 나아가 교단 자체를 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애 대해서는 제국의 제 2황녀님까지 문제를 거론하셨는데.
비록 어느 정도의 당위성은 인정되나, 그녀는 구세의 영웅이된 성녀와 사도에게 검을
그것도 용사의 검을 빌려 겨운 그들에게 죄를 물어 모조리 참수시켜버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는데.
아마, 용사가 밥값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본보기를 보여준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이제 마왕도 마황도 없으니 교단의 입자가 불안한 지금 시기를 노려 본보기를 보여준 셈이지.
더욱이 그 기회를 틈타 보다 제국 친화적인 인사로 교단을 채우려는 목적도 있을 태고.
특히나 제 2황녀의 성정.
더욱이 황태자 데지르의 장례에도 나오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 더더욱 그런 추측은 힘을 얻기 충분했다.
뭐, 이러니 저리니 사건 사고는 계속해서 밝혀지는 중이다.
쓰레기 같은 이유였긴 하지만, 그래도 이름 없는 성녀가 정식 성녀로 인정된 것.
그리고 사도들 전부가 용사로 임명된 건 취소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를 엮어 또 하나의 동화를 만들어 음유시인과 함께 노래하고 기리고 있다.
이름 없는 성녀,
무언의 성녀.
빛의 성녀와 사도들.
그들이 마황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원하는 동화로서
노래의 제목은 발할라라고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