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종막
* * *
마황 기사와 성녀의 대결.
그야말로 ‘미안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엄청난 광경이었다.
─챙! 챙! 챙!
맞부딪치는 황금의 창과 흑백의 검.
충격파 만으로 대지에 금을 만들고
주변의 모든 지형지물과 건물 파편을 허공에 날려 버리는 신위.
예지는 이전보다 더욱더 강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가 지금 상대하는 데지르는 그저 평범한 소드 마스터 따위가 아니다.
무려 내 소환수.
용용이와 데지르가 융합한 존재란 말이지.
둘의 동조율을 고려 했을 때. 데지르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인간화가 된 마르가스 그 자체에다가 소드 마스터의 기량까지 더해진 괴물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런 데지르와 예지가 설마 동등한 평행을 이르고 있을 줄이야.
난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 하는 것과 함께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너무 팅자팅자 놀고 있었나?”
분명 분체로 그녀와 일전을 벌 일 때는 이 정도 레벨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역시 우세를 점하는 건 데지르였다.
능력치 차이가 맺궈졌다고 하더라도, 순전히 재능과 노력으로 소드 마스터에 오른 데지르의 기량이 예지의 것을 넘고 있다는 게 원인이었지.
“제기랄!!!”
“큭!! 성녀 맞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투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시끄러워! 너한테 그렇게 불려 봐야 기분 좋을 거 하나 없거든?!”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먼저 거리를 벌린 건 예지.
하지만 데지르도 여유만만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약간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당신에 비하면 테라의 성녀 따위 성녀라 불릴 가치조자 없군요. 교단 놈들 꼴이 좀 우습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제 보니 광대 놀음 그 자체였던 거 같습니다.”
비록 골 때리는 이유로 이렇게 칼을 부딪치고는 있지만, 데지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 한예지라는 여성.
엄청나게 강하다.
릴리의 주변에 있으면서 가끔 그녀의 훈련을 견식한 경험으로 판단하길
지구 사람들의 힘은 몰라도, 기량은 솔직히 수준 미달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억지로 능력에 맞춰진 느낌?
여튼 이것저것 부족했다.
뭐, 릴리야 무지막지한 재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술의 경지로 이를 전부 커버하고도 남았지만.
낫을 휘두르는 솜씨에서만큼은 가끔 데지르에게 겸허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었지.
그런데 저 예지라는 여성은 다르다.
“뒤져라!! 강간범!!”
막 휘두르는 거 같지만 무게 중심, 자세, 흘리는 마력을 폭발시키는 타이밍.
모든 게 완벽하다.
오로지 단 하나, 경험이 약간 미흡하기에 지금 자신이 우위를 점하는 것일 뿐.
설령 지구 출신이 아니라도, 그녀는 능히 테라에서 데지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재.
최연소 스피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만한 인물이었다.
─콰앙!!
“그래도 아직이지!! 덜 여물었어”
머리를 향해 내리치는 창.
그리고 봉술의 묘리를 따라 그 반동을 이용해 옆구리를 노리는 창날을 다시금 쳐 내면서 데지르는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건 동화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 당신을 가르칠 생각도, 봐줄 생각도 없으니, 아직 약할 때 확실히 눌러두죠.”
“비겁하게 릴리표 버프 받고 싸우면서!! 야! 나도 버프 내놔!!”
“뭐, 어떻습니까? 제 힘도 갑자기 받은 힘이고, 당신 힘도 묘한 방법으로 받은 힘이라고 들었는데. 쌤쌤이죠.”
“쌤쌤 같은 소리는 또 누구한테.....아, 릴리구나. 젠장!”
그렇다.
이게 만약 로망 넘치는 이야기였다면, 데지르는 예지의 재능에 탄복하며 좀 더 싸움을 이어가고.
조금씩 그녀의 성장을 즐기면서, 기꺼이 싸움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미성년자 강간범으로 감옥에서 썩던지.
혹은 테라에 홀로 남아 이복형제들의 손에 쓱싹 죽을 것이지와 릴리를 따라 제대로 된 지구의 삶을 시작하는 지가 걸린 싸움
데지르는 로망 따윈 개뿔.
예지의 눈에 흙먼지를 던져서라도 이길 작정이었다.
그렇기에.
“당신이 버프라고 말하는 거. 제대로 써서 갑니다.”
데지르는 아직 꺼내지 않은 마르가스의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냈다.
더불어 본인의 마력은 순전히 검으로.
육체가 비워지고 새로운 물이 그 안에 차오르자, 용안, 용심, 용의 어금니와 날개들이 서서히 돋아나고.
폭발적인 능력치 상승을 부른다.
“칫! 제 2페이즈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누군 없는 줄 알고?! 템빨에 버프면 나도 안 진다 이거야!”
하지만 예지도 지지 않겠다는 듯 이미에 붉은 보석을 해방.
전에 나의 분체와의 전투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
순백의 대천사를 꺼내들었다.
“[미카엘의 의지]”
나지막이 읍조리는 예지의 모습은 이전과 같은 백색 그 자체.
머리카락도 옷도 피부도 전부 색이 구분되지 않는 백색의 빛이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등 뒤에 나타나는 3개의 원반
눈을 뜬 예지는 홍옥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지그시 데지르는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보는 데지르는 조금 당황한 듯 볼을 긁적였다.
설마 예지가 여기까지 여력을 남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
아니, 정확히는 알고는 있었지만, 느껴지는 힘이 생각 이상인 것에 데지르는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어쩐지, 그때 릴리 씨의 분체. 마왕의 뿔과 뼈를 가공해서 만든 거였는데. 그걸 일격에 날려 버린 이유가 있었군요.”
“그냥 릴리라고 안 부르고 릴리 씨라고 불렀으니, 살려는 드릴 게. 대신 깜빵에서.”
“하하, 그거 참 다행이네요. 저 역시도 당신이 이렇게까지 강하다면 굳이 힘 조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 중이었거든요.”
팽창하는 피막의 날개.
맹렬히 회전을 시작한 원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세를 잡는다.
일격에 승부를 내겠다는 것처럼.
난 왜 하필이면 지금 팝콘이 없는 거냐 한탄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중이었고.
이 자리에선 모든 엘프들은 가히 신화의 일면에 그저 넋을 놓은 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렇게 서로 보폭이 변화한 순간.
“적당히 해. 미친년놈들아.”
하늘에서 거대한 검이 떨어졌다.
* * *
“씨이이바아아알!!!! 야!! 초를 쳐도 어떻게 거기서 초를 치냐?!! 님 인간임?!!”
난 예지의 데지르를 갈라놓는 거대한 얼음의 검
그 손잡이에 발을 걸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겠어?
발할라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하게 예지보다 강한 인물.
컨셉질의 일인자이자, 동시에 지구의 특이점 중 하나.
우리 고춧가루, 김철수지.
비록 그가 사랑하는 충무공 버전은 아닐지라도 붉은 기사의 갑주를 두른 그는 예지와 데지르 사이에 거대한 벽을 세워 둘의 싸움을 말린 것이었다.
“이런 로망도 없는 녀석 같으니!!”
“니가 할 소리냐?! 야, 넌 양심을 안드로매다로 던져 버렸냐고?! 안 말리고 뭐 했어? 큰일 날 뻔했잖아!”
“큰일 안 나는 거 아니까. 안 말렸지! 내가 개사기 마술을 한 두 개 익혔냐?!”
내가 치트키를 한 두 개 익힌 게 아닌데.
혈마술 만렙이 그것도 못하겠냐고?
“지랄 같은 치트 난리났네. 에휴.......니가 만능인 건 아는데, 보는 사람 생각도 좀 하라고.”
“큭! 중간부터 영상 촬영 중이 었는디........”
난 아쉬운 마음에 수정구를 매만질 뿐.
하지만 이내 비릿한 조소를 지으연 철수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게 철수는 실수를 했다.
설마 난입자가 달갑지 않은 게 나뿐이겠는가?
당자사들이 더 열 받지.
그야말로 세기의 일전을 잿가루를 뿌린 철수는 그 둘의 분노를 한 번에 감당해야 할 터.
난 이번에야말로 철수까지 포함된 궁극의 영상을 찍기 위해 수정구를 들었는데
“김철수 잘 왔다!! 회장 명령이다. 저 새끼 조져!!”
“즐”
“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드디어 도착했군요.”
.,.......사실 그 누구도 화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젠장!
그렇게 일단락된 싸움.
하지만 말이 일단락이지, 아직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난 서둘러 손가락을 튕기면서 환영 마술을 펼치는 한 편, 혈마술의 피를 안개로 바꿔 지금 광경을 감상 중인 엘프들에게 날려 보냈다.
“야, 아까는 그래도 좀 장난으로─”
“장난?”
“릴리씨 진짜 장난이었습니까? 완벽한 진심 같던데?”
“어음.........스테이크에 뿌리는 소금 정도의 진심이 들어간 장난었고, 여튼 우리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내가 이유도 없이 진짜 너희 둘 싸움 관전만 하고 있었겠어?”
말 그대로.
물론 로망도 있긴 했지만.
내가 둘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건 그 자체로 이미 좋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라
마황 기사와 성녀와의 싸움을
뭐, 척 보면 비겼거나 데지르가 이겼겠지만.
그거야 계속 1대 1로 싸우면 그렇고 지금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모선.
철수를 비롯한 사도 역을 맞은 동료들까지 내려오면 데지르라고 한들 게임 오버다.
그렇게 마황 기사, 사천왕이 무너지고.
동시에 엘라임을 보내 엘라임도 무너지면.
그 뒤로 나까지 기적적이 싸움 끝에 패배.
무너지면 그야말로 마황 섬멸의 임무 완수.
난 이러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이 모든 걸 계산해서 말이지.
절대 구라가 아니라구?
이는 어디까지나 공적 목적을 위함이니.
하지만 애석하게도 앞의 두 사람은 내 개소리가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불어 내 개소리의 천적까지 나타나고야 말았는데.
“언빠........헛소리 하지마.”
“하이, 동생. 이게 얼마만이냐?”
모선에서 떨어지는 빛과 함께 내려오는 동료, 사도 역들.
소라의 뒤에는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성환이와 유리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더불어 정말.
레알루다가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까지.
“헤이, 사고 졸라 크게 쳤다며? 그래서 나까지 우리 회장님한테 끌려왔는데 할 말 없냐? 거기에 내 수정구까지 쌔벼가고.”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쌔끈한 누님
부산에 진지를 튼, 그리고 지금 지구에서 한창 마도 연구로 주가를 올리고 계신다는 마녀의 도시의 수장이자 동시에 나와 마도 연구의 파트너쉽을 맺은 마녀.
차연주님께서도 함께하고 계셨다.
누가 마녀 아니랄까 봐 나랑 똑같은 마녀 모자를 머리에 쓰고 말이지.
단지.
“인간적으로 모자는 좀 바꾸지 말입니다.”
“왜? 너도 마녀 모자 쓰잖아? 이게 우리 종족 아이덴티티인데.”
“쓰벌, 모자 외관 말고 색을 바꾸라고......”
내 마녀 수정구를 본 사람이라면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남대문 시장에서 산 듯한 싸구려 장신구에, 핑크핑크한 하트무늬가 잔뜩 붙어 있는 수정구 말이다.
지금 그녀의 모자는 그야말로 아이 테러를 자행하는 핑크색 마녀 모자다.
더불어 수정구랑 똑캍은 하트 무늬 장식으로 도배가 되어 있으니.
이에 난 헛구역질을 하는 듯한 액션을 취하고는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발할라 이사들 총출동이네.”
“그럼 누굴 잡으려고 왔는데.”
“마황이라.......누님도 철수형처럼 한 컨셉질 하는데요? 물론 사고를 좀 너무 크게 치는 게 문제지만.”
“닌 뒤졌어. 감히 탈주각을 잡아? 예지가 저 남자 깜빵에 보낸다고 했는데, 그냥 너도 나란히 같이 들어가라.”
자식에게 지엄한 회초리를 들겠다면 어마무시한 도끼를 손에 쥐시는 오크 로드, 우리 아빠.
깊어지는 한숨과 혈압에 소리에게 기대고 있는 금발의 하이 엘프, 우리 엄마.
이하 동문, 평소에 쓰던 검은 어디 있는지 던져두고, 못이 잔뜩 박힌 야구 빠따를 든 체 데지르를 노려보는 우리 소라.
슬라이딩하듯 초 빅사이즈 빙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철수 또한 그들의 앞에 섰다.
이에 자연스럽게 철수의 뒤를 따르는 연희와 민준.
연희는 왜 자기가 여기 따라 나와야 하냐면 푸념을 놓는 중이었는데, 사실 자기도 쩌리라며 민준이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 밖에도 발할라에 들어가면서 알게 된 사람들까지.
비록 철수나 예지같은 초강자는 아닐지라도, 나름 최상위 중에 최상위 랭커로서 대전쟁시키 함께 길드들을 이끌었던 사람들이었다.
총 12명.
아니
“쩝, 알았다고. 일어나면 되잖아.”
툴툴거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모두의 앞에서는 예지를 포함해 총 13명의 마황 토벌대.
이 지루한 이야기의 종막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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