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마황 기사(사형수) vs 성녀(쓰레기 재벌)
* * *
데지르와 릴리의 신혼여행 이야기를 들은 예지와 동료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으음, 주로 다른 의미로.
“릴리가 황후? 무리잖아?”
“솔까, 근엄한 황후님보다는 말괄량이 공주님이나 제멋대로 여제님이 더 어울리는 이미지지.”
“근데, 데지르라는 사람, 말이 황태자지 거의 떨어져 나간 연이라며? 릴리 황후 되긴 하는 거임?”
확실히.
데지르는 황태자이기는 하나, 황위에 오르기에는 부족한 사람이지.
아, 오해는 마시길.
데지르의 인간 됨됨이나,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철저하게 그의 지지기반에 없기 때문의 문제.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황제라는 옥좌는 홀로 앉을 수 없는 자리이다.
그 위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많은 이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하고, 그렇기에 본인의 능력, 혈통, 카리스마 등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편을 늘려야만 황위에 오를 수 있는 거지.
하물며 지금처럼 황위에 오를 수 있는 후보군이 썩어 넘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다른 황자나 황녀들이 별 시답지 않은 놈들만 있어도 어려운데. 거의 무슨 최종 보스 분위기 좔좔 풍기는 2 황녀, 일레인이라는 여자도 있었잖아?”
“그렇지, 조사하기로는 군권 쪽으로 거의 다 쥐어 잡고는 있는 비공식 철혈 여제.”
“게임이 안 되지. 우리도 실상 언제 뒤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고. 그래서 제일 상황이 아쉬울 거라 생각해서 첫 거래 후보군으로 정했던 사람이 데지르라는 양반으로 정했던 거였으니까.”
무리.
데지르는 황위에 오를 리가 없다.
오히려 다른 황제 후보군들에게 머지않아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처지인데.
쓸데없이 데지르가 제 1황자이기까지 해서 실상 황태자 자리는 죽어서 내려올 운명인 것이지.
말 그대로 끈 떨어진 연이 데지르라는 남자.
하지만.
“그거 다 의미 없는 거 아님?”
“에?”
“응? 의미 없다니 그게 뭔 소리인데?”
“아니, 생각해 봐. ‘그’ 릴리가 ‘사랑’으로 옆에 있잖아? 니들은 릴리 성격 모르냐? 걔가 지 남자가 정치 희생냥으로 쓱싹 당하는 걸 보고만 있겠냐고?”
그 말이 나온 순간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전후 관계가 바뀐 것이다.
릴리가 데지르 옆에 있어도 괜찮은가가 아니라.
데지르의 옆에 릴리가 갔으니, 이제 데지르가 괜찮아진 것.
“이제 다른 후보군 다 나가리인 거지. 데지르가 황제야, 무조건.”
물론 릴리는 성격이 독불장군.
고집 불통에 안 되면 때를 쓰는 그런 악질은 아니다.
이리 튀고 저리 튈지 몰라 불안 불안한 건 뿐이지.
자기 잘못은 인정할 줄도 알고, 누가 말로 설득해서 본인이 납득하면 굽힐 줄도 아는 사람이 릴리.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데지르가 황위에 오르지 못 하는 이유를 릴리가 납득할 리가 없잖아?
혈통도 제 1황자.
이미 황태자이기까지 한 데지르인데.
거기에 사랑이라는 옵션이 붙어 눈에 꽁깍지라도 씌였다면 이미 거기서 게임 오버다.
장담하는데 릴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지르에게 황위를 가져다줄 것이다.
“안 되면 제국을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신 제국을 건국할 걸?”
“인정.”
“지금 마황 놀이가 얼마나 소꿉장난이었는지, 제대로 보여주겠지.”
“와.......용제전에서야 릴리가 수성전을 펼진다고 가만히 있었지. 공격이라.”
“심지어 사랑에 눈이 멀었으면 보나 마나 뻔해. 자비도 없을 껄?”
보통이라면 반란을 일으켜도 전력의 보존과 향후의 일을 생각할 테지만 릴리는 그럴 리가 없다.
그저 묻겠지.
자기 남자에게 굽힐 건지, 아니면 죽을 건지.
확 돌아간 눈동자는 중립 따위를 허락할 리 없다.
그렇게 데지르를 신 제국의 초대 황제로 만든 릴리.
공포로 짓눌려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레드 카팻의 위를 걷는 그녀는, 데지르가 씌어 주는 황후의 티아라를 머리에 쓰고 데지르의 옆자리에 앉는다.
당연 이후 신 제국은 진격을 시작할 것이다.
통일 전쟁.
테라라는 하나의 세계를 제국의 그늘 아래 통일하기 위한 정복 전쟁의 막을 올릴 것이다.
무림?
짓밟는다.
알브헤임?
입을 놀리는 순간 찢어 버리겠지.
각 지역의 왕국들은 물론 수많은 이 종족의 무리들에게 항복하여 신 제국에 귀속될지 아니면 그녀의 손에 멸망할지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강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 제국에 행보에 저항하는 무리들은 당연히 생겨날 터.
특히나 교단이 그런 제국의 행보를 두고 볼 리가 없다.
하지만 의미가 있을까?
고작해야 마왕 하나를 잡지 못해 욕이란 욕은 오질 나게 쳐 먹고 있던 교단이?
릴리는 그런 마왕을 심심풀이 땅콩마냥 죽여 버린 괴물이다.
오히려 데지르가 조금만 머리를 쓰면 교단은 문제도 아니겠지.
사람들에게 말하면 그만이다.
신 제국은 마계까지 정복할 것이라고.
더 이상 마계로 인해 괴로울 일 없을 거라고.
헛된 약속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미 성공한 게 마계 정복이지.
발할라의 모두가 알 듯이 릴리가 바로 마계의 마황이니까.
그 뒤, 무능한 교단의 수뇌부들을 숙청.
상징성이 있는 성녀나 용사는 유폐.
대들지 않고 굽실거릴 인사들로 다시금 교단을 체운다면, 신 제국은 오히려 신의 선택받은 신성 제국으로 거듭날지도 모르지.
“와우!”
“그럼 이제 릴리는 황후님이구만”
“근데, 그러면 릴리는 발할라 사람이냐 아니면 제국 사람이냐?”
“어음.........글쎄? 그건 잘. 릴리 마음 아닐까?”
릴리가 데지르와의 혼인 후에도 여전히 발할라의 편을, 더 나아가 지구의 사람으로 남든다면.
그야말로 만만세가 따로 없다.
제국을 삼키는 걸 넘어, 테라 전역을 날로 먹는 셈이니.
그러나
“사랑에 눈 돌아가서, 세계급 이민 신청이라도 하면........”
“릴리가 적일지도 모르네? 음! 야, 잠만 나 사표 좀 쓰고 올게.”
“내꺼까지 써놔라. 각 보고 바로 탈주하게. 아직 뒤지고 싶진 않아.”
“나도 진지하게 이민 신청을.......”
태생의 뿌리가 있기에 정말 그들의 말처럼 적이 될 리는 없겠지만.
사랑을 따라 국적을 바꿨다면, 이전 직장의 편을 들어 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필시, 신 제국의.
새로운 통일 제국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을 골라가겠지.
배신이라 부를 순 없는 일이다.
결혼해서 지아비를 보좌하는 일이니, 배신보다는 사퇴.
그리고 이직이라고 해야 하리라.
물론 차라리 배신이 낳을지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질 순 있지만.
그리고 이러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예지는 한동안 벙찐 상태가 되더니 이네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안 돼─────!!! 절대! 절대로!! 안 돼!!”
감히 자기에게 따박따박 월급 받아갔으면서 계약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직이라고?
예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꼬신 조커픽 카드인데, 그걸 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애먼 남자가 낚아 채 가는 꼴을 어찌 두고 볼 수 있으랴.
하지만 그리시아는 여기서 또 하나의 폭탄을 투하하는데.
“하하,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둘은 함께 지구로 돌아가 알콩달콩한 사랑을 속삭인다고 했으니까.”
“그리시아!! 너 지금 무슨?!!”
“그러니.....으음. 혼인 퇴직? 내가 지구 단어를 배운 게 얼마 안 돼서 이게 맞는 말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런 거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어떻게든 아니라 변명하려는 바네사의 입을 막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내뱉은 그리시아의 발언.
결국 심지의 불이 모두 타들어 가고 예지는 폭발했다.
“으아아앙!!! 내가 그걸 두고 볼 줄 알아?!! 지구? 알콩달콩?!! 넌 날 우습게 봤어. 내가 재벌의 싸움 법을 가르쳐 주마!!”
지구?
지구라면 더 좋지.
니들은 뒤졌어.
감히 내 품을 떠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한 응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주마.
더욱이 그 사랑.
돈으로 철저하게 망가트려주지!
“어....어라? 저기요. 왜 갑자기 저희에게.”
눈이 돌아간 예지가 첫 번째로 향한 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그리시아와 바네사였다.
어느새, 다시금 버전 핏빛 성녀의 메이스를 꺼낸 예지
그녀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하니.
“협력해 줘야겠어.”
* * *
그리하여 지금의 상황.
예지는 모선에서 내리자마자 가면을 쓰고 있는 릴리와 데지르에게 다가가 한 장의 서류를 던지며 소리쳤다.
“후훗! 당신 모르죠? 제가 당신 신분을 새롭게 만들어줄 때, 사실 나이를 속였다는 거.”
“엥? 야, 지금 그 애기가 왜 튀어 나오냐?”
난 갑자기 예지의 입에서 내 나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는 데지르 또한 마찬가지.
이런저런 상황 설명이나, 혼을 내는 그림은 상상했지만, 갑자기 나이 문제를 꺼내는 것은 그라고 해도 예상할 수 있던 것이 아니기에.
그러나 예지는 그런 우리의 반응에 더더욱 흥이 오른 건지, 섬뜩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니.
“당신 나이는?”
“나? 올해 28이잖아?”
“정말 그럴까요?”
입꼬리를 씩 말아올리는 예지의 모습에서 난 약간 등에 땅방울이 맺히는 걸 느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지도 고의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어색하지 않도록 한 조치였을 뿐.
그도 그럴 것이 릴리의 외모는 많이 쳐줘야 중딩이니, 대뜸 계란 한 판을 앞둔 나잇대라고는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괴리감이 컸고.
그러한 괴리감은 나중에 좋지 못한결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적절히 조정한 것뿐이지.
그리하여 현재 릴리의 신분적 나이는 엄연히 만 17세.
“미성년자!!”
“어?”
“릴리씨, 미성년자라는 게 뭡니까?”
“아니, 잠만, 갑자기 뒷골이 쌔하거든? 예지야? 지금 먼 소리를 하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행복한 결혼 생활 따위, 감히 재벌님 앞에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넌 내꺼야!! 절대 안 줘!!”
릴리의 신분이 미성년자인 것.
그리고 릴리와 데지르가 함께 있었다는 걸 증명해 줄 증인.
대마녀, 그리시아와 바네사는 성스러운 창칼로 포섭한 예지.
계획은 끔찍하면서도 단수하고.
동시에 강력하면서도 교활한 것이었으니.
“음하하하! 당신 남자 따위, 미성년자 강간으로 깜빵에 쳐 넣어버릴 거야! 변론? 풋! 미성년자 따위, 보호자 없으면 X밥이야! 증인도 다 만들어 놨으니, 황태자!! 당신은 인생 종 쳤어!! 감히 내 릴리를 건드린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 주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시아는 대마녀
그것도 책의 대마녀였다.
누가 봐도 테라의 지식인이자 권위자란 소리지.
그런 그녀의 이름을 이용해 증인석에 세우고, 릴리는 강간 당한 미성년자 코스프레을 씌워 법정으로부터 봉인.
데지르를 지구의 방식, 사회적, 법적으로 말살 시킨다.
테라로 꺼져 버리든, 지구의 감옥에 들어가 썩든
무슨 수를 써서든 릴리와 떨어뜨린다.
물론 구멍도 많고, 허점도 많은 계획이다.
파고들려면 어떻게든 파고들 구석은 많겠지.
거기에 어디까지나 날조된 증언일 뿐, 증거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래 봐야, 돈이면 다 돼!! 유전무죄 무전유죄 모르냐?”
쓰레기 재벌 최강의 막장 발언 폭발.
소리치는 광기 어린 예지의 모습에 난 잠시 데지르를 바라보며 측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 너 미성년자 강간범이래”
“..........제가 대체 뭘 했다고. 당신 뒷바라지 한 죄밖에 없는데.”
당연하지만 데지르는 억울했다.
미성년자의 뜻은 몰라도 강간이라는 단어는 그도 아는 부분이니.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갑자기 자신이 강간범이 된단 말인가?
그는 결국 쌓여 온 분통이 터져 나온 것인지,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허리춤에 칼을 뽑아 들었다.
더욱이 예지 또한칼을 뽑아 든 데지르를 바라보며 성창을 들어 올리니.
“결판을 냅시다. 당신이 뭔 오해를 하든 상관없어, 난 나의 미래를 내 손으로 쟁취한다.”
“황태자면 다냐? 감히 재벌 나으리를 건드린 대가, 아침 드라마 코스로 보여 주지. 해피 엔딩 대신 핵피 엔딩으로 말이야.”
이를 바라보는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지금 여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인가?
뭔가......
대화가 필요했다.
물론
쾅아아아!!!
가능할진 모르지만.
“강간범?! 죽도록 고생한 게 얼마인지 당신이 알긴 알아?!!”
“얼마든 간에, 이자까지 포함해도 릴리는 선 넘었지!! 촌 동네 촌장 아들 주제에 누굴 넘봐!! 미성년자 건드리면 사형이야 사형! 넌 여기서 즉결 처분이다!"
바야흐로 이렇게 이름 없는 성녀의 신화 종막의 첫 페이지.
성녀와 마황의 기사.
두 사람의 결투가 시작되었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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