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성녀 강림
* * *
솟아오르는 거대한 뿌리.
그나마 찬란하던 세계수의 가지들과 꽃들이 탁하디 탁한 마기로 물들기 시작한다.
“어....어째서.....”
“정령왕이시어 부디 부디 세계수에게 다시금 축복을.....”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는 거다.”
이러한 광경은 많은 엘프들로 하여금 절망 그 자체를 안겨 주었다.
믿었던 신의 타락이 그러할 진데. 오히려 그 감정을 ‘절망’ 이 두 글자로 표현하는 것도 사실 그들에 대한 무례겠지.
하지만 비단 절망하고 이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폭력적이고 가혹한 현실에 맞서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고.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이곳 알브 헤임에는 명예롭고 강인한 순혈 엘프들이 많았기에.
이들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를 느끼며 그 어떤 이의 부름도 없이 자의로 뭉쳐 다시금 세계수를 지켜내기 위해 신전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콰아아아아!!!!
“이건 대체!!”
“모두 중심을 잡아라!!”
“그리폰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은 어서 구조를!!”
지반이 갈라지며 솟아오르는 거대한 뿌리.
이는 지진이라는 자연 재해 이상의 파괴를 도시 전체에 흩뿌리고 다가오는 무리들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닿기조차 거부감을 일으키는 거무튀튀한 가시들이 돋아나는 굵은 뿌리.
아름다운 도시가
살아왔던 고향이 망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동기가 될지니.
신전을 향하는 엘프들은 오히려 더욱더 굳건한 마음이 되어 마계의 정글처럼 변하는 도시를 가로질러 최후의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이는.
“마....말도 안 돼.”
검은 나무의 옥좌.
타락한 정령, 웬디고의 머리 뼈를 가공해 만든 지팡이.
싸늘하게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사자(死?)의 시선.
오로지 구전 속에서나 언급되던.
아니, 이제는 말로 전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오로지 다크 엘프들에게만이 전해지는 고대의 악몽.
엘프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최초의 엘프, 카오스 엘프.
나그나스가 그곳에 있었다.
요사스럽게 손이 떨려오긴 했지만, 그녀의 앞에 당도한 모든 이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다크 엘프의 신, 나그나스라는 걸 깨닫고야 말았으니.
이 현실을 마주한 엘프들은 자기 눈을.
그리고 진실을 노래하는 자신의 이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
[없나? 그럼 그렇게 생각하고 죽어라. 그리도 다시 나와 같이 지옥에서 올라와 다시금 나에게 죽어라.]
“뭐?”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진언에 정신을 차린 엘프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으니.
그녀의 손끝이 움직이자, 그녀의 뒤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세계수에서 나무줄기들이 뱀처럼 기어 나와 하나의 창이 되어 쏟아쳤다.
그 수
감히 해아리는 게 불가능할 지경.
그도 그럴 것이 세계수다.
알브 헤임의 중심부부터 거의 도시의 반절 이상을 감싸던 나무였던 것이다.
제아무리 그중 극히 일부라도 고작해야 수명 도착한 엘프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하기 그지없는 힘이었으니.
살아남은 엘프는 전무
모든 숲의 요정들이 잔인한 꼬챙이가 되어 바닥을 새빨간 피로 물들이고.
그 바닥조차 꿈뜰거리며 그들의 피와 살점을 탐하니.
그 뒤 도착하기 시작한 엘프들은 알 수 있었다.
이미 세계수는 떨어졌다는 것을
과거, 뿌리의 일부만을 장악했던 나그나스가 아닌, 정말 세계수 그 자체를 타락시켜 지배한 괴물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언제든지 자기 앞에 당도한 엘프의 무리들을 섬멸할 수 있음을
너희의 가치 따위 손짓 한 번만 못 하는 걸 여과 없이 보여 준 나그나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뜩 잠깐 발을 바라봤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다시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모두의 앞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검은 로브 차림의 무리가 뒤집어쓴로브를 벗어 던지니.
“허억!”
“카....카오스 엘프?!”
“대체 어떻게 저런!!”
하나둘씩 신전에서 나타나는 무리들 전부가 카오스 엘프였다.
물론 그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대체 무슨 수단을 부린 건지, 그들 모두가 손을 올리자 다시금 세계수가 고동하고.
보랏빛 마기보다 더더욱 섬뜩한 검붉은 기류가 뿌리에서 줄기를 타오 오르며 세계수의 꽃입에 핏빛 피안화를 피우니.
나그나스는 그를 황홀한 눈빛으로.....맞나? 뭐간 살짝, 들떠보이는─
아무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니.
[우매한 자들아 들어라, 내가 돌아왔다]
[오로지 이 날만을 고대하고 인내하며 저승에서 기어 올라 이곳에 당도했다.]
[지금, 이 순간, 세계수는 새로운 이름을 받을지니]
[나, 이 나무를 미스틸테인라 칭하고, 알브헤임은 오늘 이 순간부터 스바트르알브헤임이라 불릴 것이다.]
타락한 세계수의 새로운 이름, 미스틸테인
더불어 카오스 엘프, 더럽혀진 요정들의 땅. 스바르트알브헤임의 선포.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용납할 수 없는
그러나 저항할 수도 없는 광경을 마주한 엘프들.
그들은 왜 손짓 한 번에 사라질 자신들이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바로 그녀가 자신들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보다 절망하고
보다 통곡하고.
보다 끔찍하게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 죽어 버리길 바라기 때문에.
어딘가 장난기 가득해 보이면서도, 차갑게 벼려진 그 미소에는 그러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결국 한 엘프가 자신의 검을 심장에 가져가 소리치니
“난!! 결코 너희의 종 따위는 대지 않는다. 나의 심장은, 나의 피는 세계수의 뿌리와 함께할 것이니!! 으아아아!!”
─푸욱!!!
가슴을 관통한 검과 함께 솟구치는 피.
바닥을 물들이는 붉고 뜨거운 용기.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달콤하고 깨끗한 요정의 피는 별미지.]
의미가 없을 뿐.
태생적으로 성욕이 적은 엘프들마저도 순간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의 고옥한 자태를 보이며 혀로 입술을 훑은 나그나스
그녀는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타각!
경괘하고 맑은 울림과 함께 꿈틀거리는 바닥은 용기의 증명을 탐스러운 과실주 마냥 빨아들었다.
의미가 없다.
아니, 그걸 넘어서 그저 그녀의 여흥을 뿐.
이를 참다못한 엘프 한 명이 소리쳤다.
“대체!! 왜!?! 너도 뿌리는 우리와 같았을 진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우리가 얼마나 세계수를 사─”
가슴속에 울리는 외침.
그건 분명 지금, 이 자리의 모든 엘프의 마음을 대변하는 목소리었다.
하지만 이를 용납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나그나스의 주위에 선 로브를 두른 카오스 엘프들.
그들은 어느샌가 손에 세계수, 아니 미스틸테인의 가시를 든 체 날아들어 그 말을 하는 남자의 온몸을 찔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크억! 나....난!!”
─퍽! 푸욱! 퍼억!
인정사정없이 찔러댄다.
머리, 손, 등, 다리.
어디 하나 할 것 없이, 엄청난 증오를 보이며 시체가 걸레가 될 때까지.
마치 이를 시체를 먹어 치울 미스틸테인이 씹을 거리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사정 없이 그 엘프를 찢어놓는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그들의 행동은 오히려 나그나스의 손짓에 의해 막을 내리니.
드러난 시체는 그 어떠 단어로보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저........피뭇은 고깃덩어리었을 뿐.
[뭐, 여흥은 이 정도면 되겠지.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것도 나의 주군되시는 분께 무례일 터이니]
“주....군?”
[아, 말하는 걸 있었구나, 나의 신, 나의 모든 것, 나에게 삶과 복수의 과실을 내려다주신 나의 주인분을. 저승에 떨어지기 전 그분의 자태를 눈에 새길 기회를 주마.]
[자, 올려다보거라. 그분을, 마계의 신, 마황님의 모습을]
엘프들은 그재서야 깨달았다.
어째서 나그나스가 부활한 건지.
어째서 카오스 엘프의 무리가 이곳이 있는 건지.
알브헤임의 방벽을 부수고 엘프들을 학살하며 신선으로 돌신한 그 거대한 과수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녀의 모습은 작았다.
아담했다.
까마귀의 망토를 흩날리며 이제는 미스틸테인이라 이름 붙은 나무의 가지에 걸터앉은 작디작은 소녀.
비록 섬뜩하기 그지없는 대낫이 그녀의 옆에 세워져 있긴 했지만, 오히려 그보다 그녀의 옆에 피막의 날개를 등에 가면의 기사가 더 마황 같이 느껴졌다.
[아하, 너희는 그분의 힘을 느끼는 것조차 하지 못 하는 것들이구나.]
[불쌍하다못해 이제는 가련하게 느껴지는 미물들]
[오호~~~! 그분께서 너희에게 자비를 내리시는구나, 친히 그 모습을 보이주시겠다 이야기하셨어!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머리를 조아리거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이미 저렇게 눈앞에 서 있는데, 무슨 모습을 보인다는 건지.....
그러나 그 의미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으니.
그와 동시에 왜 나그나스가 머리를 조아리라 했는지도 함께 알 수 있었다.
───쿠쿵!!
“크억!!”
“이....이게 대체!!”
“저...정녕 이런 존재가 실존한단 말인가?!!”
농밀한 마력.
그저 농밀하고 농밀한.
극한까지 압축되면서도 그 양마저 체감할 수 없는 압도적 마력.
이미 이건 그 자체로 극독이었다.
숨이 턱 막히며,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심지어 이 범위에 영향이 없을 카오스 엘프들마저도 새파랗게 얼굴이 질리고 있으니.
그랬다.
이게 바로 마황.
새롭게 태어난 마계의 신.
아아.......
어쩜 이리 어리석을 수 있을까?
제국이 마황과 전쟁하고 있다고 했을 때, 고작해야 마녀 하나 이기지 못해 저리 쩔절매고 있다 비웃은 자신들이은 대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했던 것이란 말인가?
살면서 세계수를 제외하고 그 어느 것도 우러러보지 않았던 엘프들은 처음으로 제국이라는 인간의 나라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저런 존재와 싸왔다니.
그리고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니.
거기에 그런 마황이 발길을 돌려 이곳에 오게 만들었다니.
인간이란 이리도 강대한 종족이었단 말이간?
용사란 대체 이리도 위대한 존재였단 말인가?
이름 없는 성녀.
그녀의 곁에 나타난 사도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있었다고 전해지는 엘프들
부디 자신들을 구원해 주서소.
이 참혹한 절망으로부터.
저 위대한 악신으로부터 숲의 요정을
타락한 세계수를 구원해 주소서.
부디........
그리고
하늘이 열렸다
* * *
“내가 장담하는데, 아무리 마술의 코스튬을 연습해도 저건 못 따라간다.”
“생에 다시 보기 힘든 엄청난 광경이라는 건 동의합니다.”
타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 하는 모선의 워프.
특히나 도착할 때의 연출을 그야말로 장광 중에 으뜸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이 깨져나가는 저 연출.
물론 지금은 약간 아쉽게도 모선 자체가 스텔스 기능을 활성화하고 있어, 100%는 아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선이 없어서 더 멋진 부분도 있었으니, 난 오늘 하루 이걸로 충분히 배가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유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후훗,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만나는 건지.”
“개인적으로 그 한예지라는 분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릴리 씨 가족분들이과도,”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하필이면 예지라니.
하필이면 우리 가족이라니.
벌써 소라가 연장챙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
“쯧쯧, 뒤지기 싫으면 내가 있을 때 만나.”
“오호~~ 언제는 오해할 짓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본인이 그런 자리를 만드시는 건가요?”
“야이 씹! 지구에 가면 내가 니 옆에 없을 거고, 그러니까 만나지 말라는 거지. 데지에몽. 요즘 왜 그래? 콩떡을 콩떡으로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럼 콩떡을 콩떡으로 알아듣지 무얼로 알아 듣습니까?”
“찰떡이지!! 항상 잘했으며서!!”
“으음.......뭐, 이 이야긴 이쯤 하도록 하고, 그래서 마무리는 여기서 지을 셈입니까?”
마황과 성녀와의 일전,
이의 맞침표를 여기서 찍을 거냐는 의미.
그러나 사실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마왕이든 마황이든 용사가 오면 싸워주는 게 도리잖아? 사실, 히어로 빌런 구도에서 마왕은 히어로란 말씀이지.”
언재나 준비된 빌런과 언제나 준비된 상태여야 하는 히어로.
근데 내 말대로 용사와 마왕 구도에서는 사실 언제나 준비된 존재는 용사고 준비된 상태여야 하는 게 마왕이다.
싸울 권리.
싸울 시간.
어떤 상태인지, 전부 용사 마음.
마왕은 서러워서 살겠나?
“거기에 썩 나쁜 것도 아니잖아? 마황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국의 눈을 피할 수 없고, 여기라면 신비주의 연출도 되고 좋지 않겠어?”
“나그나스 때문에 좀 묻히지 않을까 싶지만........엘프들을 보면 또 그렇진 않겠지요.”
지금 엘프의 눈에는 나그나스라는 절망과 그 위의 마황이 적절히 융화된 상태다.
그 밖에 준비해 둔 것도 있으니, 아마 릴리가 원하는가장 이상적인 소문이 주변에 퍼져나갈 터.
확실히 나쁘지 않다.
“넌 그냥 다크 엘프들을 도와 마계를 수색하다 마황성에 당도 끔살했다는 걸로 퉁치자.”
“구멍이 너무 많은데......”
“나름 미사여구 좀 더해주면 희생된 영웅, 제국을 위해 신명을 바친 황태자 쯤은 되지 않겠어?”
“그건 그렇군요. 아니지, 일레인은 좋아라 하겠네요.”
“일레인 갠 또 누꼬?”
“배 다른 여동생입니다. 뭐, 여동생스러운 면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지만, 그녀라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죽음이라도 좋게 미화해 주겠죠.”
절대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녀는 그야말로 철혈, 이용하고자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용하는 타입이니.
그저 황태자의 죽임을 적절히 포장하여 황실의 권위를 세우고 싶은 것뿐.
난 그 말에 하긴, 이 시끼, 형제 관계 십창 났다는 걸 깨닫고는 심심한 위로를 던졌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등장하는 거대한 빛의 기둥, 모선의 아이덴티티.
그와 더불어 나타나는 황금의 성창.
“야, 겁나게 오랜만이다.”
“.........감히 내가 발할라의 사장인데, 무노동으로 농땡이를 피워? 넌 뒤졌어. 거기에 바람까지? 팔다리를 꽁꽁 묶어서 태그, 본디지를 달아주지.”
“다 이해하겠는데, 바람은 뭐냐 바람은? 그리고 여자가 본디지 태그는 어떻게 아는 건데?”
흩날리는 은발의 주인.
우리 성녀님.
한예지의 등장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