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영화 시작
* * *
감히 우리 발할라에
아니, 우리 지구 출신 엘프들을 거름망으로 쓰려는 테라산 귀쟁이들에게 나와 데지르는 응분의 대가를 물었다.
“크어.......헉!”
“사...살려....”
“제....제발..”
기나긴 혈로 속 살아남은 엘프들
절대 죽이지 않겠다 다짐한 항복을 외친 엘프 장로들.
참고로 데지르는 마지막 장로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어지만,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사나웠는데.
그에게 있어, 아무리 뒤틀린 신앙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부하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던 것을 내놓으며, 제 목숨 연명하기 위해 항복을 선언한 자들은 절대 상종할 수 없는 부류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부탁하여 절대 이들이 과다출혈 따위로 죽지 않게끔 조치를 부탁했고.
난 그에 승낙하여 혈마술을 이용해 내 마력이 바닥나거나, 나와의 마력이 끝기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안도록 만들어 두었다.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영혼만큼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엘더 벤시 멜라티스를 몰래 붙여 두었을 정도이니.
나와 데지르의 테라에서의 마침표가 싱거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 뒤 당연히 찾은 건 세계수.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역겨웠다.
거대한 나무 줄기에 오르는 보랏빛 더러운 마기들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줄기에 세계수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이지, 맥박과 같은 고동까지 느껴저 만지는 것조차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쩌려
그래도 할 일은 해야하는 것을
난 조용히 마술을 사용해 하늘로 날아올라, 세계수와 융화된 카오스 엘프들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아예 신경 자체가 죽어 비명은 내지르지 않는구나 생각했는데.
“어이쿠......”
아니었다.
꿈벅 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느낄 수 있는 그 감정.
세계수에 박힌 이들에게는 이미 비명을 지를 목소리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으니.
빈말로라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뽑아낸 여인 한 명만이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기운이 남아있었을 뿐.
“하아.........귀찮네.”
약간은 정밀작업 같은.
동시에 반복 노동같은 일이 끝나고 바닥에 내려놓은 카오스 엘프들의 수를 해아려 보니, 얼추 300 남짓한 숫자였다.
많다면 많고, 어떻게보면 적다면 적은 수.
그러나 이마저도 나의 착각이었다는 걸 반쯤 죽여놓은 엘프 장로에게서 들을 수 있었으니.
하나의 거름망을 채우는데 시도되는 엘프는 얼추 최소 20명에서 많으면 50명이라고 한다.
즉, 살아남은 게 300이란 소리고, 죽은 이는 어쩌면 만이 훌쩍 넘었을 수도 있단 소리였지.
일이 잘못 풀려 어머니와 소라가 알브 헤임에 보내졌다고 해도, 구출할 시간은 있지 않았을까 싶은 나의 예상을 송두리체 뽑아 주시는 아주아주 감사한 말이었다.
─콰직!!
“크으아아아악!!!!”
난 그 감사함에 보답해, 잘린 허벅지의 살을 낫의 뒤축으로 짓뭉개 주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나요?”
카오스 엘프들의 상태는 애석하게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애초에 생기를 대가로 거름망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마기에 강제로 침식되어 몰이 말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건 치료 가능한 선이었기 때문.
하지만, 의미는 없었다.
“쩝, 구해준 보람도 없게 만드는 것들 같으니라고. 귀쟁이는 마음에 안 들어.”
엄마 빼고 진심이다.
응? 소라?
일정부분은 사실이니, 소라는 제외하지 않도록 하겠다.
여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말 그대로 살아날 의지 자체가 완전히 부러졌다는 의미었다.
눈은 뜨고 있으나,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공허만이 감도는 눈동자.
내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그저 허망하게.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고난 뒤 낡고 부스러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들 300명이 이곳에 있었을 뿐.
정작 살아있는 자들 따윈 없었다.
“한 둘 정도는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머리를 박박 긁으며 난 나지막히 탄식했다.
솔직히 아깝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거든
아,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은 생명의 은인이에요. 어떤 부탁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분골쇄신하여 당신을 돕겠습니다. 등등
이런 말이 튀어나오면 얼씨구나하고 받아먹을 생각이었다.
사실 마계를 이렇게 두고 가는 것도 걸리고, 이들을 잘만 이용하면 예지가 죽더라도 향후 마황의 신분을 부활시킬 제물,
혹은 엘라임을 대리인 삼아 부활한 나그나스의 복수 신화, 그리고 그를 향해 원인 모를 집단의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래서야 뭔......
차라리 인형을 쓰고 말지,
그렇게 탄기한느 와중, 데지르가 신전을 둘러본 뒤 다시 돌아왔는데.
난 그에게 지금의 나의 심정과 구출한 카오스 엘프들의 꼬라지를 설명했다.
“으짠다냐?”
“말을 똑바로 하세요. 그 이상한 사투리라는 거 쓰지마시고.”
“아무튼 어떻게 하냐고? 걍 여기서 만족하고 돌아갈까?”
“알브 헤임은요? 밀어버린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거야 밀고 가는 거지. 아무튼 밖의 상황은 좀 어때? 슬슬 얼타던 엘프들이 정신 차리기 시작할 거 같은데”
알브 헤임 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기껏한 건 불도저로 세계수까지 밀도 들어온 것뿐.
아직 알브 헤임을 지키는 병력의 다수는 전력을 온전하고 있을 것이고, 엘프들 또한 알브 헤임에 많이 남아있다.
단지, 우리가 공격한 곳이 말 그대로 세계수의 신전이었으니.
그 신전을 지키는 엘프들, 그리고 지금 소중한 팔다리와 생이별한 엘프 장로들을 믿고 있기에 움직임이 적은 거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우리는 세계수를 감싸던 환영을 부쉈고.
그에 따라 세계수의 정체가 알브 헤임 전체에 드러났다.
예상가는 반응은 두 가지.
하나.
“예, 나그나스랑 같은 루트입니다. 저희가 세계수를 타락시켰다면 신전으로 몰려오고 있어요.”
“쩝, 어떻게 래파토리가 하나도 바뀌는 게 없는지.”
둘
“썩 신앙이 튼튼한 건 아니더군요. 7할, 생각보다 높은 비율로 알브 헤임을 탈출하는 엘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수정구 너무 사기 아닌가요? 어째 점점 성능이 좋아지는데. 이제는 아예 천리안까지 되네요.”
“연주한테 쎄벼온 거니까. 나중에 돌려줄 때 변명 정도는 해줘야지. 여차하면 나도 수정구 하나 새로 받아서 똑같이 업그레이드 하면 되고.”
내가 빌려준 수정구를 감탄하듯 바라보는 데지르에게 난 무얼 이 정도로 놀라냐는 듯 답했다.
“아무튼 3할이 남아서 신전으로 돌진 중? 몇 명이지?”
“3할 전부는 아닙니다. 남은 이들의 절반 정도는 패닉 상태였거든요. 얼추 그렇게 하면 지금 신전으로 오는 엘프는 3만 남짓일 겁니다.”
도시 인구의 1할 5푼이 3만인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로구나.
뭐, 사실 엄청 많은 거지.
여기가 지구도 아니고, 하물며 알브 헤임, 엘프들 만에 도시인데.
엘프가 3만명이고 이들 전부를 노예로 처분하면 왕국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금액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가히 엄청난 미남 미녀의 대군이라고 하겠다.
거기에 알브 헤임 클라스로 수준도 꽤나 되는 그런.
하지만 난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봐야 어중이떠중이.
신전이랍시고 세계수를 지키는 놈들 수준도 성에 차지 않는데, 그딴 놈들 3만이든 30만이든 대수랴?
난 낫을 바닥에 내려찍으며 엘라임을 불렀다.
“정해던 대로 가자, 우리 엘라임의 대뷔전 시작이야. 영화 제목, 복수자, 나그나스의 부활! 장르 판타지 복수극! B급 감성으로 가보자고.”
“그런데 배우들 상태가 별로군요. 본래라면 저들 중 몇몇을 가담시켜서 나름 신빙성을 살리려고 했는데.”
“어쩌겠어? 이제와서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 못 먹어도 고! 라는 거지.”
“으음........”
데지르는 잠시 영혼이 사라진 듯한 엘프들을 바라보며 덕을 쓰다듬더니, 이내 잠시만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나야 뭐 상관은 없으니 괜찬다고 했는데.
그래도 슬슬 엘프들이 쳐들어와 무대의 막이 오르기 직전이라 서두르라는 말도 전했다.
그는 어차피 금망 끝날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난 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혹시 설득하려면 의미없어. 살려주겠다, 돈도 준다. 다시 엘프로 돌아갈 방법도 찾아주겠다며 별의 별 말 다 지껄여봤는데, 꿈쩍도 안 해.”
“다행이군요.”
“넹?”
“제일 중요한 걸 아직 제안하지 않으셔서.”
데지르는 허벅지가 짓뭉개진 엘프 장로 하나의 머리를 쥐어잡더니 이내 그들에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혹시 복수를 해준다는 말인 건가?
하긴 복수라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과실이 복수라는 말도 있으니,
그러나 데지르는 나의 그런 예상엘 한 계단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그는 300명의 엘프들 앞에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들에게 협력하실 생각 있으신가요?”
“..........”
“이런 대답이 없군요. 아쉽네요. 그럼 당신, 당신은 어떻지? 협력하면 아름다움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기회와 명예, 남은 엘프들의 왕이 될 수 있도록 해줄 텐데.”
데지르의 말에 생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엘프들
그러나 그건 그의 말이 카오스 엘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데지르가 그 말을 건낸 대상.
그는 죽어가기 일보 직전의 엘프 장로였던 것이다.
“사...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좋아, 이제 넌 엘프들의 왕이 되겠군. 충성만 바친다면 뭐든지 들어주지. 어때? 세계수를 다시 한 번 키워보는 건? 재료라면 얼마든지 공수해줄 수 있으니까.”
자신을 이렇게 비참한 꼴로 만든 이가 왕이 된다.
모든 걸 손에 쥔다.
다시금 자신들이 격은 비극 눈앞에서 꽃을 피우려 한다.
데지르가 제시한 건 달콤함이 아니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잔혹한 현실.
협력하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날 미래.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그러한 현실이었다.
“............아...”
“.......돼...ㄴ......”
굳었던 말문이 열린다.
단지, 눈에 깃든 건 생기가 아니었다.
독기(??)
아니 오히려 사기(死?)보다 진한 증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눈 앞의 상황에 카오스 엘프들이 하나 둘 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본 데지르는 이마저도 부족하다는 듯, 그저 고개를 한 번 옆으로 돌리고는 뭘 어쩌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안 된다? 뭐가? 여기저기 좀 뜯어고치면 너희보다 말도 잘하고, 개처럼 기어도 줄 대역이 여기 있는데, 감히 마황님의 제안조차 한 귀로 흘린 놈들 어떤 자격이 있어 안 된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와우
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하긴 이게 데지르겠지.
칠흑 같은 황궁에서 허울 뿐인 황태자의 자리에 앉아 살아남은 사람.
그가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으니.
난 나도 모르게 입을 가며 데지르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게임 끝났어.
“으아아아!!! 제발!! 제발!! 저희를 써주십시요!!”
“머리를 조아리라면 조아리겠습니다. 개처럼 바닥을 핥으라면 핥을 터이니 저희를 써주세요.”
“다시 돌아가도 좋으니, 그 쓰레기를─!!”
이미 움직이기도 힘든 몸으로 바닥에 피가 터질 때까지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한 카오스 엘프들
데지르는 잠시 그런 그들을 감상하면 내게 눈빛을 보냈다.
‘어떤가요?’
난 슬쩍 엄지를 세우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걸로 배우까지 액스트라 배역까지 모두 완성.
B급 영화 촬영의 시작이다.
그래도 조금은 시사회가 허전하여 아쉽긴 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친구와 친구 사이는 일심동체
부르면 와준다고.
나나 알브 헤임의 상공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애테르의 기운
더 정확히 모선의 워프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뒤틀림을 감지하니.
"시사회 준비 완료. 마황 VS 성녀도 여기서 끝낼까? 나름 세팅장은 괜찮은 거 같은데?"
물론 예지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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