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엘프를 위한 죽는 법
* * *
세상에는 이런 말이 존재한다.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라고.
지금 나의 상황이 딱 그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나는 누군가. 여긴 어디지? 고구마 찹쌀떡 먹고싶당.”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길 어느덧 한 시간.
난 조금 전의 나 자신의 선택이 벌써부터 후회되기 시작했다.
나와 데지르의 이삿짐 청소, 세계수의 신전 점령은 아무런 탈도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절대!! 절대 저들이 세계수에게 다가가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이 목숨 불사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간악한 마황 따위가 여기가 어디라고”
뭐, 대충 이런 대사를 치는 것들이 좀 많긴 했지만.
단아하고 아름다운 이 몸의 낫이 친히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시켜줄 뿐이었으니.
어려울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녹색과 백색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신전에 붉은 잉크를 떨어뜨리며 걷길 잠시.
데지르가 달려오는 또 한 명의 귀쟁이를 베어버리자.
유독 강해보이는 엘프들의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우, 본방 시작인가?”
“당신 말대로면 집주인이 행차한 거겠군요.”
휘황찬란하기 그지 없는 복장와 망토들
장수하는 엘프 중에서는 보기 드문 노인들.
거기에 온몸을 도배한 듯한 수많은 마도구들까지.
나와 데지르는 한 눈에 알아봤다.
아니, 오히려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없겠지.
그래, 그들이 이 알브헤임의 최고위에 오른 자들이었다.
데지르나 조용히 언급하길 아마 이 신전의 신관이자 동시에 알브 헤임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는 잎사귀들의 장로들일 거라고 했지.
난 그들을 바라보며 기꺼운 마음에 낮을 고쳐잡으며 가면으로 가려진 눈 아래,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헤에~~ 재밌는데?”
이곳을 오기 받았던 로망넘치는 빔 공격도 그렇고.
당장 나타난 저들의 수준도 그렇고.
과연 알브 헤임이라고 할 만했다.
숨기고 있는 전력이 엄청나.
“템빨 포함하면 알리샤가 와도 찜쪄먹힐 수준인데? 다크 엘프보고 아랫 것 보는 눈을 한 자심감이 나름 근자감은 아니었다는 거구나.”
“당연하죠. 큰 사람일수록 더 많은 걸 숨기는 법이니까요. 아, 물론 당신은 예외입니다.”
“헐, 야, 나도 숨기는 거 많거든?”
“쓰고 싶어서 근질근질 거리는데 쓸만한 상황이 없는 거지 않습니까? 당신은.”
깨비.....
역시 데지르는 날 너무 많이 파악했다.
뭔놈의 숨길 수가 있어야지.
여튼, 그렇다고 내가 할 말이 없을 소냐.
난 팔꿈치로 꾹꾹 그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야, 근데 엘프가 숨긴 게 이 정도면 제국은 뭐 얼마나 숨긴 거냐?”
솔직히 엘프가 간악해봐야 인간보다 간악하겠어?
장담컨대 엘프가 숨긴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숨기는 게 제국일 것이다.
그러나 데지르는 내 물음에 그저 한숨을 내쉴 뿐.
무덤덤한 어투로 답하니.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제국은 절대 멸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마황이든 뭐든 말입니다. 애초에 전 끝 떨어진 연이에요. 허울뿐인 황태자. 제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근데, 왜 내 편에 선 건데?”
“그것들 다 의미없다는 걸 알아서요.”
그래, 다 의미 없지.
비록 데지르가 제국이 숨기는 걸 모두 알지는 못해,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으니, 의미가 없다.
근거?
제국이 세계를 아직 정복하지 못했다는 게 근거다.
제국이 홀로 7인의 마왕을 참살하고 마계 자체를 집어 삼킬 수 있었을까?
제국이 홀로 알브 헤임에 쳐들어와 완벽한 승리를 점칠 수 있었을까?
있었다면 진작에 행했을 것이다.
숨길 이유가 없고, 이걸 할 수 있고 해낸다면 숨길 존재조차 없어지는 상황인데.
“릴리 씨, 정말 궁금해서 다시 묻는데, 당신들은 왜 대화를 시도한 거죠?”
용사와 사도들 간의 싸움.
릴리의 도움으로 데지르 또한 관전할 수 있었다.
결과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예상을 넘어섰었지.
그렇게까지 압살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 물론 데지르도 용사는 이길 자신이 있다.
그도 나름 제국의 검중 하나이니. 어디서 무력으로 꿀린다는 소리 들을 레벨은 아니니까.
하지만, 장담컨더 절대 그렇게 쉽게, 가지고 놀 듯이 이기지는 못한다.
오히려 나름 격전이라 불러야할 싸움을 치른 끝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겠지.
‘한예지 씨라고 했나? 성녀는 그렇다 칠 수 있었지.’
그래, 릴리의 분체와 예지의 싸움까지는 입이 떡 벌어지긴 해도 납득할 수 있는 선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성녀.
특히, 릴리의 이야기를 틀리지 않다면, 지구의 성녀는 단 한 명, 예지 뿐이라고 했으니, 유일한 성녀의 힘이 좀, 상상을 넘었다는 건 말 그대로 ‘납득’은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보여준 그들의 저력.
더불어, 시시껄렁하게 농담을 나누던 붉은 적발의 남성이 성녀조차 뛰어넘는 강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데지르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대화 따위를 시도하는 거냐고?’
얼마든지 무력을 써도 상관 없을 텐데.
군주?
물론 군주는 위험한 존재다.
발할라의 말을 들어보면 감히 그들조차도 승기를 점치지 못했다고 했으니.
그러나 데지르는 그리 단순하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다면 왜 군주들이 물러났단 말인가?
특히나 용의 제왕을 부르는 총칭이 ‘오만’일진데.
그 오만한 자가 자기 발로 쳐들어가 놓고서 도로 되돌아 온 이유가 뭐겠는가?
하지만 릴리는 이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V사인을 그리며 답했지.
‘평화! 러브 앤 피스! 지구인들은 평화를 사랑해.’
‘당신 말을 좀 빌리겠습니다. 개소리 하지마세요.’
그리고 지금
데지르는 다시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뭐.....우리도 군주 때시 좀 많이 죽은 것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도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손가락을 하나 둘씩 접으며 데지르의 말에 곰곰이 생각했지만, 난 해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진짜 우리는 평화를 사랑해.”
“........정정하죠. 여러분들은 정말......정말 평화를 사랑하는 군요.”
데지르는 지금에 와서 인정하기로 했다.
지구인들은 정말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 말 그대로.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으니.
이런 존재다.
이런 존재가 함께하는 발할라고
이런 존재가 살아가는 지구다.
제국이 뭘 숨겼든 간에, 말 그대로 의미가 없을 수 밖에.
데지르는 뭔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눈 앞의 늙은 엘프들을 가리치며 물었다.
“몇 분 걸리싶니까? 1분 이상이면 거들겠습니다.”
“10초......는 무리고 28초 안에 끝내고 오지.”
“애매하게 28초는 뭡니까?”
“내가 올해 28이야.”
“..........”
“나이가 들면 늙을 테니까. 그때마다 1초 추가. 어때?”
난 벙찐 표정의 데지르를 바라보켜 키득키득 웃고는 낫을 고쳐잡으며 앞으로 걸아갔다.
이에 농밀한 마력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니, 그들조차도 내가 다가가기 시작하자, 한 걸음 물러서던지, 식은 땀을 흘렸다.
“높은 신 분들이라지? 알리샤처럼. 그럼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드릴 게.”
무려 한 종족의 우두머리를 맞고 계신 분들 아닌가?
아무렴, 예우는 갖춰들려야지.
근데, 참고할 게 하나 있는데. 난 분명 최소한의 예우라고 했고.
그 최저치가 세괴수의 진상과 역겨운 모습을 바라보고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판결!
“응, 사형.”
참고로 그냥 안 죽일 거다.
오히려 죽기 직전까지 다듬어 논 다음 혈마술로 피통을 왕왕 늘려서 저치들이 키운 세계수 먹이로 던져줘야지.
오래오래 그 끈적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어떻게 오체분시를 해줄까.
너무 놀면 28초가 지나서 또 대차게 데지르에게 까이는 건 아닐까 고민하고 있는 찰나.
나도
그리고 뒤에서 팔짱 끼고 있던 데지르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태가 발생하야 말았으니.
─턱! 턱! 턱!
떨어지는 무릎들이 바닥에 닿으며 세상 천지, 살아서 구경할 수 있을까 싶은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하......항복합니다.”
“모든 것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저희 알브 헤임은 마황에게, 아니 마황님께 충성을 비칠 것을 약속드립니다!!”
“세계수의 마기를 정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사...살려만 주시다면 저희는 분명 도움이!”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하는 장로들
나와 데지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존심하나, 세계수로 둘로 먹고 사는 것들 무릎을 꿇었다,
거기에 세계수도 팔아 넘긴다고 하네?
“...........야, 데미에몽. 이거 뭐임?”
“저도 이건 좀.....”
“야! 니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지능캐잖아?!”
“저라도 다 아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박.
데지르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던 것이다.
* * *
러브 엔 피스.
평화를 사랑하는 지구인 출신 마황님인 나, 강릴리.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지켜주는 내가 설마 항복한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
우린 당연히 항복을 받아주었다.
항복하는데 받아주는 게 도리지.
아, 물론 무장해제는 명령했다.
설령 그 힘,
모래알 같이 보잘 것 없는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항복을 했다하면 공격 수단을 완전히 포기하는 게 상식이며, 또한 항복한 자의 예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뭐, 그들은 내 요구에 당연한 듯 승복했다.
힘의 차이가 명확한 걸 깨달았고, 더불어 항복을 받아준 것 자체에 만족했기에.
사실, 말 그대로 의미가 없는 건 맞잖아?
무기 들었다고 내고 못 죽이는 것도 아니니까.
기습?
뭐, 기습도 대비하긴 했지.
근데 딱히 안 해도 상관없다.
혈마술의 만렙에 도달한 이 몸께서는 마력이 바닥나지 않는 한 급소도 없거든.
용제, 아니, 용천민 우리 용민의 브레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지워져도 난 죽지 않는다.
물론 재생 후 거지 같은 상태긴 하겠지만.
여튼저튼 그렇게 엘프들의 항복을 받아낸 나와 데지르
뭐? 고구마라고?
항복을 하는데 그걸 받아주는 병신이 어딨냐고?
어허......
그대들
머리에 마구니가 끼었구나.
사람이 무장까지 해제하고 항복을 했잖아?
군인도 무장해제한 사람. 거기에 민간인은 안 건드리는 몰라?
사람이 말이야, 어!
어떻게! 어!
무기도 안 든 사람을 해쳐?!!
난 그런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기에 자비를 배푼 건지.
“그런 자비로운 마황의 첫 번째 명령이다. 할복.”
“예? 할복이라고 하시면 대체 무엇을....”
“아, 모르지, 미안미안, 별거 아니야. 그냥 배에 칼찌르고 그걸 옆으로 그은 다음 다시금 올려서 배를 가르는 거지. 칼 빌려줄까?”
내 말에 엘프 장로들의 새파랗게 얼굴이 질리고.
데지르는 그럼 그럴 줄 알았다면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난 한 치의 가식도 없는 진심 그 자체이니.
“뭐해? 할복은 명예로운 거야. 너희는 마황인 나를 위해 목숨을 비치는 거지. 너희들의 이름은 영원히 나의 가슴 속에 기억될 거고, 너희들의 이름은 길이길이 알브 헤임에 남아 기록될 것이야. 아, 맞다맞다 내가 깜빡하고 준비를 안 한 게 있었네.”
난 할복에 중요한 게 빠졌다는 걸 깨닫고 데지르에게 손짓을 보냈다.
이에, 데지르는 의문의 띄우며 내 옆으로 다가오니.
난 그에게 손날로 목을 긋는 신융을 하며 말했다.
“할복은 엄청 아픈 거거든?”
“자기 배를 자기가 가르는 건데 안 아플 순 있습니까?”
“아무튼, 명예롭게 죽는 사람에게 그런 고통은 너무 가혹한 처사잖아? 그래서 할복에는 카이가쿠라는 사람이 따라 붙어야해. 그걸 내가 해줬으면 좋겠어.”
“카이가쿠?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배를 가른 다음 아프지 않도록 목을 잘라주면 돼. 간단하지?”
데지르는 이 말에 결국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정말 명예롭군요!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자비까지 배불어주시고, 암요. 깔끔하게 제가 그 카이가쿠라는 역을 맞도록 하죠.”
스릉!
데지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뽑아 무릎을 꿇은 엘프 장로들에게 걸어갔다.
“아, 참고로 할복은 무서운 거기도 하잖아? 자기 배를 자기가 가르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들은 이렇게 보여도 엘프 아닙니까? 명예 명예 세계수 세계수하고 있으니. 명예로운 죽음에 두려움을 느낄까요?”
참고로 시퍼렇던 안색은 아에 거무튀튀하게 죽어가, 식은 땀조차 나오지 않는 중이었다.
“물론! 나도 믿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경우에는 그냥 카이가쿠가 목를 잘라버리면 된다고 말하는 거야.”
“허허, 그럴 필요 없다지 않습니까? 엘프들을 믿으싶시오. 마황님.”
말은 그렇게 하면서 데지르는 용의 손톱을 세워 칼날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뜩 무언가 생각났는지, 잠시 나를 돌아보며 그가 물으니.
“아, 그러고 보니, 이들의 이름은 알브 헤임에 영원히 기록된다고 하셨죠.”
“응”
“알브 헤임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자비도 배푸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까?”
난 깜찍하게 허리에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오늘 멸망!”
“으아아아!!!!!”
“이...이렇게 죽을 순 없다!! 이렇게 죽을 순 없─ 커어어!!!”
“제기랄 제기랄!! 이런 미친 년이 마황이라니!! 이딴─ 크어어억!!!”
결국 뒤틀린 광기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도주하는 귀쟁이 노인들.
나와 데지르는 얼씨구야 하고 바로 발목과 팔 다리를 절단하기 시작했다.
“예쓰!! 이제 명령불복종이다!! 정당하게 다시 사형!!”
“말 바꾸는 건 싫어하지만, 한 번만 더 바꾸겠습니다. 평화? 러브 엔 피스. 개소리.”
즐거운 칼춤의 서막이 올랐다.
동시에 알브 헤임 멸망의 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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