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새싹 신입 배우, 아니 복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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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세계수, 아니 세괴수를 바라본 나와 데지르의 다음 행동은 의외로 심플했다.
아무리 나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는 노릇이고.
데지르 또한 근본적으로 자기들 만의 정원를 꾸려 사는 엘프들에게 복수를 겸한 채찍질을 할 생각이었지, 몰살을 생각하고 여기 온 것이 아니니까.
우리 둘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우리 둘의 눈을 팔지도 못할 정도로 썩게 만든 엘프들에게 그에 따른 응징을 가하는 법
이미 정해져 있으니.
난 마황용 코스튬 아이템, 까마귀 가면.
데지르 또한 전에 내게 받았던, 용가리 가면을 쓰고 우리는 세계수의 아래의 신전으로 걸어갔다.
“아아, 이사 왔습니다. 집 비워주세요.”
“릴리 씨, 이제 마황이고 뭐고 신경 쓸 생각 없죠?”
“쩝, 약간? 이것도 처음에는 재밌었는데. 계속하니까. 질려서.”
“하아.......최소한 가면만 벗지 말아 주세요.”
분명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깊은 한숨의 기운.
데지르는 반쯤 포기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함께 나 또한 손에 길다란 낫을 거머쥐니.
부들부들 떨면서도 결국에는 마지못해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엘프들.
“으아아아!!!”
“마황!! 여기가 어디라고!!”
“자랑스러운 세계수의 잎사귀인 우리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여기 온 뒤로 느끼는 거지만, 생각보다 수준은 높다.
하나하나, 송사리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다크 엘프의 족장인 알리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곳이 알브 헤임, 엘프들의 수도임을 감안하여 매우 높은 수준이 당연시 된다고 해도.
다크 엘프들의 정예보다 한 계단 정도는 높은 레벨이다.
거기에 장비의 질은 두 계단 높은 수준.
그러나, 장비빨 하면 나도 지지 않고.
데지르 또한 장비고 뭐고 싹 다 무시하는 소환수 융합이라는 초유의 버프를 받은 상태였기에.
우리는 그저 묵묵히 각자의 무기를 휘두를 뿐이니.
“졸라 자랑스럽겠다. 근데, 그 자랑스러운 건 왜 그리 숨기고 있었다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상에 자랑스러워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저딴 걸 지키는 게 자랑스럽다니.”
한 치의 자비를 보이지 않는 칼춤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혐오와 역겨움을 저들에게 표현했다.
“내가 졸라 어이가 없는 게 뭔지 아냐? 지금 세계수에 박혀 있는 애들 말이야. 우리 엘라임보다 종족치로는 더 완성되어 있다는 거야.”
“과연, 실험 노하우가 쌓이고 쌓였다는 뜻이군요.”
“어, 세계수 꼬라지 봤을 때 짐작은 했는데, 한 두 번 해 먹은 솜씨가 아니야.”
사실 세계수의 원리 자체는 너무도 간단했다.
마계종의 마기를 빨아 먹는 특성을 이용하여 주변은 청정구역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니.
단지, 문제가 되었던 건 마기를 쳐 먹으면 먹을수록 강대해져만 가는 마계 식물의 힘과 공격성.
그리고 역설적으로 성장한 마계종 식물의 존재로 인해 다시금 퍼지는 마기가 문제였지.
일종의 고장난 공기청정기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공기를 빨아들이긴 빨아들이는데, 맛탱이가 가버려서 빨아드린 거 + 기계 내에 쌓인 먼지까지 다 토해내는 고철
아니, 설계부터 미스가 나 버린 공기청정기.
근데 엘프들은 이 설계 자체가 틀려먹은 공기청정기를 굳이 쓰려고 한 것이다.
“연료는 마계에서 충당, 뭐, 대충 마족들 시체 같은 걸 공수해와서 어떻게든 채웠겠지. 전에 너가 그랬잖아? 세계수의 영향 때문인지, 아크 리치가 알브 헤임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고. 비슷한 방법 아니겠어?”
“으음.....그러고 보니, 경매장에서 고위 마족의 시신은 언제나 정도 이상의 고가로 거래된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일환일지도 모르죠.”
“그 다음 필터는 저기 나무에 박힌 엘프들. 마계종이 성장해서 다시금 마기를 토해내는 걸 방지하기 위한 거름망이지.”
“엘프의 종족 특성을 이용한 거군요........설마 자기 종족 특성을 이렇게 이용한다는 발상을 할 준 몰랐지만.”
최고의 자연 적응력을 가진 엘프
다른 종족이라면 마기를 주입한 후, 오만가지 발광을 하며 금세 죽어버리겠지만.
엘프들은 마기를 받아드릴 가능성이 존재했다.
당장, 그 결과물이 저 필터들이고, 내 엘라임, 카오스 엘프일지니.
실제로 종족을 뒤집어버리는 마기의 양이 적을 리가 없고.
하물며 카오스 엘프는 사람들이 고대종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매우 강대한 종족이 되었다.
상당히 오래 써먹을 수 있는 필터......였다는 거겠지.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금 달려오는 엘프 하나를 낫을 베어버린 다음 데지르에게 말했다.
“마지막 뿌리.”
“뿌리야 문제 있습니까? 어차피 마기만 잘 공급해주면 될 일일 거 같은데.”
“설마, 엘라임이 쓰는 죄악의 가시, 너도 본 적 있잖아? 마계 종의 공격성이 그리 간단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거겠지.”
본래라면 쿠르악스, 세계수의 본질이 되는 마계종은 땅 위에 자라난 가시와 줄기로 사냥감을 사냥한다.
하지만, 줄기에 박힌 엘프들로 인해 위 쪽으로 마기가 공급되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가시는 사라지고 줄기는 공격성을 퇴화해 버렸지.
허나, 공격성 자체는 완전히 사라지지 못했으니.
세계수는 자신의 이빨을 뿌리로 옮긴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 신전이 세워진 게 아닌가 싶어. 엘프들 중에도 사제는 많으니까.”
“오히려 여기 규모를 보면 제국의 수도에 있는 대성당보다도 큽니다.”
“사람 치료할 때나, 대부분의 일에 사제들이 신성력을 쓰잖아? 그게 마기 천적이고, 누름돌....비슷한 느낌으로 신전을 이용한 게 아닌가 싶네.”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의 노련함이군요.”
“내공이 한 두 번 쌓인 수준이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세계수는 가릴 수 없었다.
끝을 모르고 점점 성장 중인 것도 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수의 ‘필터’가 필요했을 터이니.
알브 헤임을 감춘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겠지.
만의 하나라도 타국의 존재가 세계수의 정체를 공표하기라도 하면, 절대 마황 못지않은 어그로가 끌릴 터이니.
“그럼 지구의 엘프들을 세계수의 그늘 아래로 모여야 주장했던 것도 답이 나왔군요. 사실 이상하다고 여기고는 있었습니다.”
“나도 좀 그래, 엄마나 소라가 따로 조사할 때는 하이엘프고 뭐고 결국 알브 헤임에 못 들어갔다고 했거든? 절차가 복잡한 것도 있고 그만큼 알브 헤임 입성이 워낙 까다로워서.”
“그런데, 엘프라고 한들 이방인인 엘프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알브 헤임에 초대하는 태도를 보였죠.”
“얘들이라고 쉽지 않았다는 거겠지. 솔직히 누가 나무에 박혀 저런 꼴 당하고 싶겠냐고.”
필터의 조건은 의외로 까다롭다.
우선 엘프.
다크 엘프 같은 변종이 아닌 순수한 엘프여야 한다.
거기에 이렇게 나무에 쳐박혀서도 죽어서는 안 되니 나름 힘도 좀 있어야 하고.
종족 변위급 마기 주입이니, 조건을 만족해도 실패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로 나타날 테니, 수도 제법 충분해야 하지.
이게 얼마 주기로 교체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잔뜩 더러워진 엘프, 카오스 엘프는 모가지를 댕강. 다시 거름으로.”
“나그나스는 그 과정에서 살아남아 공격성을 손에 넣은 세계수의 뿌리를 가지고 탈출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신전에서, 하물며 알브 헤임의 신전에서 뒷사정 모르면 타락한 세계수의 가지를 들고, 몸에는 마기 뿜뿜 뿌리면서 날 뛰었으니. 살아남긴 힘들었겠지. 초기 실험작이라 몸이 좀 불안정 했는 것도 있을 테고.”
나그나스는 비극의 영웅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비극의 주인공이었을 뿐.
거기에 차마 같은 일족을 상대로 손속이 잔혹해지지 못한, 미련한 존재이고.
난 피식, 웃음을 보이고는 혈로가 된 우리의 길을 잠시 돌아본 뒤. 다시금 앞으로 걸어갔다.
“가자, 집 주인인 인성 개판이라. 집을 안 비워 줬으니. 우리가 비워야지.”
“어쩌실 겁니까?”
“신전은 부순다. 세계수는 캠프파이어용으로 소각. 지금 나무에 박혀있는 엘프들은........뭐, 뽑아보고 본인한테 어떻게 살지 물어봐야지. 솔직히 엘프도 마족도 되지 못한 상태라 어딜 가든 환영받지도 못할 테니까.”
카오스 엘프의 힘을 가졌을리도 없다.
아직은 사용 중인 필터.
마족으로서 약할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강할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몸에는 마기가 잔뜩 쌓여 엘프라고 봐주기도 힘든 상태이니, 어쩌겠는가?
제 살 길은 자기가 찾아야지.
난, 구해줄 순 있어도 보따리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알브 헤임은 어떻게?”
“불도저 가져왔잖아? 밀어버릴 거야. 대신 천천히 느긋하게. 캠프파이어 하면서 안주용 구경거리로 써먹어야지.”
“도망칠 자들은 알아서 도망치라는 거군요.”
“쓸만하지 않겠어? 가뜩이나 무림이 움직이면 전력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전 제산 탕진. 수도 멸망. 오만가지 개 짓거리로 여기저기서 미움 받는 것들이 할 건 뻔하니까.”
잘 나가면 용병, 최악의 경우 타국의 망명 시도 중 노예로 붙잡힐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도망친 엘프들 끼리 합세하여 세력을 일굴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대가리는 여기 다 모여있을 텐데, 싹 다 잘라내면 좀 힘들겠지.”
“뭐랄까......릴리 씨도 상당한 적의가 느껴지네요. 세계수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는데, 잠짓 실수했으면 엄마나 소라가 나무에 박혀있었을 거 아니야? 꿍꿍이가 있는 건 뭐라하지 않지만, 이렇게 선을 넘으면 이야기가 좀 틀리지.”
싸가지가 좀 많이 없긴 했어도, 바로 지구의 엘프들을 받아들인다고 들었을 때는 ‘아, 그래도 제 식구는 챙기는 개새끼들이구나’ 했다.
어차피 서로 이해도 부족하고 문화도 다르니.
기분 더럽긴 해도, 뭐 어쩌겠는가?
아쉬운 놈들이 받아들여야지 싶었지.
근데, 이 꼬라지를 보니 아니었다.
제 식구를 챙기는 게 아닌, 탐스러운, 얼마든지 쓰고 버려도 좋을 ‘필터’를 탐낸 것이였으니.
난 비릿한 미소를 피워내며 손가락을 튕겨, 내 그림자 속에 잠든 비극의 엘프를 불러냈다.
“엘라임.”
“어, 소환수는 안 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당신 소환수를 보이면 여러모로 나중에 테라에 돌아와서 피곤하실 텐데.”
“물론 그렇지만, 연출을 좀 가미하면 다르지 않겠어?”
난 엘라임을 향해 손가락을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쫄래쫄래 달려와 고개를 숙이는 엘라임.
내 소환수가 된 영향인지, 아니면 그냥 별개의 존재라는 건지, 엘라임의 심령으로 전해지는 것에 딱히 분노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나에 대한 기쁨과 호기심 밖에.
“뭔데, 카오스 엘프 눈이 초롱초롱하냐고......”
“덱 소환수잖아.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압니까?”
“뭐.....여튼, 야, 너도 황족이니 코디는 좀 할 줄 알지?”
“코디?”
“옷 갈아 입히기 말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신시켜서. 연출을 보여주자고.”
부활한 나그나스
복수를 품에 앉고 저승에서 돌아오다!
싸구려 B급 감성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이미 당신이 마황인데 의미 있습니까?”
“난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좋아해.”
“당신은 왜 징악을 당하지 않죠?”
“그거야 난 내로남불도 사랑하기 때문이지.”
“이런, 미친......”
어차피 신전 터트리고 타락한, 아니 뿌리부터 썩은 세계수를 불태우는 일이다.
기왕이면 방금 내가 말한 대로의 연출이 도망치는 엘프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쉬울 터.
“엘라임을 영화 주인공으로 만드는 거야!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영화지만!”
“도망치는 엘프들에게 각인시키기 좋다는 건 동의합니다. 확실히.......부활한 나르시스의 복수라면. 다크 엘프들도 기뻐할 테고.”
더불어 갑자기 마황이 나타나 알브 헤임을 습격했다는 소문보다 훨씬 신빙성도 있을 것이다.
우리랑 싸운 엘프들 멱을 확실하게 떨어뜨렸으니.
거기에 데지르나 내가 얼굴이 팔린 존재도 아니고 내가 마황이다. 데지르가 황태자라고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어떤 위험한 악의 집단이 나르시스를 부활시켰고.
그녀가 복수를 행했다는 이야기가 더 귀에 쏙쏙 들어오겠지.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라고나 할까?
단지.
“그렇게 계획할 거면, 저 불도저 같은 건 데려오면 안 되죠. 누가 주인공인지 모르겠잖아요.”
“그치만 불도저는 로망인 걸.........”
“곧 죽어도 본인이 실수했다고는 안 말하지. 에휴, 여튼 그렇게 만드는 건 괜찮은데, 엘라임부터 어떻게든 해 봐요.”
“응? 엘라임이 왜─ 아......”
난 엘라임을 바라고는 바로 데지르가 한 말 뜻을 이해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네임드 소환수는 엄연히 자아가 있다.
말을 알아 듣는다는 이야기지
더불어 심령이 연결된 탓인지, 나의 이상한 부분을 닮는 구석이 있지.
용용이가 어느새 댕댕이가 되어간다든가.
시몬의 손가락을 튕기는 버릇 같은 거.
지금 엘라임이 어떻냐고?
─반짝반짝! 흥미진진!!
우리 이야기를 듣고 눈빛을 더더욱 초롱초롱 빛내는 중이다.
하물며 지팡이는 어디다 버려뒀는지, 신입 배우 지망생처럼 양손을 불끈 쥐는 중.
“...........새싹 마왕...아니 새싹 복수자라는 컨셉으로 하면─”
“각하.”
데지르 감독은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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