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나쁜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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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서리 작전 이전 나와 데지르는 잠시 과거를 복습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지만, 세계수의 원형은 마계의 괴식종, 쿠르악스의 변종.”
“그리고 이걸 초기에 발견하고 수를 쓰고자 한 게 다크 엘프들의 시작에 선 존재이자. 동시에 최초의 카오스 엘프이며 내 소환수, 엘라임의 원형이 될지도 모르는 이, 나그나스했지”
“하지만 나그나스는 역으로 본인의 일족들인 다크 엘프들에게 패배하여 쓰러졌죠.”
“다크 엘프는 그 쓰임이 다 함과 동시에 토사구팽 당했고. 그 증오가 쌓여 역으로 자신들이 쓰러트렸던 그리고 어찌보면 본인들이 버려지게 된 원인인 나그나스를 신앙으로 삼았지.”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첫째,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나무, 그것도 마계의 나무라 추측되는 세계수를 엘프들은 대체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쿠르악스는 본래 매우 공격성이 강한 식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쿠르악스 자체가 본디 마계 영역 중에서도 마기의 농도가 짙은 곳에 자생하는 부류이고, 동시에 본인 자체가 사냥을 통해 그 양분을 충당하고자 하기 때문.
변종으로 추측되는 세계수는 아마 사방에 퍼져있는 탁기와 함께 엘프들의 보호로 인해 공격력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 효율이 좋은 게 아닐까? 하는 게 일반적인 견해지.
허나.
“개소리.”
“말도 안 되는 헛소리죠.”
나도 팅자팅자 마황성에서 노는 기간에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다.
나의 최종 목표가 세계수에 있었으니, 그에 대한 정보조사는 필수 중에 필수.
처음에야 정보를 얻을 곳이 마땅치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책의 마녀인 그리시아 덕분에 차고 넘치는 지식들을 찾을 기회가 생겼으니.
조사의 끝에서 난 단언할 수 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쌉소리리고.
“대충 들어봐도 도시 사이즈로 노시는 나무님이야. 근데 그걸 대기 중에 탁기만으로 유지해? 지랄도 정도껏하라고 해.”
“엘프들이 무슨 수단을 하고 있는 거겠죠. 애초에 한 대국의 중심이라면서 엘프 중에서도 순혈, 그리고 신원이 검증된 이만이 방문할 수 있다는 게 웃긴 일입니다.”
지레짐작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 수단이라는 녀석이 썩 좋은 놈이 아닐 거 같다는 건 모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나그나스.
“최초의 카오스 엘프라고 했지? 정확히는 마기에 적응한 엘프라고 했나?”
“예,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은 압도적인 환경 적응력에 있습니다. 다크 엘프가 사막에서 육체를 진화시킨 것과 청정구역으로 예상되는 세계수의 그늘 아래에서 유능한 정령사가 다수 탄생하는 배경이죠”
나그나스는 세계수의 가지를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알브 헤임에서 토벌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 타락한 세계수의 가지가 바로 엘라임의 권능이 죄악의 가시.
알브 헤임의 역사상 절대 언급해선 안 될 치부 중에 치부라고.
덕분에 나란 존재와 알브 헤임의 엘프들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내 탈주의 초기 원인이 되었지.
그러나 이 역시도 알고 보면 넌센스 그 자체다.
타락?
세계수는 원래 마계 식물이다.
타락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지.
그 탄생부터 말이야.
그리고 나그나스 토벌도 그래.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자뻑 같지만, 엘라임은 내 소환수 중에서 전투력이 나름 상위에 속하는 소환수다.
시몬 같은 도라애몽형 만능 타입.
카녹스 같이 대인전 무적 치트키를 제외하면 집단전도 대인전도 딱히 흠이 없는 나의 반신이란 말이지.
그런데 그 원형이 될지도 모르는 나그나스가 다크 엘프들에게 패배한다?
백보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치자.
현 다크 엘프의 수장인 알리샤처럼 걸출한 인물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 솔직히 있었으면 그딴 식으로 쫓겨 났을 리가 없기에, 이런 가정도 의미 없지만, 뭐, 그럴 수 있다 치자고.
근데 쓰러트린 방법이 뭐?
마기를 주입해서 이겼다?
이브이 같은 엘프의 마기 진화 버전인 카오스 엘프한테 마기를 주입해서?
난 기도 안 찬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키며 말했다.
“하! 내가 예지랑 결혼한다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뭐지? 왜 복선의 기운이 여기서.....”
“무튼,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야.”
그렇기에 우리는 서리해서 직접 확인할 계획이다.
어차피 세계수야 엘프들에게만 세계수일 뿐, 주변 국들에게는 그저 만성 독극물 그 자체.
엘프들의 횡포의 뒷배가 되어주는 놈, 아니 년, 아니 나무니까 그루라고 해야하나?
그루니까, 치워버릴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지금은 치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으니.
“세계수가 없어야. 엘프들이 무림과의 전쟁에 참전할 겁니다.”
“꼭 게임할 때마다 있지. 기지에서 우주방어하면서 버스 타는 것들. 그런 것들은 궁댕이를 걷어 차야 말을 들어..”
본래라면 무림과의 전쟁이 시작되어도 내가, 그리고 발할라가 조금씩 뒤에서 데지르를 지원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나는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고.
데지르도 함께 떠나는 마당에, 만에 하나긴 하지만, 무림이 제국을 집어삼키고 테라마저 잠식한다면 그동안의 고생이 허사가 된다.
듣자하니, 무림은 제국 이상으로 꽉 막힌 족속들이라, 백성들 하나하나가 뚝심을 가지고 이방인을 배척하기에 나나 발할라가 제국에 썼던 꼼수 같은 방법들도 전부 무용지물이라고.
나름 황태자 치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세상물정에 밝고.
그리시아가 동의하며.
다크 엘프들에게 주워들은 정보까지 있으니 틀리진 않을 것이다.
알리샤도 무림에 대한 이주는 듣기도 싫다는 양 기각했을 정도이니.
“세계수가 사라지면 장막과 벽이 없어질 테니, 그 귀쟁이들도 싸우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귀쟁이라고 싸잡아 욕하시면 발할라 분들도 같이 욕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냥 순혈 머저리라고 부르세요. 테라에 순혈주의를 그토록 고집하는 놈들은 그것들 밖에 없으니까.”
“.......너도 쌓인 게 좀 있긴 한 가보구나....”
“본인이 엘프가 아니다. 그런데 정치를 한다. 이 범주 내에서 쌓인 게 없는 자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힘도 쌔고 돈도 많고 하물며 가진 것도 많은 상대가 꼰대에 욕심쟁이기까지 한다고 가정해보자.
갑질 오브 갑질은 그야말로 갑질의 정석이라는 책을 내도 좋을 수준에.
이미 부족한 것이 없어서 정치인들에게는 가장 민감한 사인인 각종 이권에만 그 이빨을 들이밀며.
마력초와 같은 것들을 빌미로 국가 주요 인사들을 매수해 뒤에서 정치판을 있는 대로 흔들고 있으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족속들이라고 한다.
얼마나 치가 떨리는지 데지르는 보기 드물게 혀까지 차며 디스를 갈기고 있는 중이니.
난 그것도 여러모로 대단하구나 싶었다.
“뭐, 이제 우리랑은 상관없지만!”
“소소하게 복수라 치시죠. 고생도 했으니 돌아가는 길, 세계수 하나 정도는 괸찮지 않습니까?”
“오~~~ 그거 내가 좋아하는 영화 명대사랑 비슷했음!”
“영화라면....그 연극을 마도구에 저장한 것이라고 했었죠?”
“내가 그걸 그렇게 설명했나? 뭐, 너도 지구로 올 거라며? 직접 봐. 그게 재밌을 테니까. 참고로 원본은 죽기 직전에 ‘담배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입니다.”
“뭡니까. 그럼 재수 없는 말을 한 거 아닙니까?”
죽기 직전의 유언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데지르
하지만 난 오히려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 아니겠냐며 활짝 웃어 보이고는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거의 다 온 거 같네?”
“동화라는 거 다시 봐도 사기적이긴 하군요. 저도 느껴집니다. 고작해야 결계하나에 이 정도 마력양이라니.”
당장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그저 끝을 모르고 펼쳐진 산맥 뿐이다.
하지만, 용용이와 동화된 데지르의 용안과
내 마력시는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대도시 하나를 아우르는 초 거대 규모의 공간 마술의 흔적들.
“수순마저도 높은 편이네. 바네사가 만들어 준 건가?”
“시공의 마녀라 불리시는 분이니 가능은 하겠지만, 그렇다면 선대일 겁니다. 알브 헤임의 역사가 짧진 않으니까요.”
바네사가 비록 대마녀, 마녀 중에서도 대 선배 격이라고 해도 데지르의 말마따라 엘프의 역사는 짧지 않다.
그리시아와 바네사 모두에게 세계수에 대해 아는가?
혹은 알브 헤임이 가본 적이 있는가에 대해 NO라는 답변을 받은 이상, 저걸 만든 이는 좀 더 과거의 인물이거나,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알브 헤임 자체의 기술력이라고 봐야겠지.
그렇게 결계에 접근하기 전.
난 우선 나와 데지르에게 탐지를 차단하는 마술과 불가시화의 마술을 두른 뒤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자, 선택의 시간이 왔습니다! 기호 1번 불도저 루트! 기호 2번 루팡 루트가 있어요. 골라요 골라. 양쪽 다 39,800원이라는 4만원이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드림!”
“그거나 그거나.....”
여기까지 와서도 장난끼 가득한 내 말투에 푹푹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데지르.
뭐, 실상 결과는 뻔할 뻔자지.
데지르가 1번을 고를리 없지 않은가?
아무리 세계수 서리를 데지르가 계획했다고 해도, 데지르는 데지르인─
“뭐 합니까? 빨리 안 밀어버리시고?”
“......에?”
“전에 EMP ver 강릴리표 전화기 파괴기 라고 했던가? 그거 설명하실 때 이야기하셨던 거 있지 않습니까. 시몬과 엘라임이랑 합작하여 사용하는 초특급 전력 마술이란 거. 여차해서 제국 밀어버릴 때 쓰실 거라고 했던 그거요. 당신이 전력을 다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전부터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보여주실 날이 왔군요.”
정말로 기대된다는 듯 턱을 쓰다듬는 데지르의 얼굴에는 티끌 하나 농담이나 거짓이 섞여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난 경악한 얼굴을 보이니
이게 정녕 데지르란 말인가?!
유일한 정상인 데지르!
난 나도 모르게 볼살을 꼬집고는 아려오는 아픔에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가설.
난 빠르게 데지르와의 거리를 벌리며 소리쳤다.
“도플갱어!”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고....”
“젠장 언제 바뀐 거지?! 우리 데지르 돌려내!! 이 망할 도플갱어 녀석아!!”
감히 나의 소중한 쫄따, 아니 동료 데지르를 납치한 걸로도 모자라 바꿔치기까지 하다니!
“납치는 당신이 제일 먼저 했잖아.......”
“크으.....지금 쯤 각종 역강간을 당하며 행복에 겨워 타락하는 중”
“일절만 하라고.”
─퍽!
일절만 하라는 말은 또 언제 배운 건지,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는 데지르.
그러나 주먹과 머리가 부딪치는 소리는 콩! 도 콕! 도 아닌 퍽! 이었다.
“아악! 야! 너 가뜩이나 나쁜 머리 더 나빠지면 책임 질 거냐?!”
“책임지라고 해도 꺼지라고 할 거면서.”
“책임이 그 책임이 아니잖아!”
“하여튼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하아......아무튼 제가 왜 이런 말을 하시는 지 궁금하신 거 같은데. 당신은 한가지 착각하고 있어요.”
살짝 날개를 움직여 내가 있는 위치에 바로선 데지르.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절보고 무슨 정상인이니, 뭐니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전에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전 그저 최선의 수를 당신께 제안했을 뿐이라고.”
동화된 스팩이 감안된 건지, 아니면 그냥 혼내기 보정인지, 엄청나게 아파오는 머리를 박박 문지르고 있으니, 데지르는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왕을 죽일 때 최대한 살살하라고 한 이유?
그건 그저 후일 마계 전역에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 일 뿐이다.
너무나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면 지래 절망해버리고 마니까. 그걸 방지한 것이지.
어그로를 끈 후에도 몰살 루트로 갈 뻔한 걸 항상 조절한 거?
제국을 침공하는데 있어, 마황 하나의 이름보다는 마계의 침공이라는 게 초기에는 더 효과적인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경천동지하는 마황님이신 릴리라도 초기에는 제국 어느 누구도 마황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제국을 압박하는 용도로서는 마황보다는 마계라고 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
또한 괜히 마황 또한 마계에 있어서는 적이다 라는 이미지가 생기면 쓸대없는 고생을 할 게 뻔했기에 그걸 방지할 목적도 있었다.
대마녀를 죽이지 말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
죽이면 마녀들이 매우 귀찮아지니까.
나중에 릴리도 마황 신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할 테니, 그때를 고려한 결정이었던 셈이지.
그냥 마녀도 아니고 대마녀라면 나름 말이 통하기도 하고.
그 이후에도
어디까지나 제국의 압박이 주 목적이었고, 또한 본인이 황위에 오르고 난 뒤를 생각해야만 했기에 릴리라는 초 거대 폭탄이 터지는 걸 막은 것일 뿐.
“릴리 씨, 요즘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지 않습니까?”
“으으.....뭔데?”
“제가 누굽니까?”
“어....아....그러네.”
난 그의 말에 깨닫고 말았다.
순둥순둥하고.
대뜸 첫 만남부터 청혼 받아 개그캐 같은 이미지가 생겨서 그렇지.
지금 눈 앞의 남자는 지지 기반도 없는 밑바닥에서 황태자라는 어그로 진한 독극물을 품에 안고 수 년을 살아남은 인물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놈이 내가 상상하는 정상인일 리가 없지.
“에휴~~ 또라이 옆에는 결국 또라이만 모이는 건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어깨를 으쓱 거리니.
데지르는 그래봐야 자기가 나만 하겠냐며 다시금 디스를 날렸다.
“거기에 어차피 그동안 저희가 사렸던 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응?”
“당신 죽여줄 사람 말입니다. 그동안은 용사를 후보로 세웠으니, 용사보다 강한 힘을 연출해선 안 된다는 제약. 그게 제가 지금까지 항상 힘조절하라고 잔소리했던 이유 아닙니까. 근데 지금 당신을 죽여줄 사람이 용사입니까?”
아니지.
예지, 그러니까 이름 없는 성녀지.
세계수 서리를 마친 뒤 우리의 플랜은 마황성에 귀환한 뒤.
여러 의미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예지를 비롯한 사도들과 싸운 뒤 패배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발할라로 틀어진 우리의 목표를 발할라를 통해 완수하는 셈.
비록 패배하지도, 부활하여 마신이 되어 돌아오지도 않았지만, 세계수를 손에 넣고 발할라의 손에 쓰러지는 것이니.
그 모든 사실을 깨달은 난 그제서야 데지르가 왜 이렇게 막나가는지 알아체며 손벽을 쳤다.
“아하!”
“릴리씨, 그동안 참았던 건 릴리씨 만이 아니에요. 저도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하기에 힘들 때마다 상상합니다.”
아.....그냥 힘으로 싹 다 밀어버리면 안 되나?
이 시끼, 나쁜 놈인 거 아는데, 걍 증거 같은 거 찾지 말고 바로 잡으면 안 됨?
내가 졸라 졸라 쌔면 그냥 다 내 마음대로 인데......같은.
그의 말대로 힘들 때마다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대리만족을 일으키는 상상들.
데지르도 한다.
그리고 릴리를 만나고서 더 극심해졌었다.
릴리는 그야말로 폭력의 체현자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강해도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데지르도 참고 또 참은 것일 뿐.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저희......이제 갈 거지 않습니까? 여기서 먼 짓을 해도, 결국 돌아가면.”
“이름 없는 성녀께서 우릴 쓰러트려 주시겠지.”
용사와 다르게 이름없는 성녀.
예지의 힘은 제국에서 아직 미지수의 영역에 존재한다.
예지 또한 그걸 목적으로 최대한 거품이 잔뜩 낄 수 있도록 압도적인 상황만을 연출했지.
“어찌보면 저희는 생의 마지막에 선 사람들”
“그.....그만! 더 들으면 타락할 거 같─”
“당신도 알브 헤임 덕분에 몇 날 며칠을 밤세서 공부하기도 하고 그게 허사가 되어 마황 노릇을 하기도 했죠. 기억 나시나요? 마계를 돌아다닐 때 한동안 거처가 없어서 흙바닥에 누워 노숙하며 고생했던 나날들을. 그게 전부 누구 때문일까요?”
기실 ‘따지고 보면 알브 헤임의 역사 탓이고.
우연치 않게도 엘라임이 죄악의 가시를 가지고 있던 게 원인이니.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데지르의 목소리에 감화되어가는 나는 나도 모르게 이미 중얼거리고 있었다.
“알브 헤임....망할 귀쟁이들”
“거기에 알브 헤임은 악의 축입니다!”
솔까, 악의 축은 아니다.
세계수가 만악의 근원이긴 해도, 엘프에 한에서라면 세계수는 진짜 세계수이니.
그저 가진 것을 잘 이용하여 나라를 지키고 부국강병을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뿐.
뭐, 실물을 까보면 좀 더 드러나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나라 대 나라의 일에서 악의 축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난 데지르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감화되고 말았으니.
“그렇지! 사악한 마계의 물건을 이용하는 나쁜 넘들!! 거기에 우리의 친구인 다크 엘프를 괴롭혔어!!”
그걸 따지기에는 너무 미래로 온 게 아닌가 싶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마황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지만.
여튼 난 그렇게 소리치며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몬과 엘라임이 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니, 그들마저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고 나서야.
내 마력에 맞춰 각자의 스태프를 집어 들었다.
“엘프는 나쁜 문명!! 정화한다!!”
참고로
후일 데지르가 말하길, 그때는 본인도 좀 폭주한 건 인정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쌓인 게 그만큼 많기도 했다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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