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수박보다 큰 걸 서리하고자 한다.
* * *
모 카드 게임에 미쳐버린 사장님께서 하신 명대사.
전속전진!
그야말로 이 단어가 절로 떠올릴 정도로 예지의 돌진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물량전을 장기로 내세운 마황을 연기한 릴리라는 점을 감안하여, 천천히 진군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겠지만.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상태에서 겨우겨우 뒤처리까지 끝낸 예지에게 더는 인내심이 남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호쾌, 상쾌, 통쾌하게 예지는 언데드들을 분쇄하며 마황성까지 진격했다.
하아......그마나 대뜸 테라 한 가운데서 모선의 워프를 꺼내지 않은 게 다행이리라.
하지만, 그런 예지를 반긴 건 작은 팻말 표지판이었으니.
[죄송! 현재 마황 소녀가 출타 중입니다! 다음에 방문해주세요. ()!]
“.........”
“.........”
“.........”
마황성 문 앞에 도착한 사도 무리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딴 걸 써놨다는 것을 보면 어찌저찌 제국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 사실을 역으로 감안하면, 그 무지막지한 고생을 가족들과 친구, 동료들이 하고 있다는 걸 알고도 마황성에 죽치고 있었다는 말이니.
순간 이성을 지탱하던 한 가닥의 선이 끊어진 모두들
──콰직!
눈빛이 죽어버린 예지는 평소 쓰는 성창은 어디다 던져두고.
버전 핏빛 성녀! 메이스를 손에 들고 팻말을 호괘하게 박살.
부서진 나무 잔해를 짓밟으며 거대한 마황성의 문을 향해 2단 돌려차기를 시전했다.
─콰아아앙!!!
“나와 이 X년아!!”
“우리가 뒤처리한다고 무슨 개지랄을 떨어는지 아냐?!!”
“사고를 쳐도 적당히 쳐야지!”
“출타? 추~~울~~타?!! 5초 안에 안 튀어나오면 뒤진다!!”
호쾌, 상쾌, 통쾌하게 비산하는 마황성의 성문.
분명 각종 방어 마술들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분노에 찬 발할라의 일행들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애초에 용사들 수준에 맞춰 이지 모드로 만들어 둔 것도 있고.
여튼 그렇게 모두는 씩씩거리며 마황성 본성을 향해 나아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출타가 구라가 아닌 것인지, 반겨주는 이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넓어서 어디부터 뒤져야 할 지도 모르겠는데, 안내인까지 없다니.
슬금슬금 이마에 십자주름이 생겨나는 예지와 일행들.
그 순간, 연주가 손가락을 어딘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 마력 반응 있는데?”
“릴리?!!”
“아, 걔는 아니야. 그거 치고는 너무 약하고, 근데 또 객관적으로 보면 악한 건 아닌데....”
“몰라 일단 잡아!”
“주리를 틀며 뭐라도 나오겠지!!”
어차피 부술 마황성이라는 건지, 그들은 연주가 가리친 방향에 존재하는 모든 벽과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마치 무한궤도처럼.
하지만, 유일하게 현 상황에 의문을 품은 성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오히려 마황성 본성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추측은 사실이었으니.
도착한 곳은 널지막한 주방.
그곳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를 가운데 두고 먹방을 시전 중인 두 미녀가 있었다.
“응?”
“에?”
갑작스럽게 벽이 터져나가며 나타난 사도 무리에 깜짝 놀라는 건 당연히 바네사와 그리시아.
둘은 입에 넣고 있던 음식을 우물우물 거린 뒤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라? 너무 빨리 온 거 아니야?”
“펫말 세워 놨는데 못 봤나?”
분명 릴 리가 떠나기 전 정성(?)스럽게 손수 톱질, 못질, 망치질 하며 만든 싸구려 안내판이 있었을 터인데.
너희가 왜 여기 있냐는 듯한 물음
그러나 그건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마황 어딨어!! 빨리 나와!!”
흡사 말투는 빚 수금하러 온 사채 업자 그 자체.
시정잡배가 빙의라도 한 건지, 두 대마녀에게 다가가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는 예지의 모습에 그리시아는 깜짝 놀라며.
후다닥 마술을 사용하 바닥에 떨어지려는 점심 밥을 붙잡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이해 못할 것도 아닌가.....”
바네사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씩씩거리는 예지는 바라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이래서는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거라고 여긴 소라와 미령이 다가와 폭주 중인 예지를 만류하며 성환이 다가가 예지를 대신해 두 사람에 말했다.
“저희는─”
“아, 자기 소개는 필요 없어, 이미 들어서 알고 있거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보기도 했고 말이야, 소개는 오히려 우리가 해야겠지. 안녕, 난 책의 대마녀 그리시아라고 한단다..”
“난 시공의 대마녀 바네사라고 한다. 뭐, 마황에게 사로잡힌 마녀 역할을 맞고 있지.”
“나도.”
역할.......
뭔가 릴리 스럽다면 릴리스럽고.
분위기 깬다고 하면 분위기 깬다고도 말할 수 있는 답변.
그 말에 다시금 머릿속의 정보를 되집던 성환은 그러고보니 마황에게 도전했던 대마녀가 둘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한가로운 자기 소개 따위가 아니지.
성환은 고개를 젖고는 가장 지금 필요한 물음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릴리....마황은 어디 있습니까?”
말이 가벼워 출타지.
걸어다니는 핵폭탄이나 다름 없는 릴리다.
거기에 이미 뒤처리를 자신들이 다 하고 있다는 걸 안 릴리이기도 하고.
또 어디 가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셈.
얼른 수거하지 않으면 마황 이상의 마신이 되어 나타날까 두렵기에 성환은 바로 릴리의 위치를 물은 것.
이에 바네사는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그리시아는 분노에 찬 일행들을 모습, 그리고 그동안 들었던 릴리와 이들의 긴밀한 관계를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악동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더니, 바로 바네사의 입을 막고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으음......안 되지, 안 돼. 나도 왠만하며 말해주고 싶은데 이건 안 될 일이야.”
“네? 저기.....저희가 상당히 급합니다. 같이 지내 보셨으면 걔가 얼마나 또라이 기질이 다분한지 아실 텐데.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몰─”
“안 돼~~ 안 돼~~ 인생에 단 한 번 뿐인 신혼여행인데.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니짆아?”
신혼 여행.
그 네글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분노가 임계치에 다달은 모두의 얼굴에 챙! 하고 금이 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던 예지는 얼음장처럼 멈추고.
소라는 순간 손에든 지팡이를 떨어트리니.
얼굴이 흑백 컬로 변한 아버지 찬석과 어머니 미령은 무릎에 힘이 풀린 건지, 바닥에 털썩!
그와 함께 유리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게지며 어쩔 줄 몰라하고.
연주는 휘유~~ 입바람을 부니.
그 순간 마황성 주방 가득 한 마음 한 뜻이 된 몇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안 돼─────!!!!”””
* * *
“에....엣츄!! 쓰읍!! 누가 내 욕하나?”
“기침을 하시고는 대뜸 욕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거대한 용의 날개를 펼친 체 구름 위, 창공을 가로지르는 데지르는 그 옆의 이하 동문.
해골 지팡이를 탄 체 함께 비행을 시전 중인 릴리를 향해 손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이에 릴리는 가까운 손수건을 물리며 인벤토리에서 휴지를 꺼내 적당히 닦아 하늘에 버리고는 말하니.
“아니, 그게 우리 나라 속담 중에,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면 누가 내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거든.”
“호오~~ 신박하군요. 재미있는 속담입니다. 근데,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를 하는 거지, 왜 욕입니까?”
“내 이야기하는 사람이 내 욕 말고 할 리가 없잖아?”
“알긴 아시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릴리를 보며 데지르를 깊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아름다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등진 체, 벤치에 앉은 듯한 자세로 하늘을 나는 그녀의 모습은 절세의 화가가 아쉬울 정도인데.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가 저러니......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
“지팡이 타시는 모습을 보면 참 동화 속의 마녀가 따로 없는데.”
“아, 이거? 졸라 불편해.”
“그럼 그냥 다리 사이에 끼워서 타시면 되지 않습니까?”
“가랑이 아파. 왜 마남이 없는지 알겠더라.”
처음에는 요염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혹은 멋진 구도를 보이기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의자에 앉은 듯이 고개를 돌려가며 지팡이를 타는 건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음! 진짜 현실적인 이유였지.
릴리는 다시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혼자서 날개 펼친 체.
그것도 속도면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맞춰가며 비행을 시전 중인 데지르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우씨! 내 용용이 돌려줘!”
“가져가세요.”
“동화 끝나면 같은 사람한테는 쿨타임 있단 말이야!!”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그냥 날면 안 됩니까?”
“속도가 안 나와!!”
“걍 참아.”
대체 신께서는 왜 절새의 미녀에게 저런 성격을 주셨을까.
그리고 자신은 왜 저런 여자한테 첫만남에 대뜸 청혼을 해서 발차기를 얻어맞아야만 했는가.
데지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근데, 좀 놀라기는 했어. 설마 네가 그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거든.”
“그럼 제가 뭐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여기까지 오니 세삼 궁금해지는 군요.”
“어음......유일한 정상인 포지션?”
“두 분께서 들으시면 화내실 겁니다. 당신 말고 다 정상인이야.”
“뭐, 여튼, 내가 일선을 넘을 거 같으면 커트 해준 게 너잖아?”
마왕들을 쳐 죽일 때도.
그 후 마계 전역에 어그로를 끌었을 때도.
또 그 다음 용사들의 만행에 점점 지루해지며 차라리 제국에 돌진할까 싶을 때도.
데지르는 항상 릴리의 옆에서 그녀를 만류하며 계획이 폭주하는 것을 방비했다.
뭐, 어찌보면 그조차 다 제국을 위해서.
또한 자신의 안위와 미래를 위해서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작 계획이 어그러지고 릴리가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준다고 제안한 순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국을 버리겠다고 선언한 데지르의 모습을 떠올리며 좀 이상하긴 하지.
“자길 죽여달라고 했을 때, 뭔 미친 놈인가 싶었는데.”
“당신의 직관적인 성격을 고려하지 못하고, 너무 돌려서 말한 건 인정합니다.”
“멍청하다고 디스하는 거냐?!”
“그걸 알아 들으니 아주 멍청한 건 아니셔서 다행이군요.”
자길 죽여달라.
뭐, 알아들을 사람을 알아들었겠지만.
신분적으로 본인을 죽여달라고 말한 것이다.
어차피 현재 데지르는 반쯤 행방불명인 상태나 마찬가지이니.
다크 엘프들의 도움을 구하든,
혹은 좀 미담을 과장하여 마황에게 도전하여 패배한 인물로 만들어 주든, 황태자란 신분을 뒤탈 없이 벗어 던질 수 있데 도와달라고 한 것.
이유는 물을 필요도 없이, 제국을 버리고 지구로 향하기 위함.
릴리는 이게 이상하다는 듯 지적하며 물었다.
“황제. 되고 싶어 했잖아? 아니야?”
“되고 싶었죠. 하지만 본질적으로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건, 그 방법 말고는 살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황자, 황녀와는 다르다.
이미 황테자에 오른 그이기 때문에 그런 것.
지금의 황위 쟁탈전에서 제 1 황자이면서 동시에 황태자까지 되어버린 그는 모든 걸 포기한다고 한들 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지.
그렇기에 모든 걸 포기해도 죽을 수 밖에 없다면, 모든 걸 손에 쥐어 살고자 한 셈.
“사실 이종족들에게 손을 내민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지지 기반이 없으니 뭐라도 잡아야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황태자가 되셨는지.....”
“어쩌다 보니라고 해야겠죠. 태자 위를 정하는 시점에서는 쟁쟁한 후보들이 비등비등한 세력을 일구고 있었기에 역으로 누구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었거든요.”
일종의 명분이다.
앉아선 안 되는 인물이 자리에 앉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탄 받아 마땅한 것이니.
그날 만의 하나 데지르 이 외에 정통성이 부족한 다른 형제 자매들이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면 필시 그 사람은 모두의 일방적인 공새를 받았을 것이니.
역으로 정말 정통성이 확실한 데지르를 임시로 세워둠으로 인해, 나중을 노린 것이지.
“덕분에 전 죽을 노릇이었죠.”
황태자라는 자리에 오른 이상.
황제가 되지 않는 한 이 자리를 살아서 내려올 순 없게 되었다.
가뜩이나 제 1 황자라는 입장 때문에 사리고 살아야 했었는데, 강제로 태자 위까지 받게 된 이상 무슨 짓이든 해야 했던 게 당시 데지르의 상황이었지.
“그렇기에 당신과 발할라는 제게 있어 최고의 기회, 유일한 구명줄 같은 존재였습니다.”
“초기에 친하게 나온 이유가 그거였구나?”
“그런 셈이죠. 당신에게 협력한 이유도 그렇고. 하지만 이제 당신은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미친 척 하고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절 황위에 올려도 기반이 되어주실 수는 없게 되었으니”
그렇기에 데지르는 결정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건 다 버리자고.
어차피 가진 것도 없었고, 원해서 황위를 노린 것도 아니었다.
본래라면 버릴 수조차 없었던 게 그의 처지였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위대한 마녀가 자신을 도와준다고 하니.
새로운 세계에서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마음 먹은 것.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릴리도 자신도 더는 미래를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데지르는 제안했다.
“이제 떠날 건데, 챙길 건 다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도 만만치 않은 미친놈이야.”
지금 두 사람이 가는 곳을 알브 헤임.
본격.
수박 서리 저리 가라 할 세계수 서리가 서막이 열린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