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이상은 이상일 뿐.
* * *
“고로, 너희들 전부 해고! 빠이염!”
예지가 용사 일행들에게 피니셔를 날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난 자비로운 미소와 함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즐거웠어. 비록 너희 일한 기간이 1년이 안 되기에 퇴직금은 줄 수 없지만. 그 동안의 노고와 나를 위한 헌심은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길이길이─”
“미친 년인가?”
“일을 이렇게 벌이고 그냥 간다고?”
“진짜 마황도 거르겠다.”
그러나 상큼한 개소리에 좋은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임계치를 뚫어버렸는지, 오히려 평소와 같은 얼굴에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어 나를 바라보는 세 사람.
무언가 얼굴에 진 그늘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불길한 아우라는 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연장을 챙기려는 모습에, 난 화급히 양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 농담! 농담이지!! 뭔 말을 못 해요?!”
“어디서 구라를”
“저희가 당신을 하루 이틀 봅니까?”
“진짜 그냥 가려고 했지? 요즘 심심하다며 집집 투덜 노래를 불렀잖아. 안 그래?”
의심 가득한 얼굴로 아직도 연장을 향한 손을 거두지 않은 데지르, 바네사는 잔뜩 그늘진 얼굴로 나를 내려보고.
인자한 그리시아마저도 허탈한 한숨을 감추지 못한 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니.
그도 그럴 게 예지의 바람과는 별계로 우리의 계획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기 때문.
난 뻘쭘한 표정으로 볼살을 살살 긁으며 가장 먼저 데지르를 향해 말했다.
“내가 너한테는 진짜 할 말이 없다. 근데. 지금 오는 인간들이 인간들인지라. 빠른 시일 내로 돌아가긴 해야 할 거 같거든? 예지 제가 저래 보여도 지구에서 하는 일이 많은 인긴이야.”
테라에서나 발할라가 어둠에 숨어 나쁜 계획을 암약하는 조직처럼 보이지.
지구에서 발할라의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일, 조직으로 미국에 동등한 플례이어 수와 질을 유지 중인 조직.
한국 내에서도 서서히 언터쳐블로 부상하는 중이고.
거기에 더해 마황이 되기 전 들었던 소식에서 의하면 지구 상황도 말이 아닌 덕분에 이런저런 이유로 전세계를 누비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고 했었지.
그런 예지가 이런 시답지도 않은 ‘릴리 초스피드 귀환 작전!’을 꾸린 거다.
얼마나 그녀의 의지가 강한지.
그리고 참여한 발할라 사람들, 내 가족, 동료들의 의지가 명확한지는 불보듯 뻔 한 일.
내가 초 대규모의 언데드 군단을 조종하는 마황을 연기했으니.
단기결전으로 끝날 리는 없다는 핑계가 있을 터이니, 시간을 끌려면 끌 순 있겠지만, 난 어찌저찌 돌아가긴 해야 할 것이다.
“뭐, 여기 둘은 말이 대마녀지 내 노예니까 상관 없는데.”
“어이”
“얌마”
“넌 그 동안 내 말만 듣고 여러모로 날 도와주기도 했고, 내가 너에게 민폐를 많이 끼친 것도 안정하거든.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네 편의를 최대한 봐 줄 수 있어.”
“.........”
내 말에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인 데지르
사실 이제와서는 의미없겠지만, 예지의 지금 행위와 우리의 계획은 그 골자를 같이 한다.
차이점이라면, 영웅의 등장 시기.
그리고 사도라는 액스트라의 유무겠지.
그도 그럴 게 우리는 영웅이 돌아갈 필요가 없었거든
오히려 정 반대, 권력을 휘어잡는 구도를 원했지.
그렇기에 더 물이 오른, 더욱더 고조된 위기감이 필요했었다.
마황 토벌대를 굳이 기다린 것도 같은 이유지.
지구에서야 몇 백명이 죽었다 같은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파되면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슬퍼하고, 화가 내주고 그러는데 테라는 좀 다르거든.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각종 괴물들과의 싸움과 전선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국지전.
지구의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차마 눈뜨고 봐주기 힘든 치안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한 게 테라 주민들의 감성이다.
그런 그들에게 마황이 등판한 상황 속,
몇 백명이 죽었네.
전선이 깎여가는 중이네 같은 소식이 절망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할 수 있을 거 같은가?
당장 저기를 보라.
나라는 마황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음데도 여유 만만하게 인류 최강자가 누군지 가리는 모습을.
위기감은 주었을지 몰라도 테라 주민들에게는 아직 절망이 없다.
그렇다고 진짜 제국 인구의 절반을 학살하는 미친 짓을 벌일 수도 없으니.......
우리가 고른 게 상징적 인물들을 제물대 위에 올리는 것이였지.
누구나 승리를 장담할 것 같은 존재들로 이뤄진 마황 토벌대.
아니 승리 할 수 밖에 없을 거라 여겨지는 마황 토벌대.
그런 그들이 무참히 짓밟힌다.
그리고 그 목을 내건 마황의 진정한 진격의 시작.
마치 이제까지는 장난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며 파도와 같은 방식이 아닌.
질병처럼 퍼져가는 가시나무의 줄기처럼 제국을 파고드는 마황의 군세들
굳이 제국에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않고도
데지르가 영웅으로서 우뚝 설 수 있는 조건이.
그가 내게 협력하여 쳐내고 싶은 정적과 종양과 같은 인물들을 잘라낼 최적의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다.
나 역시도 대륙을 진동시킬 마황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예상할 수 있겠지?
예지가 했던 것과 같다.
마르가스, 용용이와 동화한 데지르를 필두로.
어쩌다 보니 합류하게된 대마녀 둘을 양쪽에 덧붙여 제국을 구원하는 거지.
이미지도 죽이잖아?
황태자지만 기반이 없어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는 비운의 황태자.
불우했던 환경.
그럼에도 어떻게든 능력을 증명하고 노력했던 그의 모습.
거기에 수많은 악담 속에서도 다크 엘프를 비롯한 타 종족들에게 손을 뻗는 겸허한 자세까지.
힘이 부족할 뿐, 데지르는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는 영웅의 조건을 갖춘이였으니
그때부터 그의 무대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런저런 시나리오 다 짜놨는데.”
“용기사인가 뭔가 하는 그거?”
“그것도 있고, 이런저런 것들 잔뜩 만들어 놨지. 마녀들도 이참에 반 강제로 진행하던 역마살 생활 청산하면 좋으니까.”
바네사와 그리시아가 협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거의 개연성 밥 말아 먹은 수준의 먼치킨 주인공이 될 데지르의 옆에 본인들이 있다면 아직까지 마녀라는 인식 속에 남은 잔재.
그리고 나로 인해 급 부상 해버린 마녀가 마족이 아니냐 하는 인식을 한 번에 청산할 수 있으니까.
더불에 가뜩이나 소수 중에 소수인 마녀 종족에 앞날도 밝아질 터이고.
나는?
나야 뻔하지.
적당히 시기봐서 데지르와 일기토를 벌인 뒤 된통 깨지고 도주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모두 잊었겠지만, 엄연히 이 일의 시작은 엘프, 그리고 세계수에 있잖아?
어차피 데지르는 제국 내에서 내가 뿌려둔 마황군을 정리하며 활동을 벌여나가야 할 테니.
난 그에게 깨진 걸 핑계 삼아 새로운 힘.
영웅이 되어 등장한 황태자에 맞서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치는 마황은 연기하여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세계수를 탈취할 예정이었지.
“그동안 전 발할라와 접촉할 생각이었습니다.”
“더욱더 강해져 진 보스로 등장한 마황, 이제는 마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무튼, 그런 나와 너.”
“정확히는 저를 비롯한 여기 마녀 두분과 지금 제국에서 판을 벌이고 계신 발할라의 분들과 함께 마황과의 진정한 격전을 벌인 뒤.”
“나는 거기서 다시금 패배의 쓴맛을 들이키고 작열히 산화하니, 그리하여 제국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이게 우리 약속이었으니까.”
어느 정도의 피는 감수할지 언정, 제국에는 최소한의 피해로.
썩은 귀족들, 데지르의 모든 정적을 제거.
데지르는 명실상부한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마녀는 최강의 영웅을 후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륙 곳곳에 명성을 떨치니,
더는 그 누구도 마녀를 마족의 일원이라 감히 말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마술사들 역시도 마녀를 존중하며 업신 여길 수 없는 환경이 완성된다.
발할라 역시 황태자를 도와 마신을 격파한 영웅의 조력자로서 제국에 모두에게 각인 될지니.
그리하여 제국은 발할라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
나아가 지구와 테라 이어주는 교두보가 되고.
마신이 된 마황이 보여준 세계수의 진실.
그리고 탈취되어 사라진 세계수가 없는 현실에 통감하며.
그동안 타종족들에게 부렸던 수많은 악행들의 응보를 받아 추락.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크 엘프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퍼트려 다크 엘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더불어 엘프들의 사죄를 받아내게 되니.
난 하얀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상상의 나래를 바라보며,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조금만 더 달라면 됐는데........까비.”
“.........진짜 돌아가실 겁니까?”
“어쩔 수 없지. 예지에다가 가족들, 친구들에 발할라 사람들까지 저 지랄을 떨었는데.”
시간을 벌 수 있어도 돌아가긴 해야 한다.
예지에게 상황을 설명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녀가 지금 벌인 그림을 보면 더 이상 날 테라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니.
어찌되었든 난 돌아긴 해야겠지.
“그대로 무림 문제도 있고 하니, 아주 돌아가진 않을 거야. 마르가스는 일단 동화시켜둔 체로 둘 게.”
“예? 그럴 수 있습니까? 당신이 본래 세계로 돌아가도?”
“다른 소환수면 몰라도 그건 특제니까. 중간중간 마력만 체워주면 링크가 끊어질 일은 없어. 마력은.......뭐, 충전은 해두는데. 막 쓰지는 마라? 너 그러다 미라가 돼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실상 마력만 충분하면 뭔들 못하겠는가?
단지 그 마력 양을 주인인 나라서 감당하는 거지. 심령의 연결도 없는 타인은 절대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난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며 조금 묵직한 크기의 마석 3개를 꺼내 데지르에게 던지며 말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둔 보조 베터리야. 군주, 사흉을 잘라내 봉인한 신천석이라는 물건을 연구해 만든 거지.”
“보조 베터리....”
“인간적으로 이름 좀....”
테라에서는 신화라 불리는 군주를 봉인한 신물에 본인 연구까지 더해져 만든 기물에 저딴 이름을 붙이는 인간은 아마 나 밖에 없을 거라며 통탄하는 마녀들.
그러나 데지르는 이미 익숙한지, 받아둔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 약간 아쉬운 감정을 토로하며 그것들을 품에 넣었다.
“이걸 주시는 걸 보니. 진짜 돌아가시긴 할 모양이군요.”
“말했잖아? 어쩔 수 없다고. 만일의 경우지만, 예지가 날 찾는 게 지구에 급한 일이 생긴 걸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본드래곤은 데려가실 줄 알았습니다. 항상 정용 탈 것이라고 하실길래. 애정이 깊어보이셨거든요.”
어련할까.
애정?
그딴 가벼운 단어로 이야기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피눈물이 흐를 수 있다면 흘리고 싶은 게 내 심정이니까.
그 폭풍 간지 위에 앉을 수 없는 내 심정을 누가 알아 준단 말인가.
하지만 어떡해?
임상실험 부족인지, 데이터 부족인지는 몰라도.
동화되어 제 성능 튀어나오는 게 용용이 밖에 없는 것을.
솔직히 그 동안은 나를 상대로만 써봐서 몰랐는데. 마녀 둘이 오고 이런 저런 실험을 해보면서 이 소환수 융합도 적성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라.
아무 융합이 다 데지르 + 용용이급 성능을 보여주지 않는다.
첫 타인 임상실험이 데지르, 용용이 조합이라 한동안 몰랐는데, 이걸 알고 나서 세상 내 편한 대로 되는 거 없구나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지.
“난.......책임질 줄 아는 훌륭한 어른이니까.”
“지랄 염병.”
“속된 말을 쓰고 싶진 않은데, 지금은 바네사님이랑 같은 말을 하겠습니다. 지랄하지 마세요.”
“릴리 좋아하는 말 있지? 뚝배기 깨지고 싶어?”
으음.....양심이 많이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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