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사도 vs 용사 (4)
* * *
발할라의 계획대로, 그리고 모두의 바람대로 용사들의 시답지 않은 도발은 막을 열었다.
영문도 모른 체 퍼져나가는 이름 없는 성녀의 외설적인 소문들.
마치 우연인 것 마냥 행선지가 겹쳐 어그러지는 일정.
따로 활동하는 사도들에게는 항상 찾아가 시비를 거는 등등
참.......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예지는 그런 용사들의 행태를 감상하며, 마치 귀여운 아기 고양이의 재롱이라도 보는 듯,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상황을 멀리서 감상 중인 릴리 마저 입이 떡 벌어지고.
바네사와 데지르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저런 빡 대가리로 잘도 교단 정치판에서 살아남았구나 싶어 했지.
뭐, 그리시아의 설명에 따르면 용사를 지목한 성녀의 휘광 덕분에 정치판 그 자체에서 언터쳐블한 존재였다고 하는데.
정작 그러면서 본인들이 처신을 잘해 살아남았다고 여기고 있으니, 할 말이 없을 뿐.
단지 그럼에도 예지를 곤욕스럽게 만든 사건이 하나 있긴 했었는데.
바로 예지를 사도vs용사 구도에서 제외하려고 했던 수작들이었다.
어찌나 어설프던지......
눈 감고 당해줄 생각이던 예지가 차마 못 봐주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굳이 이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도록 하겠다.
딱히 대응을 하지 않아도 이미 쌓여버린 성녀의 이름 값만으로 처리되버릴 그런 수작들.
예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스스로 사라지는 길을 택했다.
저치들이 무슨 생각으로 예지를 싸움판에서 배제하려는 건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발할라의 모두가 알다시피 논외 릴리를 제외한 발할라의 최강자는 철수다.
지금이야 이상한 기사 컨셉 잡는다고 많이 실력이 죽었지만, 그래봐야 결과의 흔들림이 있을 정도는 아니니, 예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오히려 그렇게 사라지고 나니.
‘성녀님께서 무의미한 싸움에 눈길을 돌리셨다.’ 더 그럴싸한 소문이 나돌더라.
잠깐 그동안 고생했던 보상으로 바캉스를 즐길까도 고민한 그녀지만, 쉬는 건 일이 끝난 뒤의 이야기로 해도 문제없겠지.
예지는 어떤 의미에서 용사보다도 고대하던 만남.
릴리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의 수문장과 대면했다.
“여~~ 안녕 황녀 전하?”
“역시 곁으로 보는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군. 성녀여. 아니, 발할라의 수장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좋으려나?”
철수와는 조금 느낌이 다른 핏빛의 적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날카로운 이미지.
붉은 머리와 함께 어두운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는 허리춤에 걸린 칠흑의 검.
마치 서로 대비되는 색체를 풍기는 두 여인
제 1황녀 일레인과 성녀 한예지.
어쩌면 현 제국의 머리라 할 수 있는 그녀와 발할라의 대표가 드디어 만남을 가졌다.
“우리 교단 측 성녀들도 그대처럼 이야기하기 편했으면 좋으렸만. 그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들이거든.”
“뭐, 신앙심에 논리를 들이대면 대강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지.”
“그대 역시 지구의 성녀일 텐데 신앙심은 없는 건가?”
“뭐......요즘 겪는 일이 일들인지라 생기려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이전에 난 장사치여서 말이지. 믿음도 손익 계산을 한 다음에 주는 성격이라.”
일레인은 예지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건지, 조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찻잔을 들었다.
기실, 만남의 이유를 생각하면 일레인에게 지금 자리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자리.
어떻게보면 보기 좋게 예상이 깨지면서 발할라의 폭주를 막을 수 없던 제국이 수세에 몰린 격이다.
전과는 다르게 현제는 제국이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그녀를 찾은 만큼 그다지 기분 좋게만은 볼 수 없다는 거지.
하지만, 일레인은 조금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조금도 기죽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일단 한 방 먹었다라고 말해두지. 성녀. 잘도 판을 뒤집어 줬어.”
“그러게 우릴 왜 이 지경까지 몰아서 사고를 치게 만들어. 우리가 왠만하면 제국이랑 잘해보려고 한 건 알잖아? 등신 같이 보일 정도로 어설픈 이상주의 평화론자 행세를 하고 나갔는데. 그때 손을 잡았어야지.”
“내 실책이지. 너희들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 여겼거든. 말 그대로 어설픈 이상주의 평화론자. 난 너희를 그렇게 봤다.”
일레인이 처음 발할라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후 그들의 저력이 일부를 본 뒤 들었던 생각은 멍청하는 거였다.
저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대화를 권유하지?
왜 저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칼을 뽑기 망설이는 건가?
어떻게 다른 나라도 아닌 다른 세계의 주민끼리 평화 따위가 가능하다 여길 수 있는지 하고.
그렇기에 대화를 거부했고, 손을 쳐냈다.
겉으로는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민들과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민감한 시기기도 했으니. 이미 파악하고 있겠지만, 황실 내부가 어지러운 건 분명한 사실이기도 했다. 마황 토벌이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기도 했고.”
“평화주의만 내세우는 사람들 특징이, 정작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니까.”
일종의 딜레마.
평화를 위해 칼을 뽑을 수 있는가의 문제다.
대부분은 뽑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대체 왜 그러나 의문이겠지만, 집단의 성향 자체가 현실을 거부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또 현실을 고려했다면, 애초부터 평화주의 따위를 생각할 리도 없고.
“시끄럽긴 하겠지만, 적당히 받아 넘겨주면 문제 없을 인간들. 힘만 쌘 머저리. 대충대충 상대해 주다가 마황도 정리하고, 황실 내부도 안정시킨 다음, 무림이랑 싸울 때 써먹으면 좋겠지 라고 여겼을 거야.”
“정확해.”
“근대 그 계산이 지금 보기 좋게 깨진 거고.”
“그렇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겠지.”
기실, 따지고 보면 일레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어설픈 평화주의자라는 말......발할라 입장에서는 부정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군주들과의 대전쟁을 겪고, 또 몸이 변하면서 성격의 변화 역시 찾아왔다고 하지만, 그 알맹이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칼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일반인들이다.
평화에 찌든 사람들이지.
판타지라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수많은 괴물들과의 사투를 벌이고.
타 종족과의 갈등과 싸움이 하루가 멀더하고 터져나가며.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범죄 노출도를 자랑하는 테라인에게 비하면 겉모습만 같을 뿐, 속은 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
실제로 릴리가 벌인 일에서도 발할라 내부에서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레인의 말에 마냥 고개를 저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조건마저 발할라에게는 좋을 수 없었는데.
현재 발할라는 일종의 선발대이기 때문.
테라의 존재는 이미 지구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면, 문이 늘어나고 발할라의 정보를 토대로한 취합이 끝나면.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테라로 올 것이 예정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 후발 주자들 때문이라도 평화주의,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었던 셈이지.
하지만, 단 하나 일레인이 간과한 게 있으니.
“우리 세계가 평화를 사랑하기는 해도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유토피아는 또 아니거든? 전쟁을 칼로만 하는 게 아니지. 그리고 그 칼 없는 전쟁에서 너희와 우리는 질적으로 레벨이 달라.”
언제다 황실의 말이 진리였고. 그 누구도 대앙하지 못했던 황좌가 있던 제국이다.
정보전, 여론 몰이 따위를 해본 적이 있을리 없지.
비록 통신 매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은 정보전 분야에 있어서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였다.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다리를 꼬아 앉는 예지는 살짝 톡을 들어올려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봐. 딴 세계에서 찾아온 이런 자세나 취하는 성질 더러운 여자가. 고작 며칠만에 대륙의 구원자. 마황의 대적자. 진정한 신의 대리인이 된 걸. 너희가 조금이라도 빠르게 대처했으면 이런 꼴이 나진 않았지.”
“그래서 흥미롭고 신선한 충격이 와 닿는다. 너희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해지기도 하고. 무림은 사용하는 힘이 특이할 뿐,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자들이었거든.”
거스를 수 없는 물살이란 이런 것일까.
제국은 별의 별 수단을 다 강구해보았다.
저 여인이 지구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걸 공표할까?
공식적으로 교단의 손을 들어주어 성녀와 사도의 무리를 부정해야 하나 하고서.
하지만 의미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방인이라면 뭐?
이미 성녀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베일에 쌓인 인물이다.
이제와서 제국 황실이 그런 성녀가 지구라는 세계에서 왔다고 말해봤자. 테라 전역에 지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생길 뿐이겠지.
오히려 발할라 좋은 꼴만 시켜주는 셈이지.
그렇다고 교단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실력의 편린을 드러낸 마황이 너무 강했다.
당장 용사들이 사도와 용사 간의 신경전에서 성녀를 배제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용사들도 인정하는 거다.
진짜 마황과 싸울 사람은 여기 이 성녀라는 걸.
하물며 용사들마저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민중들은 오죽할까?
기사단 내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말이, 이름 없는 성녀야 말로 진정한 구세주라는 말들이다.
그분만이 마황을 쓰러트리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그분 말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용사? 사도?
어디까지나 겉절이다.
이미 분령과의 전투에서 예지가 천사의 모습으로 변한 그 순간.
그리고 고작 한 번 휘두른 창격으로 평원에 계곡을 만든 순간. 이걸 부분을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일레인은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휩싸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참.......마황이 너희에게 유리한 존재군. 마황 덕분에 너희가 제국에 간섭할 명분이 생겼고, 마황과 그대와의 전투 덕분에 민심이 이 지경에 치달았으니.”
“..........”
“내심 생각한다. 사실 마황은 너희들 쪽의 사람이 아닌가 하고, 나타난 시기도 공교롭고, 샤말리아에서 마계로 날아갔다는 거대한 본드래곤의 존재도 걸리고, 무엇보다, 마황이 죽였다고 확실하게 확인되는 건 네 명의 마왕 뿐. 나머지 셋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에 쌓여있지.”
그저 마황 본인이 죽였다고 하기에 그려려니 할 뿐.
또 소거법에 의해서 마왕을 그렇게 흔적도 남김없이 묻어버릴 수 있는 존재도 마황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직접적인 확인은 아직도 되지 않았다.
“마황에 대해 정말 많은 조사를 했다. 마녀란 자들은 생각 이상으로 유대가 강해. 본대 선배가 스승이면서도 동시에 부모이며 자매인 자들이니. 실력에 관게 없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이들이지. 하지만 마황의 존재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금 차를 음미하며 섬뜩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일레인은 지긋이 예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참 누구랑 닮았지 않은가?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그대들 같은 강자들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포커페이스를 무너트리지 않은 예지였지만, 역시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속으로 릴리와 데지르를 씹지 않을 수 없었다.
당당한 예지의 표정에서 대체 무엇을 발견한 건지, 모를 일레인은 잠시 말없이 예지를 바라보고는
처음으로 그녀 답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훗, 아무것도.”
“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내가 궁금할 뿐이라는 거다. 어차피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제국에게 하등 도움되는 것도 아니니.”
마황이 발할라의 편이라면 전력 구도 자체가 변화한다.
홀로 제국의 마계전선 전체를 압박하는 저력을 과시하는 중인 게 마황.
거기에 발할라까지 가세한다고 하면, 그건 이미 제국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거기에 민심은?
절대적 절망과 유일한 희망이 실은 같은 편이서 짝짝궁 하는 중이라고 알려져 봐라.
그 패닉을 대체 어떻게 감당하라고.
기사들 중에서도 충심이 높은 자가 아니라면 검을 떨어트릴 지 모르는데.
일레인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가지런히 손을 모아, 무름 위에 올리며 말했다.
“인정한다. 이번 판에서 제국은 졌다. 상대를 예단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패자로서 이를 인정하며, 거래를 제안하마.”
“........우리 요구는 알겠지?”
“그래, 회담에서 너희가 이야기 했던 내용들 전부 수용할 것이다. 더불어, 너희 이후 찾아올 지구의 존재들 역시 일을 벌이지 않는 선에서는 최소한 손님으로 대우할 것을 약속하지.”
“거래 또한 인정해 주었으면 하는데.”
“그건 추후 내용물을 본 다음 결정할 일이다. 아무리 이번 판에서 졌다고 한들 독이 들었을지 모르는 술을 그냥 마셔줄 순 없으니까. 대신 문제가 없다 여겨지면......수락하지.”
예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들이야. 알아서 처리해라. 이젠 불필요한 존재들이니.”
마황이 사라지면 마계를 사실상 제국의 적이 아니다.
마왕도 없는 마계 따위.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
그에 따라 용사들의 존재 의의 또한 마찬가지.
일레인은 다 쓴 칼을 빠르게 바꾸는 주의였다.
“우리의 바람은 두 가지. 마황을 신속하게 처리해줄 것.”
“그거야 보채지 않아도 할 거야. 이제 클라이막스까지 다 왔으니까.”
“두 번째는 내가 마황과 싸운 기록들, 그걸 전부 온전히 제국의 역사로 남겨줄 것. 발할라의 대표인 너와 이름 없는 성녀는 다른 인물이어야만 한다. 왜인지는 알고 있겠지?”
혼란도 혼란이지만, 이번 일로 인해 황실의 권위가 많이 추락했다.
용사들과 성녀 무리도 마황 토벌대에 일원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의 1검 또한 토벌대였으니.
결국 제국은 마황을 쓰러트리지 못한 것이 된다.
여기까지야 졌으니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 대상은 신의 대리인과 같은 접촉 불가의 존재여야 한다는 것.
가뜩이나 황권 다툼이 치열한 지금, 그 혼란이 가중 되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예지는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반박 또한 주장했다.
“그래도 우리 공적이 증발하는 건 인정 못 하지. 마황을 잡은 값도 받긴 받아야겠어.”
“너야 어차피 신의 대리인 같은 모습을 자처했으니, 불가능하지만. 대신 사도들에게 그에 합당한 공적을 통한 지휘와 명예, 영지를 내리지. 향후 너희 발할라가 제국에 뿌리를 내리는 데 썩 나쁘지 않은 패가 되어 거다.”
“영지라.......으음 나쁘진 않네.”
근본적으로는 황실 귀속이기는 해도 영지는 자치권이 인정되는 그야말로 영주의 땅이다.
사병도 일정 선이 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거느릴 수 있고, 꼼수를 부리면 그 일정 선을 넘는 것도 문제는 아니니.
“무림과의 다툼에서 한 팔 거들어 주겠다면 마황에 쓸려나간 변경백의 영지 전부도 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부만 줄 거다. 또한 최소한의 관리는 해주어야 한다.”
“그 정도면 돼. 어차피 우리가 뭐 여기 땅 파면서 농사 지을 것도 아니니까. 영지라는 게 있다는 거면 충분하지. 그것도 마황 토벌을 완수했다는 명예와 함께면 말이야.”
그 외에도 서로 몇가지 협약에 관한 조정이 오간 후, 일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지 역시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아, 이걸 말하는 걸 잊었군. 오필리아로 변장한 너희 사람. 제법 탐이 나는데, 나중에 한 번 만남이라도 주선해주었으면 싶구나.”
그 말과 함께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걸 느낀 예지.
딱딱하게 굳은 듯한 목으로 시선을 올려, 어떻게 그 사실을 아냐는 듯한 물음이 담긴 시선을 보내니, 일레인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내가 특이한 것 뿐이다. 사람 보는 눈썰미가 좀 밝아서 말이지. 실력도 좋고 능력도 괜찮은 훌륭한 패를 뒀어. 발할라에는 인재가 많아서 부럽군.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
충분히 허를 찌르는 패를 가졌음에도 그러지 않은 여유가 담긴 대사.
예지는 처음으로 이번 만남에서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예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레인은 정말로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그 당시를 회상하며 예지가 평하길 가장 찜찜하고 기분 나쁜 승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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