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사도 vs 용사 (3)
* * *
신속 간결
뒤탈도 뒷수습도 불필요.
또한 기회비용마저 저렴.
비단 기업의 총수뿐만 아니라 말단의 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최고로 선호되는 이러한 일처리 방식은 당연 예지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뭐, 저번 릴리의 분령과의 결전에서 대강 자신들의 의중을 그녀가 눈치체 준 것은 확인했지만.
기억하자.
릴리는 폭탄 그 자체다.
그때의 의중을 대강 ‘발할라가 제국을 정리한다’ 정도로만 받아들였다면, 다른 곳에서 대형사고를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의미.
예지의 조바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아, 물론 데지르와 릴리가 같이 붙어있는 꼴을 더 볼 수 없는 것도 한 몫하지만.....
여튼
그렇기에 예지는 최대한 빠르게 그러면서도 본인의 프라이버시에 어긋나지 않도록 완벽한 일처리를 원했다.
하지만, 으래 그러하듯 정치판, 이권, 종교에서 명분에 이르기까지 막장의 끝을 달리는 이 판에서 최단 기간 일처리란 망상 속의 꿈일뿐.
특히 이 놈의 명분 싸움은 치가 떨릴 정도로 괴변과 날조로 점철된 전장이었기에.
예지는 질근질근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인내하고 또 인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 들어온 하늘이 내린 기회
용사, 오필리아의 등장.
아니, 접근.
제법 머릴 굴릴 줄 알 던 여자는 지금 판을 키우는 게 발할라라는 걸 눈치채고 다른 용사들 몰래 자신들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제가 지금 당신들 정체를 뿌리면 어떻게 될지 알죠? 신의 사도랍시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실상 무림 놈들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들이었다니. 후훗, 얼마나 대형사고를 치신 건지 알긴 아려나?”
손등으로 입을 가린 체 비릿한 웃음을 흘려보이던 여인.
뭐, 목적이야 다들 예상했던 것과 같은 협박이다.
대충 그림 상 발할라가 마황을 잡으려는 것 같으니, 그 공적의 중심에 자신들을 세워라.
많이는 바라지 않는다.
이미 성녀의 강함이 증명된 지금 오히려 지분을 많이 가져가면 도리어 의심의 싹만 자랄 뿐이니.
대충 사도 중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게 말했다.
“첫번째 사도는 아쉽게도 이미 임자가 있으신 거 같으니, 전 마지막으로 부탁드려요. 첫번째도 인상 깊지만, 마지막도 마지막 나름의 매력이 있는 번호니까. 더불어 전 이미 용사기도 하구요.”
13번째 사도의 자리.
동시에 최강, 최고의 사도라는 이명.
물론 그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앞으로 생길 세력 구도의 변화도 지원해주시면 좋을 거 같네요.”
“세력구도의 변화?”
“마황이라는 누름돌 덕분에 피만 안 보고 있을 뿐, 당신들 덕분에 교단 내부가 갈기갈기 찢겨진 건 이미 알고 있잖아요? 이름 없는 성녀를 주축으로 하는 파벌, 그 외에 신흥 파벌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데. 거기에 기존 파벌에 반발을 가지던 사람들도 다 일어났고.”
본래라면 잠깐 반짝이고 말 혼란이 발할라로 인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예지, 이름 없는 성녀의 지지파를 만들기 위해 뿌려둔 자금과 세력.
이는 기존 체제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에 단초가 되었으니.
예지가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시작된 혼란의 파도는 이제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누가 마황을 잡든.
좋든 싫든 간에, 교단은 변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 변화의 바람 속에 자신을 굳건히 지켜줄 바람막이, 나아가 더 놓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달라는 것.
“........욕심쟁이네.”
“어머, 여기서 끝이 아닌데요? 무림 알죠? 지금 제국 황실 상황도. 전 한낱 용사 따위의 인생에 만족하고 싶지 않답니다.”
마황 뒤에 있을 무림의 침략
어쩌면 황권 다툼의 절정을 보여줄 그 싸움에서 오필리아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길 원했다.
뭐, 당연히 황제가 되겠다는 어이없는 개소리는 아니고.
지지하고자 하는 파벌의 황자가 있는데, 그자가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 사격을 해달라는 것이다.
딱히 그 황자의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보나마나 힘 없고 세력도 변변치 않은 이겠지.
그래야 보다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
어쩌면 황후의 자리를 노르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지긋이 앉아 들은 예지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참......곤란하네.”
마황은 실상 토벌이 아니고 릴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 이런 불순물을 끼워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림은 판이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걸 알았기에 끼어들 생각을 접었다.
또한 교단 내부에서 벌인 일은 어느 정도 발할라 나름의 정리 방식으로 치워둘 계획까지 다 세워놨다.
즉, 여기 오필리아가 한 요구는 무엇 하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종류의 것들.
특히, 첫번째, 마황 토벌의 참전과 사도의 자리는 논외의 영역이다.
“어머? 진짜 곤란한 상황이 생기길 워하시는 건 아니죠?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저력을 보면 딱히 힘들 거 같지도 않은데.”
“아니아니, 진짜 고민이야.”
“고민할 필요가 있는 문제로는─”
“널 어떻게 조져버릴까, 말이야.”
“네?”
─타각.
조용히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예지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에 맞줘 들어오는 이는 옅은 분홍빛에 오필리아 따위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사악한 미소를 짓는 여인.
그녀는 뱀의 눈으로 오필리아를 바라보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대충 프로필 훑어보니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요? 꼬래, 머리 쓴다고 여기 오는 건 아무도 모르게 왔고, 또 다른 용사들이랑 접점도 없는 거 같아 들킬 염려도 없고, 으음......그래도 날치기로 하는 거라, 한달 정도가 한계일 거 같지만.”
“연주가 뒤에서 많이 도와주고, 신식 정보를 계속 업데이트 해주면?”
“그럼 그냥 제가 버티는 한계선까지죠. 저도 사람이긴 해서 쉬는 타임이 필요하다보니.”
“지.....지금 대체 이게 무슨....”
견적이라도 내듯 오필리아를 위에서 아래로 지긋이 훑는 여인, 에리카의 시선.
일본의 엄청난 병신과 함께 따라온 이 구렁이는 오필리아 이상의 욕망이 점철된 눈빛으로 오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진짜 괜찮아요? 솔직히 반쯤은 찔러보는 식으로 말씀 드린 건데......진짜 해주신다고 할 줄은 몰랐거든요.”
“유일 무기의 제작은 아직도 소식이 없지만, 신화 등급은 진작에 도달하고도 개량까지 끝났어. 재료야.....뭐, 내 지갑이 좀 위험하긴 하지만,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걸 생각하면, 손해는 아니고, 무엇보다 난 지금 좀 급해서 말이지.”
그래도 예지는 설마 너 같은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릴리가 전에 상태창이 이상한 게 있는 인간을 찾던데. 너도 그 부류였을 줄이야. 상당히 중요시 여기던 것 같던데....”
“전, 회장님께 들켰단 사실이 더 놀라워요. 어떻게 아셨어요?”
“너희 일본 놈들이 테라에 간 후로 지나치게 조용했으니까. 특히, 유이치랑, 너는 요주의 인물이었고.”
“좀 부족한데....”
“하나 더하면, 내 감은 너가 더 위험한 년 같았거든.”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고 예지는 말했다.
유이치의 버프는 유이치가 대상에게 느끼는 친근감, 호감도에 따라 증가한다.
그런데 반평생 그 이상을 함께 산 소꿉친구보다도 전장에서 며칠 함께 했던 여자가 더 호감도가 높다고?
그것도 랭커 싱글과 랭커 하위권을 동일 선상에 둘 정도의 차이로?
예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병신은 아냐? 지, 호감도 조작된 거.”
“말씀이 심하시네. 조작이라니. 그냥 살짝 기억 좀 건드리고, 맞춤형 향수 비슷한 걸 뿌린 거 뿐 인데. 저도 노력 많이 했어요. 이게 그런 만능이면 진작에 회장님이나 그 마녀분부터 건드리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진작에 뒤졌지.”
“그러니까.”
당최 알 수 없는 소리를 주고 받는 예지와 에리카.
오필리아는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대.....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지금 제게 이러고도”
“빠가사리, 용사님? 대가리를 굴릴 거면 좀 똑바로 굴리셔야지. 댁이 지껄인 생각, 댁이 주둥이 턴 그 계획. 제국의 그 황녀가 몰랐을 거 같아?”
“박쥐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랍니다. 또 이렇게 대책 없이 범 아가리에 머리를 내미는 건 하수 중에 하수가 하는 짓이고요.”
예지는 손을 뻗어 성창을 꺼냈고, 에리카 딱히 자기가 나설 필요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한발 뒤로 물러났다.
“제국은 진작에 우리가 한 짓거리를 알아 봤어, 그러고도 건드리지 못하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쌔게, 그리고 강할 줄은 몰랐으니까. 니가 주둥이를 놀리든 말든, 이미 다 이야기 끝난 사항이라 이거야.”
“서.....설마!!!”
“그래, 제국에서 온다는 파견단. 기실, 우리와의 최종 협상을 마무리 지으러 오는 거지. 우리가 설마 교단부터 건드렸겠어? 판이 굴러가는 곳이 제국인데?”
한낱 자신 따위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소리에 오필리아의 어깨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걱정마, 죽이지는 않을 께. 넌 나중에도 두루두루 써먹을 거 같거든.”
“머리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뇌진탕이라도 빠지면, 습관이나 버릇 같거 읽어내기 더 어려워져서.”
결국, 오필리아는 검을 치켜세운 체 예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그럼 용사님, 실력 감상이나 해 볼까?”
* * *
당시를 회상하던 예지는 조용히 눈을 뜨고는 화면 속에 비치는 오필리아와 용사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세치의 혓바닥으로 용사들을 농락하며.
파괴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용사의 허물을 뒤집어 쓴 뱀의 모습을.
철수는 이에 닭살이 돋기라도 한 건지, 팔을 빠르게 문지르고는 예지를 향해 물었다.
“아니, 뭐 그래서 몸을 탈취하거나 그런 능력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단순히 마력의 기억을 읽고 간섭하는 능력, 사물에 쓰면 사이코메트리 같은 종류로 쓸 수 있고, 사람한테 쓰면 기억을 끄집어 낸 다던가, 간단한 조작 정도만 가능해. 단지, 주기적으로 오랫동안 반복하면, 트라우마을 인위적으로 만든다거나, 세뇌까지도 어느 정도 가능하고.”
“그럼 저건...”
“사로 잡은 용사년으로 부터 기억을 읽고 본인이 연기하는 거지. 변장은 저기 연주 몫이고. 연기력은 순수한 본인의 기량.”
“브이!”
연주의 V 사인의 예지는 똑같이 V 사인을 돌려준 후 의자에 등을 기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에 반해 사람들은 그저 화면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는 중.
“졸라 무섭다.”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영화보다 더 한 판타지가 펼쳐지니 저런 것도 나오는 거지.”
“뭐, 덕분에 우리야 좋아지만.”
에리카 덕분에 시간 단축을 엄청나게 할 수 있었다.
기실 그 이전에도 에리카를 활용해 교단 내부 및 제국에서 공작을 진행했던 예지지만, 이번 오필리아의 뻘짓을 그야말로 천운의 기회였으니.
“본래라면, 교단의 장악까지 진행하고, 제국이랑도 다이다이 치면서 기다리다 확실하게 우리가 명분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지.”
“근데, 그걸 용사들이 직접 오게 만든 거다?”
“그렇지.”
도발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지만, 빌어먹을 정도로 겁이 많던 놈들은 단 한 번도 그 도발에 걸리지 않았다.
어찌보면 릴리와 예지의 실책.
이팩트를 주기 위한 당시의 쇼에서 설마 용사들이 예지마저 두려워하는 결과가 나와버리고 말았으니.
“뭐, 그래도 덕분에 어찌저찌 잘 해결된 거지. 어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한 3일 안에, 용사들이 일기토를 걸어올 거야. 당연히 난 제외. 사도랑 마황 토벌대의 매칭이지.”
“거기서 이기면?”
“바로 마황성이지. 이런 저런 미사여구가 나돌아도, 모두가 동의하는 게 하나 있잖아? 마황 토벌대는 최강이어야 하는 거.”
그렇기에 용사들이 도발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황 토벌대인 시점에서 이미 자신들이 최강이니까.
자위도 그런 자위가 있을까 싶지만, 용사들이 용사다워야 말이지.
그 외의 다른 마황 토벌대의 프로필을 뒤적이며 예지는 계속해서 말했다.
“용사 말고도 다 찬성할 거야.”
“응? 그건 왜?”
“대마녀 둘은, 상황이 어찌되든 상관 없다 주의야. 릴리 손에 잡힌 그리시아라는 마녀와 바네사라는 마녀만 구할 수 있으면. 오르리안과 제국 전력은 오히려 지길 바라고 있을 정도지.”
짧게 마무리 될 거라 보았던 토벌대가 이렇게 질질 끌려서 가장 불만이 많은 게 그들.
오르리안의 머릿 속에는 빨리 판을 뒤집고, 제국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다.
“성녀 둘은.....좀 걸리지만. 딱히 문제는 없을 거고”
“뭐, 결국 다 종착역에 다왔다는 소리네. 릴리는 뭐하고 있으려나? 전에 예지 앞에 떡하니 나온 거 보면 여기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거 같던데.”
“보나마나 뜅굴뜅굴 거리면서 팝콘이나 씹고 있겠지.”
“아, 순간 상상했음. 크크, 진짜 그럴 거 같더라. 은근히 불구경 싸움 구경 엄청 좋아하니까.”
이제 거의 다 왔다, 머지 않아 릴리를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모두가 화기애애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한 사람, 현대 아트에서 부활한 민준이 손들 들어올렸다.
“질문! 질문 있습니다.”
“다시 벽이랑 키스하고 싶다고?”
“아뇨, 아뇨, 저 사절이고. 여기 모두가 궁금할 것 같은 거”
“응? 그런 게 있어? 그게 뭔데?”
모두가 궁금할 것 같은 거라니.
그 말에 정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 모아지자, 민준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사....쌥니까?”
과연.
모두는 그 말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직 용사라는 장애물이 있긴 하지.
예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궁금할만 하지. 실제로 사도가 용사랑 마황 토벌대에 지면 이것도 다 말짱 도루묵이니까. 근데.....”
“““근데?”””
“알잖아? 요즘 용사가 어떤지. 참고로 난, 주인공이 용사인 소설 안 읽어.”
먼치킨 장르가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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