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성녀(가짜)의 진격 (3)
* * *
철수는 조금 벙찐 얼굴로 예지를 불렀다.
“예지야.”
“응? 왜?”
“인간적으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너 뭐 하면서 살았냐? 그니까 대전쟁 전에 말이야.”
늘 드는 생각이지만 이 처자, 평범한 여자가 절대 아니다.
특히 여기 테라에서 단 일주일 만에 벌이 이 일들을 살펴보며 더더욱 심상치 않았기에 철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예지는 뭘 갑자기 생뚱맞은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마른 오징어를 뜯으며 답했다.
“뭐긴 뭐야. 평범한 재벌 집 딸내미였지. 일도 하고, 게임도 열심히 하는. 아, 오해하지 마라. 발할라는 집안 도움으로 세운 거 아니니까. 다 내 돈이랑 내 발품 팔아서 세운 거지.”
“어.....레알? 벌써 독립을 했다고? 사업이라도 했냐?”
“사업 같은 소리하네. 야, 사업할 돈은 뭐 땅 파면 나오냐?”
“재벌 집 딸내미라매?”
“그렇게 독립하면 그게 독립이니? 무튼 그게 아니고, 대전쟁에서 얻은 내 부산물들 말이야. 그거 팔아서 발할라 세웠지. 다행히, 값을 후하게 쳐주는 곳을 찾아서 말이야.”
당장, 릴리에게 묻혀서 그렇지 예지 역시 철수와 함께 인류 최강 라인에 일각 중 한 명이다.
아니, 오히려 릴리의 비정상적인 강함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최강은 그녀와 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에 따라 그녀가 참여한 전투들에서 얻어온 부산물의 양은 굉장했고, 거기에 여기 저기 투자를 좀 받아서 세운 것이 발할라.
오히려 그녀는 발할라를 세운 뒤, 자기 집안이 더 귀찮게 다가왔다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뭔 놈의 숟가락 올리기 신공이 그렇게 대단하냐? 그 인간들 내가 발할라에서 정리하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가족을 그 인간들이라고 하는 건 좀.....”
“야, 족보상만 가족이지, 그 인간들 맞아. 아비란 놈은 새여자 만나고, 어미란 인간도 재비 같은 남자 하나 물어서 새출발 해 버렸는데 그게 부모냐? 인간이라 해준 것만 해도 난 자식 도리 다했어.”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이 예지는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어댔다.
대충 철수도 저 오징어가 누구를 생각하며 물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수준.
하지만, 한 번 말문과 감정의 뚝이 터진 건지, 예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니, 야 들어봐. 결혼이란 게 신성한 의식이잖아.”
“님이, 릴리랑 하려는 건?”
“그것도 신성한 의식이지. 내가 성녀인데 어딜 감히. 씁!! 안 닥쳐? 아무튼, 근데 내 부모라는 인간들은 날 사랑으로 낳은 게 아니야. 재산 상속 용으로 나은 거지.”
애초부터 결혼이 두 사람의 바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예지는 말했다.
대충 보니 양가의 주선으로 결혼은 하는데, 자유로운 바람 기질이 다분했던 둘은 당연히 이게 대해 반발.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거절하기에는 명분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재산 상속에 있어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혼인 신고서에 싸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결혼 생활이 순탄하게 흘러갈리가 없지.
둘은 결혼식을 올린 지 체 2주가 안 되어 별거 생활을 시작했다.
따로 합의 같은 것도 필요없었다.
둘 다 양가에서 마련한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그야말로, 서류 상으로만 유부남, 유부녀인 것.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둘의 생활은 머지않아 들켰고, 불호령과 함께 양가 부모님의 귀에 들어갔다.
“이 다음은 대충 예상이 가지?”
“어.....”
“뭘 얼 타고 있어?”
“이런 이야기를 그렇게 오징어 씹으면서 말할 수 있는 거냐? 내가 재벌 문화를 잘 몰라서....”
“야, 재벌도 사람이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하여튼 한국 드라마가 사람들 인식을 다 망쳐 놨지. 그 인간들이 미친 놈들이지. 재벌이라서 미친 게 아니라고. 야, 그러면 나도 미친 년이냐?”
“릴리, 납치해서 결혼한 다음, 감금 육성한다는 거 보면 그럴지도?”
“떽! 내가 닥치라고 했지? 어딜 제 1사도 따위가 성녀님 말씀에 토를!”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 다음은 예지 말 대로 예상이 가는 결말이었다.
억지로 다시 합쳐진 두 사람은 그제서야 서로 합의를 봤다.
서로서로 재산은 물려받아야 하니, 눈 딱 감고 낳은 자식을 낳았는데 그게 예지였다.
그 뒤로도 적당히 좋은 부부의 연기를 하려고 했지만, 어디 육아 육성이 쉬운 일인가?
두 사람은 다시금 폭발해버린 한량 기질을 이기지 못하고 탈주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예지는 기본적으로 외가 쪽으로 거둬졌는데, 그놈의 재산 상속 문제 때문에 여기저기 눈치가 장난이 아닌지라. 외가와 친가를 왕래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녀 사랑이 그 정도로 막아지는 것인가?
감질맛나게 있다가 사라지고, 있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극정성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고, 그 덕에 예지는 나름 나쁘지 않은 사랑 아래 자랄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여기서 또 남은 게 있냐? 진짜 릴리 인생은 래전드고, 니 인생은 드라마네.”
“그럼 니 인생은?”
“동네 찐따 형?”
“동네 찐따 다 나가 죽었네. 뭐, 별 건 아니야. 어찌보면 당연한 거지. 손녀가 소중한 만큼 자식들도 소중한 거니까.”
무슨 수를 쓰셨는지, 할아버지는 예지의 부모님들을 다시 잡아왔다.
그리고는 예지의 눈 앞에 무릎을 꿇리고 사죄를 시켰지.
하지만, 이미 눈앞의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라는 사실조차 느껴지지 않던 예지에게 그런 사과가 의미 있을리 만무.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해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빛 때문에 예지는 만들어진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두 사람의 품에 안겼어야만 했다.
“개과천선은 했냐?”
“했겠냐?”
“그러고 보니, 발할라에 숟가락 올리려고 지랄했다고 했지? 미안. 쓸대없는 소리를 했네. 아!! 맞다. 내가 이 이야기 꺼내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럴 줄 알았어. 뭔 수로 테라에 온지 일주일 만에 이지경을 만들었냐고 물으려고 했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철수를 보며 예지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입에 마른 오징어를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 사는 거 별 거 있겠어? 정치나 종교나 다 거기서 거기지. 정치는 좀 배웠거든. 할아버지들 지론이 경제도 경제지만 진짜 큰 사업을 하려면 정치를 알아야 한다고 하셔서.”
옛날부터 재정분리이니, 정교분리이니, 어떻게든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기 위한 노력이 판을 이뤘지만, 그런 말이 나온 것부터가 둘은 따로 때어놓을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걸 반증한다.
누군가가 그랬지.
정치와 종교는 같은 나무에서 열린 다른 과일이라고.
거기에 하물며 여긴 지구가 아닌 테라.
사람들의 인식부터가 종교, 신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성직자가 신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일 수단이 말빨 말고도 차고 넘치니.
하물며 예지는 그 중에서도 정점인 성녀의 힘을 가진 자.
“땅 따먹기에서 반칙 쓰고 하는 게 이것보다 쉽지. 릴리도 참 바보야. 이런 건 나한테 맞겼으면 마황 같은 거 갈 필요도 없이, 바로 신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는데. 후훗! 이걸 보고 데지르라는 놈팽이보다 내가 우월하단 걸 다시 한 번 깨닫겠지.”
“에휴~~~릴리야. 너 제대로 물렸다. 알아서 살길 찾아라.”
“자! 빨리 일어서 내 1사도. 이제 2사도도 만나고, 3사도도 만나고 12사도까지 체워서 마황 보쌈하러 가야 하니까.”
철수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틀림없지.
1사도로 자신을 임명한 건 사심이 가득 담긴 결정일 것이다.
거기에 이런 멋 없는 기사 갑옷까지.....
뭔가 철수는 막막해진 앞날에 한숨이 늘어갔다.
* * *
성녀의 본분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을 치료하는 것?
그건 성직자 전원이 다 할 줄 아는 기본 소양이다.
하물며 성기사조차도 간단한 신성 마술쯤은 행사할 수 있으니, 성녀가 그들 모두의 상위 호환인 건 맞지만 딱히 그걸 성녀의 본분이라고 하는 건 흠이 있을 것이다.
그럼 특별한 힘?
이건 좀 사실에 가깝다.
성녀는 분명 문헌에 기록된 신의 사자와 같은 종류의 힘을 각정한 자들이니까.
성화, 성수, 성뢰
각각의 성녀들을 상징하는 수식언이자 동시에 그녀들이 사용하는 힘.
이건 분명 성녀만의 아이텐티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성녀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본분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건 바로 마땅이 해야만 하는 일
위에 언급한 것들은 특별함을 주는 특징일 뿐, 절대 해야할 일 같은 건 아니다.
그럼 그저 교단의 상징,개시를 통해 각성한 신의 대리인이다라는 상징만 가지는 걸까?
그랬다면 지금의 성녀의 지휘가 이리 놓을 수 없지.
성녀의 본분.....
그건 바로 용사의 임명이다.
“이......이런 미친......”
도무지 성직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 만큼이나 이번에 날아온 소식은 추기경인 그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안이었다.
이름 없는 성녀.
그저 조용히 선행을 행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며 마계 전선에 도움을 주던 그녀가 기어이 사고를 냈다.
바로 용사를 임명한 것.
아니, 정확히는 용사는 아니다.
마치 기사의 서임과도 같이 모습이었다고 하니, 임.....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축복? 그런 종류의 것과 비슷해 보였다고 서류에 적혀있었다.
쾅!!!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야!!”
그러나 문제는 이름 없는 성녀가 축복.
아니, 더 정확히 ‘부활’ 시킨 이 붉은 기사에 있었다.
그는 별 볼일 없는, 이제는 명맥마저 끊겨버린 낡은 귀족 출신이었고, 실제로도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이번 마계 전쟁도 귀족의 작위나 의무 따위가 아닌 돈 때문에 참여한 사람,
말만 기사지 거의 용병이라고 해도 무방했던 인물.
그래도 나름 인성이 상당히 좋았는지, 발령난 곳에서 두루 사람들을 아우르며 그와 친분을 쌓은 사람은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그도 결국 마황의 손에 사라지는 한 방울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적혀있는 글로는 그를 추모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지만, 마황은 슬픔을 체 씻어내기도 전에 다시금 쳐들어왔고, 전선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슬픔을 복수심의 장작으로 삼아, 마음을 불태우는 이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기에는 전선은 이미 너무나 피폐하고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그분이 나타났다.
이름 없는 성녀.
세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조금의 더러움도 허락하지 않는
진정한 성녀라고 불리우는 그분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제 됐다.
이겼다
저분께서 마황의 군세를 모두 무찔러 주실 것이다.
저분의 빛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어루만져준다고 하는데, 그녀석도 분명 이제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겠지
하지만, 성녀는 여느 때와 다르게 마황의 군세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한 무덤가를 향해 걸어갔다.
어러번 파낸 땅과 비가 섞여 진흙이 질퍽거리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전사자들이 무덤을 향해.
“대....대체 왜?”
“성녀님, 지금 마황의 군세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를!!!”
반쯤 애원하듯 매달리는 사람들
하지만 성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작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무덤은 전날 죽었던 그 기사가 묻혀진 곳.
솔직히 말해 무덤이라고도 보기 힘든 초라한 몰골이었다.
전사자는 한 둘이 아니니까.
아직 끝나지도 않은 전쟁에서 죽은 이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묻어줄 정도의 여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으며 진흙 위에 손을 올린 순간.
성스러운 빛이 주변을 감싸앉기 시작했고,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의 폭포가 올라왔가기 시작했으니.
“일어나세요.”
작은 읍조림과 함께 무덤 속에서 솓아올라 성녀의 손을 잡는 손
성녀의 첫 번째 사도
성수를 다루는 붉은 기사의 탄생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