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성녀(기짜)의 진격 (2)
* * *
새로운 성녀의 등장
이 소식은 어떤 의미에서 마황의 진격보다도 더 뜨겁게 태라 전역을 달구기 시작했다.
피로 얼룩지고 하루하루 지쳐가던 마황과의 전선 한가운데 내려온 거대한 빛의 기둥,
그 빛을 따라 3쌍의 날개를 가진 여인이 지상에 강림했다.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던 여인은 그 찬란한 자태와 같이 기적을 행사하니, 손짓 한 번 쓰러지고 죽어가던 병사들 모두를 일으켜 세우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황의 군세를 스스로를 감싼 휘광으로 녹여냈다.
피와 사기로 얼룩진 대지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도무지 살릴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동료가 그 분의 따스한 손길 한 번에 삶을 되찾았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빛.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전장 속에 등장한 구원.
기적을 행하는 자.
“성녀님이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다친 병사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한 병사의 목소리.
기실 이 말이 잘못된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교단에서 공인한 성녀 중 저런 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거기에 애시당초 성녀는 저렇게 빛을 타고 내려오는 존재도 아니다.
신의 계시가 교단에 내려오고, 그 계시를 따라 간 곳에서 성녀의 힘을 각성한 여인이 교단에 의해 성녀로 공인되는 것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인지도 의심스러운 존재였었지.
아무리 생김새가 인간과 다를바 없다고 해도, 저런 초월적인 힘을 휘두르는 자가 인간이라고 보기는 힘드니까.
더불어 등의 난 3쌍의 날개까지.
문헌 속에나 등장하는 천사면 천사였지 그녀는 결코 성녀라 불릴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름 모를 병사로부터 시작된 그 말은 어떤 점염병보다도 빨리 사람들의 마음속에 번져가고 있었다.
보라.
맨발에 옷의 구색을 맞췄다고도 보기 힘든 천을 두른 모습을.
온몸 여기저기 교단의 상징과 장식물로 도배된 누구들과 비교되지 않는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음에도.
그 누구보다 아래에 있겠다는 듯한 자태.
보라
그 어떤 단어로도 자신을 치장하지 않는 겸손함을.
기적을 행하고.
수많은 마족의 무리를 물린 친 영웅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입에서는 작은 미소 말고 그 어떤 미사여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다친 병사를 치료하고 있을 뿐.
한 병사는 자기 손의 묻은 피가 행여 그녀에게 닿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손을 잡아주고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그 더러움조차 감싸 안아 주겠다는 것처럼....
광장 한가운데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단상까지 만들고
미리 바람잡이를 고용해 사람들을 모아 선동하여
목이 터져라 신의 이름과 교단의 업적을 노래하는 누구들과 너무도 비교되지 않은가?
하지만 마황은 이를 단순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전장의 하늘은 검은 먹구름과 소용돌이로 물들기 시작하니.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작은 가면이 붙은 검붉은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형태는 직관적으로 말해 슬라임.
하지만 물과 기름을 섞어 놓은 듯한 물결 무늬와 검붉은 색상, 붙은 가면이 결코 저것이 슬라임 같은 미물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전장을 맴돌고.
어느새 꿈틀거리기 시작한 그것은 몸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형상을 가춰가니.
그 자리에는 한 여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까마귀의 가면과 검은 옷.
뒤틀린 형상의 지팡이를 든
작은 마녀가....
“마....마황?!!!”
“마황이다!!”
“이...이게 대체!! 마황은 전장을 유지한다고 마황성에서 못나온다고 그랬잖아?!!”
그 존재를 모르는 자가 이곳에 있을까?
이 전쟁.
절망적일 정도의 재앙이 모두 저 여아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삽시간에 절망이 모든 병사들의 사이에 퍼져나가며 이름 모를 성녀의 등장에 안도한 이를 다시 나락으로 데려갔다.
여기 저기서는 ‘끝이다’, ‘희망이 없다’, ‘죽기 싫어.’ 같은 말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그 이름 없는 성녀는 한 병사의 치료를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
성녀의 몸에 묻었던 피와 얼룩들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거기에 사람들을 치유하던 따스한 손에는 어느새 황금빛의 성스러운 창이 나타나고, 이마의 중심에는 신비로운 문양이 그려지니, 머리 위로 왕관을 닮은 고리가 떠올랐다.
병사들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존재가 정말 성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런 사람, 아니 저런 분이 여기서 이리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 뿐.
아무리 저 분이 진짜 성녀라도 이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당장 마황을 토벌하기 위해 구성된 토벌대의 명단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같은 성녀가 두 분
용사가 다섯 명
대마녀 두 분이 추가로 가새하고, 제국 굴지의 1검과 그 휘하 최정예 기사단이 포진한 마황 토벌대.
그들조차 아직까지 마황에게 칼을 들이밀지도 못했는데, 성녀 혼자서 마황과 싸우라니.....
그러나 둘은 서로를 향해 마주섰고.
천년과 같은 침묵이 둘 사이를 휘감은 뒤......
격돌했다.
──콰아아앙!!!!
어느새 병사들이 휩쓸리지 않도록 장벽까지 만들고서 부딪치는 성창과 스태프.
고작해야 인사 정도에 불과한 일합에 대지에 금이가고 지반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그 뒤 이어진 광경은 더더욱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으니.
“오.....옥타캐스터(8중술사)?!”
“너무 부조리하잖아?!!”
마황의 자그마한 손가락이 튕기며 만들어지는 8개의 마술진들.
예상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니나 다를까 마황은 이미 대마녀의 경지조차 지나있었다.
하물며 마술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통일된 속성조차 아니었으니.
이는 마황이 4대 속성에 그 조합까지 모두 아우르는 마녀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루아나”
작은 읍조림과 함께 성창을 감싸는 고리들.
날개의 성녀는 지옥의 불길에도, 붉은 번개에도, 저주가 담긴 묵색의 얼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3쌍의 날개가 곧게 펴지는 순간, 모두의 시야에서 창을 앞으로 내민 체 돌진했다.
마치 그녀 자체가 거대한 랜스가 된 듯한 모습.
마황은 당연하다는 듯 다시 손가락을 튕기고 마술들을 해방했다.
마황의 공격과 성녀가 부딪칠 때마다 무시무시한 폭음이 발생했지만, 성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건 아니었는데, 격돌과 함께 그녀의 창을 감쌌던 성창의 고리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
팽팽한 줄다리기 속 마지막 마술과 고리가 동시에 깨져나가고 마황에게 다시 접근한 성녀.
그러나 가면 속 마황은 웃고 있었다.
“크윽!”
바닥에서 올라오는 수십 개의 손이 돌진하는 성녀를 잡은 것.
처음 몇 개는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지만, 결국 모든 손이 성녀에게 닿았을 때, 성창은 마황의 코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흡!”
처음 격돌 때처럼 단순히 마술만 난사하는 건 아닌지, 능숙한 움직임으로 창을 쳐낸 마황은 스태프의 머리에 마력을 휘감아 성녀의 머리 위로 내려쳤다.
이에 눈살을 찌푸린 성녀.
그때, 그녀의 입에서는 마황만 들릴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씨.....눈치 있게 좀 봐주지. 꼭 사람 밑천을 까게 만들고 있어.”
그렇게 스태프와 은발의 머리가 닿으려는 순간.
처음 그녀가 내려왔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웅장한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빛은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쌌고, 마황은 재빨리 빛 속에서 빠져나왔지만, 성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모두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한 병사는 마황의 시선이 하늘로 향해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올리니.
그곳에는 진정한 신의 사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순백
문양이 그러졌던 이마에는 어느새 진홍색의 보석이 자리하고.
그녀의 등 뒤로는 거대한 삼중의 원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
하늘에 뜬 체 지상의 마황을 내려다 보던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을 들어 올렸다.
“산달폰.”
가벼운 아래 배기.
검에서는 기본.
창에서는 찌르기 다음의 기본 동작.
하지만 그 결과는 기본과 많이 달랐다.
눈이 멀 듯한 빛을 동반한 참격은 마황을 집어삼켰고, 이후 시야를 되찾은 병사들의 눈에 들어온 건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게 갈라지 대지.
성녀는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지상에 내려왔지만,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미소가 없었다.
마황을 쓰러트렸으면서 대체 왜 이러나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스쳐지나가는 그녀의 입으로부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분령이 이 정도라니....”
이름 없는 성녀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이름 없는 성녀.
처음에는 정말로 이름을 몰라 불려졌던 이 말은 금새 고유 명사처럼 그녀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위기에 처한 전장.
혹은 사기에 따른 역병에 고생하는 빈민가에 나타나 사람들을 치유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어느새 말이 굳어진 것.
누군가는 빛의 성녀, 구원, 미소의 천사라 부르기도 했지만, 어느샌가 그녀는 이름 없는 성녀라 불리우고 있었다.
당연히 교단에서는 즉각적인 행동을 보였다.
바로 그녀를 이단이라 발표한 것.
새로운 성녀에 대한 계시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녀의 모습과 힘은 문헌에 기록된 어느 사도의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고로 그녀는 신의 사도도 성녀도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교단은 이단 심판을 열 것이며, 이단 심판관을 파견할 것이라 말이지.
“개소리 집어쳐!!”
이날 광장에서 성명문을 발표하는 교회의 사람에게 돌이 날아왔다.
다행히 돌은 교회 인사 옆을 지키던 기사의 방패에 튕겨 나갔지만, 그 돌을 던졌던 주인은 다시 한 번 돌은 내던지며 소리쳤다.
“니들이 뭘 했는데 그분을 이단이라 말하는 거냐!! 용사란 놈들 다 뭉쳐서 마황성 문도 두드리지 못했으면서 대체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그딴 소리를 지껄여! 니들 따위가 감히 그분을 논해? 성녀님은 마황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실 진짜 신의 사도란 말이다!!”
물론 이 사람은 금방 교단 기사단의 손에 의해 끌려가 사라졌다.
단지,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는 광장에 매아리처럼 맴돌았는데.
이후 이어진 발표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모두 끌려가기 싫어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 경멸어린 시선과 표정만을 남기고 광장을 떠나버렸기 때문.
교단 역시 민심이 너무나 흉흉하다는 걸 알았기에, 아직 마황전에 참여하지 않은 성수의 성녀를 내세워 오해다.
상상하는 그런 이단심판이 절대 아니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정말로 그녀가 성녀인지 판단하는 자리일 것이라 이야기했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지.
하지만 결국 교단의 발등에 재대로 불씨를 떨어트리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한 붉은 적발의 기사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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