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용사 파티X 성녀 파티O (4)
* * *
딱딱한 인상
무표정한 얼굴.
붉은 적발은 정열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반해 일레인은 보이는 것처럼 지극히 차분하면서도 칼날과도 같은 여성이다.
말을 돌려서 하는 재주도 필요도 없는 그런.
“결정이 났다. 거부하지.”
가벼운 인사 끝에 자리에 앉자마자 내뱉는 그녀의 발언.
서두도 없는 돌직구 스트레이트에 철수와 성환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나름, 상당히 괜찮은 재안이었다 생각하는데, 이런 답변은 좀 의외라서.”
인위적으로 만든 미소를 보이며 그녀를 향해 묻는 성환.
얼추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협상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발언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철수 역시 인상을 찌푸리는 상태이고.
그도 그럴 게 거부의 수위가 제법, 아니 상당히 높다.
이 정도 반응은 훗날 상황이 뒤집혀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보일 수 있으니.
물론 발할라가 제국에게 한 제안이 어이가 없고, 또 경우도 없고, 뜬금 없이기도 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그들이 위기에 빠진 제국을 돕겠다 나선다.
원하는 것?
없다네.
필요한 건?
이것도 없다네?
단지, 돕는 방식은 자유.
명령을 들을 생각도, 마황 토벌대에 참여할 생각도 없으며, 자신들이 행한 공적 자체는 제국과 황실의 이름 아래 치하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 뿐.
혜자도 이런 혜자면 판매자가 역으로 흑우로 보이는 수준이다.
거의 반쯤 무조건적인 지원.
하물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제국.
발할라가 맛보기로 보여준 전력은 분명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을 터.
회담이 이번에도 의미없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국 내부의 갈등 때문이지, 여지는 남겨둘 거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필요없다.”
손등으로 턱을 바치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일레인의 시선.
그곳에는 단 한줌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 첫 번째, 수상하다, 너희라는 존재 자체부터가 수상한데 이런 공교로운 시기에 우릴 돕는다? 그것도 이런 조건으로? 너희가 전장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우리가 그걸 허락한다 보는 거지?”
말이 자유로운 도움이지. 발할라가 내민 건, 전장에서의 자율 행동권
일레인은 이 부분을 지적했다.
하지만 반박할 여지는 있으니, 성환은 손가락을 모으며 그녀에 말에 답했다.
“아직 제국도 저희를 불편하게 여길 것 아닙니까? 순수한 호의가 고기방패, 자폭 명령으로 돌아오는 걸 방지하는 차원에서의 자기 방어지요. 전쟁이라는 점을 생각해 합당한 명령은 수행할 생각이 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돕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 다음
“이번 마황 토벌은 전 마왕들과는 격이 다른 문제, 절대 실패를 용납 받지 못할 작전. 근 백년의 평화가 걸린 혈투. 이 싸움에 불특정 요소를 넣고 싶지 않다는 게 우리의 의견이다.”
마황이 스스로를 마황이라고 하던, 마계 초절정 슈퍼 미소녀라고 하던 간에 솔직히 제국에서는 관심없다.
어차피 마계는 마계고 마족은 마족.
제국의 주적이니, 쓰러트려야 할 적일 뿐.
이번 마황의 목의 가치가 올라간 건 마황이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역대급 힘을 과시하며 제국을 침략하는 것도 아니다.
“군림 중이던 일곱 마왕의 목이 모두 떨어진 상황. 마황만 저지하면 더는 마계는 제국의 적이 아니야.”
“새로운 마왕이 탄생하고 성장할 최소한의 시간.”
“그래, 우리가 최소 100년 단위로 보는 그 시간 동안의 평화가 이번 싸움에 걸려있다. 초를 치게 둘 순 없지.”
마지막.
일레인는 살짝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홀짝이고는 다시금 철수과 성환의 시선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마황 토벌은 제국과 교단의 기나긴 명예가 걸린─”
“괜한 소리 그만하지.”
─탁
탁상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팔짱을 낀 체 눈을 감았던 철수가 몸을 일으켰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성환이 당황하는 찰나, 철수는 눈살이 찌푸려진 얼굴로 일레인을 바라보며 몸을 내밀었다.
“우리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잖아? 무조건적인 도움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지.”
철수의 발언을 일레인은 시원하게 긍정했다.
기실 발할라도 목적이 있으니 전장에 참여하는 거란 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사실.
이익이 없는 싸움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땀을 흘리는 노동에도 보수가 필요한데, 피를 흘리는 전투에는 하물며 말이 필요할까?
발할라도 이번 전쟁에서 원하는 게 있다.
그걸 위한 자율 작전권이겠지.
또한 마지막, 공적에 대한 치하.
“그건 테라에 발을 내밀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의미겠지. 너희의 발언을 고려해 볼 때, 물자도 자본도 충분한 너희가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평판이니. 그걸 뒤집고 싶다는 것일 거야.”
무림으로 인해 첫인상이 엉망이 되어버린 이방인이라는 단어.
이를 지우고, 자신들은 무림과 다르다.
평화를
화친, 조화를 원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마황 토벌의 공적을 내세울 셈이겠지.
일레인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이런 단호한 거절. 알력 다툼 때문이잖아? 안 그래?”
“호오~~~ 계속해보게.”
“황태자, 황태녀의 자리. 현 황태자, 데지르 카이사르가 자리에 오른 건 그의 수완과 재능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제 1황자라는 것, 그리고 당신을 포함한 다른 후보군들이 서로 견제하기 바빴기 때문이었지.”
데지르 입장에서는 어부지리였다.
다른 놈들이 워낙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터라, 명분에서 가장 앞서버린 데지르가 자리를 차지한 것이지.
그게 가능했던 그의 재능도 있지만, 여튼
그리고 또 다른 황자 황녀들도 당장 황태자의 자리를 건들기 껄끄러웠지.
실상 근 30명에 달하는 황자 황녀의 서바이벌 매치에서 황태자, 황태녀는 너무나 큰 어그로였으니.
부족한 명분으로 1황자의 자리를 뒤집으면 필시 엄청난 반발로 나락행이 확정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일레인을 포함한 실질적인 황제 후보군들에게 필요한 건 명분.
그래 기회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이라는 소리지.”
일레인에게 비릿한 미소를 선보이며 철수는 다리를 꼬며 앉았다.
마황 침략.
나라를 전란에서 구하고, 근 백년 간 이어질 평화를 이룩한다.
이보다 좋은 명분이 또 있을까?
하물며 든든한 버스기사가 대거 포진한 이번 싸움에서?
누구라도 좋다.
자신의 사람을 마황 토벌대에 넣어 활약하게 할 수 있다면.
그로인해 공적이 자신에게 온다면, 다음 황위는 따놓은 당상.
흔들리지 않는 최고의 명분이 갖춰진다.
“더불어, 자존심도 한몫하지. 평화의 전장에 이방인의 이름이 새겨지는 걸 원하지 않는 이들이 많거든.”
일레인은 아예 부정할 생각도 없는지 철수의 말에 추가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 그리고 신민을 위해 그대들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이번 마황은 뭔가 감히 좋으니 않으니. 하지만 결국 이게 제국의 선택. 번복은 없다.”
“마황 다음은 무림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도 제국이 짊어지겠지.”
“..........당신 정말 황위에 욕심이 있는 거 맞습니까?”
“물론”
이율배반적인 그녀의 행동.
철수와 성환은 마지막까지 그녀의 의중을 읽지 못했다.
서로 내막을 다 짐작하고 있으니, 그 이상의 대화도 없었다.
그렇게 회담이 무산되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는 길.
성환가 철수는 찜찜한 표정으로 회담장을 돌아봤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조사를 급하게 하긴 했어. 제국도 뭔가 비장의 수 같은 게 있다는 거겠지. 우리 꼬마 마황님도, 무림도 박살낼 비장의 수단 같은 거 말이야.”
“그러려나.....”
“모 유명하신 복서께서 한 말 모르냐? ‘다들 그럴싸한 생각과 계획이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우린 기다리자고, 쳐 맞고 돌아와서 질질 쌀 때까지.”
뭐가 걱정이냐며 성환의 어깨를 두드리는 철수.
하지만 그럼에도 성환의 불안은 돌아가는 길 내내 가시지 않았다.
결국, 자신들을 태우러 온 이터널의 비행정의 몸을 실은 후에도 그 마음을 씻어내지 못 했는지 통신장비를 연결하는 성환은 한 여인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요 근래 스트레스가 제대로 쌓였음을 증명하는 목소리.
성환은 이게 잘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국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 거 같아서.”
[.......숨겨?]
“너무 여유롭다고 해야 하나? 마황전 안중에도 없는 느낌이야. 무림도 마황도 적이 아니라는 그런.”
[그래.....그렇단 말이지......]
“어떻게 할래? 이대로 회담을 이어가도 좋겠지만, 난 의미 없어보여. 성사되도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수준의 조건이 따를 거야.”
[성사 시킬 순 있을 거 같고?]
“아니.”
[그럼 돌아와. 플랜 2로 간다. 나름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화친으로 나갔지만, 그게 릴리의 안전만큼 값어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미리 말하는데, 릴리가 바라는 건 아닐 거야. 이대로 마황이 제국을 박살내면 실상 우리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아무리 제국이 뭘 숨기는 거 같아도, 솔직히 전심 전력의 릴리가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용제전에서 보았던 힘,
그리고 나날이 강해지는 능력.
지금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지]
“예지야.....”
[솔직히 내 잘못이야. 그녀는 우리 발할라. 아니 지구 최강의 조커. 이리 싸돌아 다니게 둬선 안 됐지. 돌아오는 대로 결혼부터 시키고 성격 죽이도록 집에 1년 중 364일 정도 감금 시켜뒀어야 했어.]
“제정신인 건 맞지?”
[제국 눈치 볼 거 없이 바로 시작한다. 아주머니랑 아주버니, 소라 모아둬, 철수도.]
“아주머니, 아주버니? 미친.....”
뭔가 돌아온 릴리의 삶이 걱정되기 시작한 성환,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철수는 식은 땀을 흘리는 성환을 향해 고개를 갸웃 거리고, 예지는 마지막 통신을 보냈다.
“준비 끝나고 유리랑 같이 갈 게. 마황 레이드 시작하자고.”
본격 성녀 전기의 서막이 열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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