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용사 파티X 성녀 파티O (3)
* * *
꼬마 마황 릴리 님은 약속을 철저하게 지킨다.
응?
어디서 무슨 쌉소리냐고?
안 지키는 거 졸라 많이 봤다고?
시력이 이상한가보군.
이상 착시현상이니 안과를 찾아보길 바란다.
여튼 내가 그렇게 데지르에게 하루만에 전선을 밀어버리겠다는 선언 후, 난 이 발언을 실현하기 위해 언데드의 난이도를 살짝 올렸다.
너무 올리면 확실히 심하기는 하니까, 수 조정 및 AI향상, 네임드 몹 추가 정도만.
물론 지금까지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던 세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내 뒤로 달려와 뒤통수를 후려갈겼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니.
전선이 이게 이렇게 돼도 되냐 싶을 정도로 참혹하게 붕괴되었다.
“........아...아니, 딱히 엄청 쌘 친구들 푼 것도 아니잖아. 매우 쉬움에서 쉬움으로 간 것 가지고.”
“매우 쉬움일 때도 이만한 책이 나오고 있었거든?”
“본인 입으로도 천하의 둘도 없는 격전의 연속이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여간 무슨 머릿속에 정도라는 단어가 있긴 한 건지.....”
떨어지는 잔소리 폭탄.
제길
아주 그냥 데지르가 3명이구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네 말대로 직접적인 언데드의 위력 향상이 적었기에, 영주연합은 다시 전선을 재구축하긴 했다.
영주가 영지의 절반을 잃고 영지 자체가 유린당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이를 지켜보며 다시 회의를 잡은 우리들.
가장 먼저 그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어찌저찌 미묘하긴 해도, ‘마황이 이제 진심으로 나선다.’ ‘본격적인 시작’ 같은 느낌은 준 거 같아. 여기서 잘만하면 우리가 원하는 그림은 뽑을 수 있겠어.”
거듭 말하지만 현재 나는 정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시전 중이다.
이번 제국과의 싸움에서는 아니겠지만, 결국 내 패배는 확정.
마황은 죽어 사라지고 난 다시 릴리 아스트레아로 모두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서는 모두가 납득가는 상황의 연출이 필수.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막강한 마황은 죽을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어느 누구도 마황의 죽음을 인정하기 않겠지.
찾을 것이고 치밀한 조사가 진행되면 언젠가는 뽀록이 나기 마련.
그리되면 모든 게 끝.
그렇기에 나는 미묘하게 강해야 한다.
마황 토벌대가 딱 그 기준선
역대 최강이라 불리는 마황 토벌대를 와해시킬 정도로 강하지만, 동시에 어느 불세출의 영웅에 의해서 토벌이 가능할 수준.
요 망할 밀당하는 연인 같은 기준선에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수정구 너머의 화면을 바라봤다.
“쩝, 약한 척하기 겁나게 힘드네, 아직 본방은 시작도 안 했는데.”
“그건 그렇지요, 진짜 연기의 메인은 마황 토벌전이니까요.”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데지르, 하지만 바네사는 이마에 십자주름을 세운 체로 내게 서류 뭉치를 던졌다.
“그래서 내가 잘 좀 하라고 했지?!! 너 때문에 또 길어졌잖아! 이거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히이익!! 잘못했습니다!!”
뭐가 길어졌나고?
당연히 마황 토벌대의 도착이지
위력 조절을 실패한 반작용으로 마황 토벌대는 전선의 복구를 위해 마계 진입을 미루고 전선 복구에 나섰다.
실상 전선이 다시 수복된 진짜 이유가 이거지.
이유는 많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오르리안과 용사
전자는 이해해 줘야 한다.
오르리안은 엄연히 제국만을 위한 검이니, 그가 제국의 위기를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오르리안 선에서 끝났어야 할 터.
마황 토벌군 자체가 발이 묶인 건 용사가 직접적인 원인.
─우드득!
처음으로 듣는 데지르의 이가는 소리
나와 그리시아, 바네사는 서로를 부둥겨 안고 자리를 조금 피했다.
“워매......나으리 엄청 화났나보다.”
“오죽하겠어? 운이 좋게도 오르리안을 안 죽여도 되는 그림이 나올 뻔 했는데, 용사 때문에 다 말아먹었으니.”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지, 아니면 그저 제국 1검이라는 위치 때문인지는 몰라도 데지르는 오르리안의 죽음을 반기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시나리오라는 자각이 있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울하고 아쉬운 표정이었지.
그런데 그게 실현 직전까지 왔었다.
상황상 누가봐도 오르리안만 토벌대에서 빠지고 나머지는 마황에게 향하는 그림이 되었어야 할 했지.
그러나 이를 거하게 말아먹은 5마리의 종자가 나타났으니.
용사.....그러니까 대충 용사 1이라고 하자.
그가 가장 먼저 오르리안을 돕자고 제안했다.
이를 용사 3이 동조하며 수락.
오르리안은?
극구 반대했지.
가장 시급한 일이 마황 토벌임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마황이 잡혀야 이번 전쟁이 끝나는데.
오르리안도 입장상 외면할 수 없었기에 돌아선 것이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하지만 개념 밥말아 먹은 용사 2가 사양하지 말라는 양, 입을 털고, 개소리 작작하라며 달려들려는 성녀 둘을 용사 4, 5가 막아섰으니.
엄연히 파티의 주력이 용사이기에 성립할 수 있었던 사태.
난 미친 거 아니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른자 놈들. 대가리에 얼마나 든 게 없으면 저럴까.”
“어머, 우리 꼬마 마황님, 순진하기도 하셔라. 용사가 진짜 진심으로 저러는 거 같아?”
“에?”
“저치들은 제국을 상대로 시위하는 거다. 어딜 감히 신성한 마황 토벌대에서 발을 빼냐는 거지.”
“........더불어 시간을 끄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 또 아직 남은 대마녀 두 분이 몸을 일으키지 않았으니. 가장 확실하게. 무엇보다 가장 안전하게 마황 토벌을 완수하고 싶은 거죠.”
빨대도 이런 빨대가 없다.
사파리 모기도 울고 갈, 거머리가 형님이라 치켜세울 숟가락 올리기 신공.
용사들은 조금의 위험도 감수할 생각이 없는 거다.
더불어 가장 큰 원인은 아마
“““지구겠지(죠)”””
파토난 발할라와 제국간의 회담.
이를 지켜본 용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국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미지의 존재, 더불어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는 이를 어찌 믿고 손을 잡는단 말인가?
나야 개빡쳐서 발등에 불이 덜 떨어졌네, 아직도 배가 불렀네 소리를 하지 제국은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
마황 토벌대라는 필살기도 있으니, 자체적으로 마황을 정리할 희망도 있고.
하지만 용사는?
그들의 눈에는 엄청난 지원군, SSS급 버스 기사가 손 흔들고 떠나가는 걸로 보였을 것이다.
딱봐도 오르리안 저리가라할 수준의 강자가 즐비했을 텐데, 그들 모두가 마황 토벌을 도우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황 토벌이라는 공적을 낼름할 수 있었는데, 회담이 파토나다니!
불만이 장난이 아니었겠지.
회담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니 뭐니, 그런 말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제국이 무능해서, 전력을 날려버렸다 여기고 있을 터.
그리시아는 이런 행태에 조소를 지으며 허탈하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요즘 용사가 다 그래.”
“제가 왜 다 죽여도 상관없다 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자기 목숨 소중히 여기는 건 이해하지만, 용사잖아?
용사잖아?
이건 좀.....
“뭐, 어찌보면 선견지명일 수도 있겠군, 어차피 여기와서 죽을 테니, 살기 위한 본능적 몸부림일 수도 있겠어. 자, 이제 내가 한 일이 얼마나 큰 여파를 가졌왔는지 알겠지? 제국이 저 용사들을 설득할 때까지 마황 토벌대는 이곳에 오지 않는다.”
바네사의 말에 난 고개를 떨어뜨렸다.
용사들도 민심이 있으니 마냥 죽치고 앉아있을 순 없을 터.
결국 오겠지만, 상당히 시간이 지나고 또 남은 대마녀들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토벌대에 합류한 뒤일 것이다.
언젠가 쓰러져야 하는 마황 아리아스타를 위해 위력 조절을 시전 중인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게 남은 두 명의 대마녀와 토벌대의 합류이니. 실상 상황이 또 요상하게 돌아가버린 것.
난 결국 다 포기하고 다시 침대를 찾았다.
“때려쳐, 나 안 해. 망할 똥겜.”
뭘 의욕 좀 내려하면 일이 이렇게 흘러가냐.....
어차피 요는 시간.
내가 할 일은 없다.
말그대로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마녀가 합류하든 말든 도착한 토벌대를 박살내면 그만이다.
마녀들이야 여기 대마녀 두분이 어떻게든 한다고 했으니 하겠지,
어데지르가 중간중간 마황성을 나가 정보를 조작해준 덕분에 더 이상 내게 시간 제약 따윈 없으니, 난 느긋하게 가기로 했다.
바네사와 그리시아도 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데지르만이 길어진 싸움에 허탈한 한숨을 내쉴 뿐.
“뭐, 언젠가는 오겠지. 안 그래?”
이때까지도 난 내 불운을 얕보고 있었다.
* * *
제 2차 제국 발할라 회담
옷가지를 정돈하며 자리를 찾은 성환과 철수는 하품을 내쉬며 자리에 착석했다.
쓸대없는 기싸움이라도 하듯 항상 늦는 제국의 인사들
이제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는 듯, 둘은 능숙하게 앞에 마련된 과자를 입에 넣으며 자리에 몸을 기대었다.
“에휴~~~ 릴리가 우리 고생을 많이 시키네.”
“그러게나 말이다.”
이제는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이유는 알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마음도 좀 해아려 줘으면 하는 심정이다.
아니, 이게 대 우릴 위한 것이니, 이런 말 하긴 그렇네.
좀 자기도 배려해줬으면 하는 마음?
설마 릴리에게 이런 생각을 품을 줄이야.
여튼 여러 의미로 배려심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성환이는 생각했다.
“마황 코스프레라니. 참. 어디서 그런 발상이 나오는 건지, 가끔 가면 무섭다니까.”
“가끔 무섭냐? 난 항상 무섭다. 뭐만하면 낫들도 폭력에, 그놈의 물리 만능주의가 아주 돌아버리겠어. 이것도 사실 물리 만능주의 사상이잖아?”
“힘으로 제국 협박할 구실 만들기.....뭐, 물리 만능주의 맞기는 하네.”
대관절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일을 버린 건지 둘은 알 길이 없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들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만.
“어떻게 이번에는 좀 대화가 돌아갈 거 같아?”
“꿈 깨, 과장 좀 더하면 우린 외계인이야 외계인. 외계인이 우주 병기들고, 구원자라 소리치면 넌 믿겠냐?”
“그래도 우리 따로 불러서 수작 부리기는 했잖아? 넌 어디까지 제의 받았냐?”
“공작”
“이얼~~~ 난 백작인데. 대신 영지도 준다고 하더라”
1차 회담이 끝나고 난 뒤 둘은 제국의 은밀한 제의를 받았다.
툭까놓고 말해, 귀화
제국에 오면 백작, 공작, 영지 등등 권력과 부를 약속했었지.
넌지시 관심을 보이는 척하며 거절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비웃음이 절로 나왔었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인재 쟁탈전 때 미국이랑 중국이 했던 게 딱 그거잖아. 솔직히 나는 그때 세상 사는 거 다 똑같다고 느꼈다.”
왕도적인 방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을 회유하는데 돈과 권력만큼 좋은 수단은 없으니까.
둘이 이유가 있어 넘어가지 않은 것 뿐, 혹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면 차라리 수락을 할 것이지.”
“자존심, 불신, 부질없는 희망. 이 셋 중 하나라도 박살나지 않는 한 그럴리는 없어.”
제국이라는 대국, 무림조차 이겨냈는데 너희들이 어쩔 거냐는 자존심.
이방인에 대한 불신.
그리고 무엇보다.
릴리를 상대로 토벌대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가장 부질없는 희망.....
성환은 피식 웃으며 다과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토벌대가 작살 나든. 아니면 전선이 2번 정도 더 무너지든. 그게 아니면 사실 회담 의미없어. 여기 과자 맛있는데, 이거나 먹고 가자고.”
잘 만든 쿠키 하나를 들어 보이며 이를 입에 털어 넣는 성환.
누가 남편 아니랄까봐, 스리슬쩍 인벤토리에 주섬주섬 챙기는 꼴을 보니 철수도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여간 릴리 걔도 죽었어. 예지가 지금 보통 벼르고 있는 게 아니거든. 돌아오면 결혼 도장부터 찍을 걸?”
“돌았네. 음....뭐, 그림은 나오겠다. 둘 다 얼굴이 명작 중에 명작이니. 근데 누가 남편임?”
“예지 아니려나? 일단 키가....”
“그걸 넘어 외관상 나이가 아웃인데.,...”
그렇게 잠깐의 시간 동안 둘은 잡담을 주고 받았다.
뭐, 시간은 많으니까.
얼추 30분은 지나야 저들은 도착한다.
예의 없는 거 아니냐고?
안다.
그래도 어째겠는가?
이게 제국의 외교라고 하는데.
지구에서도 모 대통령이 비슷한 방식을 쓰기도 하니, 정치인 나름의 계산이 깔린 수단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으니.
두 번째 다과가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어라? 일찍 왔네?”
“그러게, 오늘 좀 쓸만한 대화가 오갈지도?”
예의가 있으니 잡담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
둘은 또각또각 구두와 대리석이 부딪치는 소리는 흘리며 다가온 여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두 번째 만남이군요. 황녀 전하.”
“.......”
드레스가 아닌 제복.
보석이 아닌 검을 찬 여자.
철혈.
제국의 제 1황녀 일레인 카이사르
가장 유력한 황제의 후보가 다시금 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