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슬기로운 깽판 생활 제 2단계 (3)
* * *
자길 걱정하는 마음으로 사막을 횡단하는 수하들을 직접 막으라는, 참으로 배려심 넘치는 릴리의 요청.
이를 눈물을 머금고 수행한 데지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그녀의 강력한 소환수 하나와 완전한 융합이 되었기에 상당한 강화가 이뤄진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사용해본 힘은 그야말로 격을 달리했으니.
사신단 중에서는 나름 자기도 수고를 들여야 할 기사들과 마술사들이 포진하고 있었음에도 제압하는 건 어린 아이 손가락 비트는 것보다도 쉬웠다.
부자연스럽지 않도록 약탈을 목적으로한 습격으로 위장을 마치고, 대충 그들을 주변에 따로 던져두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
그녀가 왜 탈 것으로 골룡을 고집하는지 알 것 같은 압도적인 기동력.
용린에서 나오는 미친 듯한 내구도.
그보다 더 미쳐버린 마력 저항력.
그 밖에도 강화를 넘어, 진화, 초월을 했다고 해도 무방할 힘에 데지르는 이를 좀 더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는 결국 제국으로 향했다.
날아서 갔다면야 이번에도 하루 혹은 이틀이면 충분할 거리지만, 아쉽게도 제국의 감시망을 그리 허술하진 않으니.
국경 부근부터는 조심스럽게 수도 내부로 잠입을 시도.
대뜸 황태자라는 걸 밝힐 수도 없고, 날개나 용안, 용린을 집어 넣어도 묘하게 인상이 많이 바뀐 터라 믿어줄 리도 없으니까.
어느 정도의 고생을 각오하며 최대한 서두르고자 했지만, 이게 왠 걸?
흔히들 이런 말을 하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다.
이번에는 경우가 뒤집혔다.
몸이 너무 좋아서 머리가 고생할 필요가 없던 것.
뭐, 감시 장비나 방벽 같은 건, 그냥 몸빵으로도 충분히 뜯겨버리고, 순간 가속을 제대로 쓰면 감시하는 이들은 지나간 것조차 알지 못하니,
참 이래서 다들 ‘강해져라 강해져라’ 하는 건가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가장 격전의 중심이될 변경백들의 영지를 조사하며 둘러보는데, 총합 4일이면 충분했고.
릴리의 미친듯한 전속전진을 예상하지 못한 데지르는 조금만 더 라는 명목 하에 제국 수도까지 발걸음을 돌렸으니.
“그런데 이게 뭔 일인지........”
하라고 할 때는 오지게 안 하더니만, 이번에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살짝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도 풀 겸, 아주, 정말 아주아주 조금 여유를 부리며 수도로 향했는데, 도착하니 이미 마황의 명성이 제국 전체에 진동하고 있었다.
선전포고?
지옥의 군세?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데지르는 빠르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떠도는 이야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알고 있던 정보상을 찾아가고
술집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말.
상인들이 주고받는 정보. 등등
그렇게 취합된 정보는 하나하나가 가히 마황의 이름에 부합하는 것들 뿐이었다.
지옥의 문을 여는 자
파각제(???), 뿔을 부러트리는 자.
죽음의 재롱을 즐기는 여인.
등등
마족을 상대로한 그녀가 벌였던 것이 어떤 일인지 짐작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사람들이 이미 그녀를 이렇게 부르고 있었다.
악마의 악마, 마황이라고.
한술 더 떠서 조사를 마친 다음 날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그녀의 이명.
종말의 마녀, 아리아스타.
데지르는 이미 해탈의 경지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뭔 놈이 일을 하라고 할 때는 안 하더니!!”
잔소리를 그렇게 쏟아내도 하루하루 나날이 개을러져 가더니만, 대체 왜 자기가 뭘 좀 해보려고 할 때는 이렇게 빠릿빠릿하냔 말이다.
해논 일은 또 왜이렇게 완벽하고?!
선전포고는 데지르와 릴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며 고민한 부분이다.
최대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마황의 이름을 제국에 알릴 방법을 고심했었지.
하지만 결국 결론이 나지 않았고,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는데, 이게 무슨.
평범하게 선전포고를 날리고, 이후 마족에게 보이는 행보를 대놓고 보임으로써 이를 해결.
인상 정도가 아닌 제국 사람들 뇌리 깊숙한 곳에 마황의 이름을 박아넣었다.
마족에 대한 것도 나름 제압 후의 행보가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바로 큰 힘을 보이지 않고, 경고장을 통한 도발
이후 분노한 마족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것으로 힘을 과시하고, 뿔을 부러트리는 기행을 통해 두려움으로 미친 마족을 내리누르는 센스까지.
가명 또한 미리 주의를 주지 못하고 나왔는데, 잘도 괜찮은 걸 골라와 쓰고 있으니. 데지르 입장으로써 그저 릴리가 원망스러울 수 밖에.
“이렇게 일을 잘하면서 그동안은 대체 왜.....”
하루에 골 백번도 드는 생각이지만. 릴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여튼 그로인해 제국은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
데지르에게는 여유가 없어졌다.
오래 머물면 그녀가 자신이 사신단을 막지 못한 건 아닐까 오해할 테니까.
그는 품에서 그동안 모은 정보들을 정리한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펼치며 고민을 시작했다.
“오르리안 경. 흑사자 기사단, 탑주......”
여기까진 문제 없다.
실질적인 문제는 그 다음.
“성녀 둘에, 용사 전원.... 하지만 이게 제일 문제로군, 마녀들.”
관자놀이를 팬으로 꾹꾹 누르며 대마녀라 쓴 부분에 밑줄을 그은 그는 팔짱을 꼈다.
“제길, 내가 그렇게 사정사정해도 꿈쩍도 안 하던 엉덩이가 이렇게 가볍게 들릴 줄이야.”
무림의 일 때문에 대마녀 중 2명을 만나본 경험이 있는 데지르의 입장상, 이번 마녀의 행보는 예상 밖이었다.
테라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 무림의 준동에도 움직이지 않겠다.
마녀들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소리만 늘어놓던 대마녀.
그런 그녀들이 릴리가 마녀라는 소식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개개인의 의견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참네.”
고민이다.
적이 너무 강해서?
아니.
이걸 전부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성녀....성녀는 안 돼. 용사 같은 쭉쩡이가 아니야. 하나도 문제인데, 둘이나 죽이면 교단 전체가 흔들린다.”
교단이 근래 돈을 좀 많이 받아먹긴 해도, 엄연히 제국을 넘어 테라 전역에 뿌리내린 종교.
기세를 죽여둘 필요가 있을지 언정 아예 줄기를 꺾어 버리면 보통 혼란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그 가운데, 이번 전쟁에 참여한다는 성화의 성녀.
그녀는 성녀 가운데서도 능력과 인망이 가장 출중한 터라, 죽였다고 하면 테라 전체가 들고 일어설지도 모르지.
마황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는 릴리를 고려할 때, 성녀만큼은 절대 죽여선 안 된다.
“대마녀도.....쩝, 마음 같아서는 릴리 씨 한테, 언데드로 만들어버리라고 하고 싶지만, 이쪽도 안 되겠지.”
살랑살랑 웃는 얼굴로 찻잔을 채우며 요리조리 말을 회피하던 대마녀, 그리지아
그녀를 떠올리던 데지르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대마녀의 평판 역시 성녀 못지 않으니까.
비록 성녀만큼 활발할 활동을 벌이지는 않더라도, 기나긴 수명 동안 그녀들이 테라라는 세상에 기여한 일은 이미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존재 자체부터가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
만인의 스승이라 불리던 책의 마녀부터, 지금의 마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한 자유의 마녀까지.
4명 모두 죽일 경우 여파가 결코 적지 않은 존재들 뿐.
선전포고를 잘 날린 건 좋은 일지만, 대어를 낚아도 너무 큰 대어를 낚아버렸다.
데지르는 옆에 둔 차를 살짝 홀짝이며 다시금 고민에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어디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으.....살려도 너무 많이 살려야 해.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오르리안 경도 죽으면 곤란하고.”
마황의 명성은 천지를 울리고 있는데, 주력이 되는 이들 절반을 살린다?
그것도 제국에서 거하게 종말의 마녀라는 이명까지 붙이 마황이?
안 될 일이다.
이번 전쟁으로 마황 관둘 거면 모르겠는데, 제국 다음은 진짜 목적이나 다름 없는 알브 헤임이 기다리고 있고.
나아가 나중에는 무림에서까지 써먹을 신분이 바로 마황.
공을 얼마나 들였는데,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제기랄, 어떻게든 직접 충돌을 피할 방법이 없으려나?”
차라리 싸우지 않는다면.
하지만 바로 고개가 저어지니.
이만한 정예 중에 최정예다.
감히 테라에서 모일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이라 봐도 무방할 이들이 마황성에 도착하지 못할리가 없지.
어쭙잖은 언데드 따위 용사와 성녀 앞에 갈갈이 찢겨사라질 것이고.
마족들 또한 오르리안을 비롯한 흑사자 기사단이라면 간단히 정리할 터
그나마 소환수를 쓸 수 있었다면 무리가 없겠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이니.....
“후~~~ 고민을 좀 해봐야겠군. 쯧, 마녀만 어떻게 해도 나머지는 될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이제와서 같은 마녀가 발목을 잡는지.
낡은 여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데지르는 다시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 * *
“오늘 따라 달은 또 존나게 밝네.”
위에서 비춰지는 달빛을 보며 난 작은 감탄을 내비쳤다.
역시 판타지산 청정구역 테라
달빛부터가 지구랑 격이 다르네.
아, 근데 테라에서는 달이라고 하나?
암튼, 이게 창문에서 보이는 거면 좋을 텐데, 왜 천장에서 보이는 건지.
차가운 새벽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뻥 뚫린 천장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둘러본 다른 주변도 마찬가지.
요근래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히키코모리 전용의자인 옥좌는 반으로 갈라져 버렸고.
내심 ‘멋있는데?’ 라 생각했던 음각이 그려진 벽과 기둥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
그 외에도 갈라지고 움푹 패인 흔적이 여기저기 난무한 광경은 무슨 폭격기라도 한바탕 지나간 듯한 모습이다.
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난 입을 열었다.
“마족들이랑 설치는 일이 많아서 강화도 잔뜩 해 둔 곳인데 말이지, 에휴~~ 이걸 언제 다 고칠련지 원. 암튼 그래서 니들 누구냐?”
그렇게 내 시선이 향한 곳은 이번 일의 주범인 침입자들이 있는 방향.
난 뒤에 슬라임처럼 뭉쳐진 영혈의 일부를 때어내 쿠션 의자처럼 앉아 그들을 바라봤다.
“.........”
“.........”
피범벅이 된 채 검붉은 줄기에 십자가로 묶인 두 여인.
한쪽은 은에 가까운 백발, 다른 한쪽은 살짝 푸른 빛이 감도는 녹발이다.
판타지 스타일 압도적 외모는 기본 베이스에, 입고 있는 로브는 장식이 없는 원색이지만, 재질은 멍청한 나라도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수준.
하지만 화룡정점은 따로 있으니, 바로 저 멀리 바닥에 굴러다니는 꼬깔모자.
아마 나랑 같은 마녀란 소리겠지.
“한 가닥하시는 선배님들 같은데, 하늘 같은 후배님, 집에 이렇게 대뜸 쳐들어 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하품을 찍찍 내뱉으며 여유롭게 말하고 있지만, 내심 난 장난 아니게 놀랐었다.
방호벽을 쳐둔 게 몇 개인데, 그걸 모조리 경보도 울리지 않고 뚫다니.
더군다나, 사용한 마술의 위력도 절륜했지.
다시 말하지만, 일일이 수리하기 싫어서 왕홀 전채의 내구도를 상당히 강화했었다.
그럼에도 이런 처참한 광경이 연출되고.
또한 이 흔적의 절반은 초격 한 방에서 만들어 진 것.
테라, 아니 어쩌면 지구를 포함해도 군주만 제외하면 손에 꼽는 강자가 틀림없다.
난 영혈을 움직여 저 멀리 떨어진 모자 두 개를 주워와 품에 내려놓았다.
모자가 떨어지자 그제서야 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무겁던 입이 열린다.
“에휴~~ 눈빛은 뭐 사람 하나 잡아먹겠네. 아무 말도 안해요? 나 남녀평등주의자라, 여자라도 뒤지도록 패는데?”
“............이미 뒤지기 직전까지 팼으면서.”
“하하, 아까 선배님이라고 불러주던데, 그럼 후배님도 가면 벗고 이거 좀 풀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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