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슬기로운 깽판 생활 제 1단계 (4)
* * *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에 실시되었던 감옥실험이 대표적인 사례이지.
고작해야 2주간의 짧은 역할극에 지나지 않을 실험.
초기에는 간수의 역할을 배분받은 이도, 수감자의 역할을 받은 이도 히히낙락 거리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돈이 나온다 좋아하였지만.
이후 그들은 놀랍도록 간수와 수감자의 위치에 동화되어 2주짜리 실험을 고작 6일 만에 외부인들이 강제로 중지시키도록 만들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실험을 주관했던 필립 교수조차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가 실험 중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지금 나는 교도소 내부 질서를 유지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렇게 한가한 학술적인 질문을 받아야 하느냐?”
물론 스탠퍼드 감옥실험은 이후 조작 의혹이 불거지며 과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메소드 연기 등과 같은 사례는 환경이 얼마나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시사한다.
데지르 역시 마찬가지.
비록 스탠퍼드 실험, 메소드 연기라는 말을 모를지언정, 그도 환경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순진무구하던 아이들이 황자, 황녀로서 성장하며 망나니 혹은 노련한 정치가가 되고, 그 역시 이에 해당하는 산 증인이니 부정하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말이다....
가끔은 예외도 보이더라.
“후르릅!!!”
“........”
“후릅!! 후릅!! 흐르르릅!!!”
미친 듯한 면치기의 향연.
릴리께서는 절찬리 식사 중이다.
어디에서?
마왕성 왕홀, 옥좌에서.
의자가 가로로 긴 터라 데지르에게 옆자리를 권한 릴리는 대체 왜 인벤토리에 들어있는지 궁금한 탁상을 꺼낸 뒤, 그 위로 신비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꺼낸 건 가스레인지라는 도구.
듣자하니 불을 피우는 물건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 데지르는 무언가 쌔~~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히히!! 기다려 보시게. 이 몸이 풀 셋팅이라는 걸 보여줄테니까!!”
그 다음은 노란 냄비.
요리에 대하여 1도 모르는 데지르가 봐도 이 냄비는 사용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여기저기 찌그러진 모습도 모습이지만, 문제는 색깔에 있으니.
겉은 노란색에 안은 은색.
단순히 안 밖의 색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안쪽 색이 닳아 없어진 모습이다.
데지르가 이를 지적하니, 돌아오는 답은 여기에 끓여야 맛있다는 말뿐.
엄마가 여기 끓이지 못하게 해서 버리려는 걸 몰래 겨우 챙긴 거라고 한다.
‘그러니까, 미령 씨도 쓰면 안 된다고 말한 거지?’
이건 아닌 것 같은 데지르였지만 릴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능숙하게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니, 역시 찌그러진 터라 바르게 올라가지 않고 살짝 기운 냄비.
릴리는 이에 개의치 않고 손가락을 튕겨 냄비에 물을 채웠다.
바로 뜨거운 물을 체운 건지, 불이 올라가자 마자 끓기 시작한 물.
그녀는 식재료를 꺼냈다.
문제는 그 식재료랍시고 꺼낸 게. 요상한 붉은 봉지 2개와 달걀 뿐이라는 거.
능숙하게 봉지를 뜯어 내부의 다른 작은 봉지들을 꺼낸 그녀는 각각에 2개씩 들어있는 걸 모아 4개를 한 번에 뜯는 묘기를 선보이고, 끓어오른 물 위로 그것들을 탈탈 털어 넣었다.
직후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물
칼칼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이후 봉지 내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딱딱한 면을 마저 냄비에 털어 넣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에 마녀의 수정구를 설치하기 시작.
“라면에는 넷플릭스가 진리지!”
넷플릭스는 또 뭘까.......
하지만, 데지르는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게 넷플릭스라는 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그야 마녀구슬로 비춰지는 건 수십만의 언데드 군세가 제국을 침범하는 장관이었으니까.
필시, 사역마의 눈을 수정구에 연결한 것일 테지.
‘지구에서는 언데드가 인간을 공격하는 걸 넷플릭스라고 하는 건가?’
마녀 구슬의 설치를 마치니 딱딱했던 면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이제와서 계란국을 만드냐 싶을 정도로 5개나 계란을 냄비에 때려놓고서 그녀는 뚜껑을 닫는다.
기다리는 표정이 가관.
“헤헤헤!! 냄새 죽인다......”
저런 순진무구한 얼굴을 할 수 있다니......
어린 소녀의 기대의 찬 눈빛이 마치 여동생이 화려한 보석과 드레스를 바라보는 것과 흡사하다.
저 붉은 면인지 계란국이 모를 요리가 보석과 드래스 보다도 값지다는 건가?
이후 뚜껑을 열자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바로 젓가락을 든 그녀였지만, 순간 데지를 바라보며 멈칫하더니 조용히 다른 그릇을 꺼내 데지르의 몫을 따로 덜기 시작했다.
“으.......3개 끓일 껄. 생각보다 양이 영....”
‘먹어도 된다는 건지 말라는 건지.’
심지어 계란 5개 중 1개를 줄까 2개를 줄까 한참을 고민한다.
원랜 2개냐 3개냐를 고민해야 할 텐데....
결국 눈을 딱 감고 2개를 더는데, 무슨 가족을 전쟁터로 보내는 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시작된 식사.
릴리 본인은 그릇 따위 필요 없다는 양, 냄비 채로 식사를 시작했다.
“후르르릅!!!!”
“.........”
─샥!! 샤샥!!
냄비를 마시는 건지, 아니면 머리를 냄비에 박는 건지.....
중간중간 김치라는 붉은 채소를 낚아 채는 속도가 가히 소드마스터 울고 갈 수준이다.
그러면서 면치기가 멈출 때마다 수정구로 비치는 장면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흘리는데, 결국 데지르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인간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흐릅!! 으? 하나 더 그려 주어?(응? 하나 더 끓여줘?)”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 다 드신 후 말씀하시고, 제 말부터 하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고상한 식사 예절은 귀족에게나 해당되는 거라는 걸 황태자도 안다.
그의 스승 역시 릴리처럼 시원시원하게 거리낌 없이 식사를 즐겼으니까.
아니, 물론 이 정도였다는 건 절대 아니고.....
아무튼 데지르 역시 이를 이해하는 쪽이다.
스승이 영향인지, 혼자 식사할 때는 나름 편하게 먹는 부류이고.
하지만 이건 다르지.
“여기 마왕성, 아니 이젠 마계 유일의 마황성입니다!! 당신은 제국을 침범하고 테라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마황이고!! 이건 아니잖아!!”
마치 대성통곡이라도 하는 듯한 데지르의 목소리.
여기 식당이 없냐 조리실이 없냐?
마왕성의 이름답게 모든 것이 최고급으로 갖춰진 곳이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도 옥좌라는 신성한 곳에서 이러는 건 아니지!!
국가는 달라도 엄연히 황태자라는 자리에 앉은 데지르에게는 폭발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릴리도 할 말은 있으니. 그녀는 어느새 텅텅 비어버린 냄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치만 시종인이 없잖아?”
정체를 숨겨야 하는 이유로 지금 마왕성에 거주하는 건 데지르와 릴리 뿐.
이 거대한 성을 두 사람이 쓰는 거다.
식당?
가려면 여기서 10분은 걸어야 할 껄?
그리고 요리도구 랍시고 있는 것들도 가스레인지랑 다를 게 없는데, 뭐하러 거기까지 가냔 말이다.
또한.
“우리가 왜 왕홀이 있는지 잊었어? 니가 설명한 거잖아?”
“그.....그래도 이건 아니죠!!”
“옆자리까지 양보하고, 라면도 끓여주고. 계란까지 두개나 주고. 또 심심하지 않게 영화까지 틀어서 풀셋팅을 갖춰줬는데 뭐가 불만인지......아! 이불도 꺼내 줄까?”
“아냐!!!”
데지르는 머리가 망가지는 것도 잊은 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어쩌다 이런 마황성 옥좌 히키코모리 생활이 시작되었을까.....
시간은 조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 * *
마왕성을 차지하고 수일
이제는 슬슬 마계 마황의 등장이 알려져야 할 시기지만, 마계도 제국도 여전히 무반응.
데지르와 릴리는 고민에 휩싸였다.
“어떻게 하지?”
“예상 외의 일이군요.”
마황의 이름을 알려야 하기에 우선적으로 마계에서 반응이 나올 걸 기다리고 있었껏만, 설마 이 정도로 조용할 줄이야.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한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우리는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드러난 진실.
“아나 된장!!!”
“이런.....죄송합니다. 제가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하다니.”
마왕 쟁탈전
3개의 공석 덕분에 조용할 거라 여겼던 그것이 6개가 되니 오히려 더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대충 보기로는 사실상 마왕의 위를 포기한 마족들까지 모조리 참전하여 역대급 대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
마계인들에게는 천금같은 기회.
제국에는 급한 불이 떨어진 상황.
이러니 마황이든 뭐든 간에 뒷전이지.....
난 엄지손톱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성에서 죽치고 기다릴 게 아니었어.”
물론 시간이 해결할 문제다.
마왕이 결정되면 마계인들도 줄을 타야 하니 이 사태를 벌인 최강의 마왕인 자신에게 반응을 보일 것이고, 제국 역시 자신을 주목하겠지.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그 시간이 없잖아?
아니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
“초강수로 간다. 하긴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어. 요즘 좀 피곤해서 조용히 넘어갈까 싶었는데, 내 인생이 그렇지 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대로된 깽판을 보여주겠다고. 관심 종자가 짓 좀 하고 올 게, 넌 그동안 사신단이 황실로 돌아가는 걸 막아줘.”
내 말에 데지르는 곡소리를 냈다.
아니 그걸 어떻게 하냐며, 가뜩이나 마계를 횡단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걸 하고서 사막에서 사신단을 찾아 막으라니. 무리, 이건 무리다.
하지만 내가 설마 생각도 없이 그러겠냐?
“본좌가 힘을 내리노라!!”
“그건 또 무슨 개소─ 크윽!! 이건?!!”
슬슬 내 입담을 배우기 시작한 데지르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난 코를 쓱쓱 문지르며 소리쳤다.
“융합마술 레벨 4의 힘이다!!”
이름하여 퓨전!!
무기화에서 목표로 잡았던 완전한 소환수 융합이다.
데지르를 중심으로 시작된 검은 소용돌이.
그 너머의 그의 모습이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한다.
터져나오는 피막의 날개, 자라나는 뿔, 번뜩이는 붉은 안광.....
무엇보다 친숙하며 농밀한 마력의 향기.
“쩝, 부럽당....”
정작 정식 사용자인 나보다도 훨씬 멋있는 모습에 난 입맛을 다셨다.
존재의 크기 때문인지, 난 융합을 해도 겨우 날개하나 생긴 수준이던데.....쟤는 그냥 변신이구만 변신....
갑자기 약해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근데 정작 약해지면 융합 자체를 못하니, 이 무슨 아이러니.
그사이 데지르와 용용이의 퓨전이 끝나고 그는 모습을 드러냈다.
“크으.....뭔 일을 하면 말을 좀 하고 하시지.”
“올~~~ 중2병의 감성이 물씬 흐르는구만”
“예?”
온몸에 돋아난 비늘에 세로로 갈라진 용안까지.
오른팔에 흑염룡이 봉인된 아이들도 울고갈 수준.
아직 어리둥절한 것 같기는 한데.
뭐, 상관없갰지.
어설픈 합체 따위가 아니니, 알아서 적응할 것이다.
그도 나름 젊은 나이로 소드마스터까지 오른 재능충이니까.
“알아서 사신단 좀 막아줘. 그 상태로 못하면 님 X신임.”
“얼굴은 어쩌고?!”
“여기 아무거나 주워쓰셈.”
난 인벤토리에서 코디용으로 모아둔 가면들을 꺼내 잔뜩 그에게 안겨준 후 익숙한 붉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럼 깽판치고 올 테니, 님도 열심히 부하들 배신하고 와. 씨유 래럴.”
“그걸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됩니까?!”
뭐긴 뭐야 배신자지.
이젠 돌아올 수 없다구 친구.
뭐라뭐라 소리지르는 데지르를 뒤로 하고 난 이제 내것이 된 마왕성, 훗날 최후의 마왕, 마황 아리아스트의 본성이 될 성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대한민국 관심병사의 무서움을 뼈져리게 알려주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