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슬기로운 깽판 생활 제 1단계 (2)
* * *
슬기로운 깽판 생활이라 거창하게 말했지만, 아쉽게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긴 편이 아니다.
릴리표 전화 파괴기 덕분에 시간은 벌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시간을 번 것 뿐.
황태자의 납치는 멀지 않은 시기에 반드시 제국 황실의 귀에 들어간다.
그리되면 사실상 끝
우리와 황태자가 체결한 계약의 의미가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더 나아가 샤말리아와 제국 간에 전쟁까지 번질 수도 있겠지.
그건 내가 바라는 그림이 아니다.
무릇 깽판이란 모두를 위한 숭고한 희생인데, 그렇게 되면 굳이 내가 깽판을 친 이유가 없어지지.
“그러니 속전속결로 갑니다.”
대체 이게 얼마만에 제대로 쓰는 스태프인지.....
쓱쓱 스태프를 문지르며 난 새로운 감회에 어깨에 뽕이 올랐다.
지금의 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부캐 양성을 위한 새로운 코디라고 할 수 있지.
검은 깃털 망토
칙칙한 색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로브
피부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듯한 장갑에, 까마귀 가면까지.
누가 연상된다면 그건 오해가 아닐지니, 그대의 기억력에 찬사를.
일명, 릴리 ver 아리아스타 되시겠다.
사실 전부터 아리아스타 옷이 부럽긴 했었거든.....
찐퉁 마녀스러운 분위기의 스타일 말이야.
하도 주변에서 꼬마 마녀님, 꼬마 마녀님 하니, 괜스레 반발작용인지 흥미가 가더라고.
뭐, 그래도 이렇게 완전 카피 버전을 사용한 건 사소한 복수를 겸한 행동이다.
지구를 위해 싸워온 그녀지만, 나 한정으로는 소중이를 앗아간 원수.
그러니 그녀의 모습으로 마황이 되어 난 테라에 악명을 떨칠 계획이란 거지.
취향에 따라 마황 타이틀을 좋아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으아아아!!!”
“살려줘!!!”
“저 마녀를 죽여! 빨리 죽이라고!!!”
그만큼 오랜만에 쥔 스태프였지만, 역시 효과는 발군이네.
역시 마술을 제대로 쓰려면 스태프를 써야 해.
낫을 주무기로 쓰면서 마술이란 마술은 다 휘두르는 내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지만, 이렇게 써보니 또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지.
마왕성을 가득 매운 악마들의 비명소리.
난 여유로운 걸음으로 천천히 앞으로 향한다.
막아서야 할 이들이 한 무더기지만, 아무도 내 발목을 잡지 않으니, 그야말로 주변은 한 편의 지옥도 그 자체.
검은 먹물로 그려낸 듯한 뱀, 고양이, 까마귀, 올빼미가 노니는 마왕성 앞마당은 이미 내 허락없이 삶도 죽음도 용납받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죽여!!”
“감히 한낱 마녀 따위가!!!”
“스스로 마계를 부인한 너희가 감히 마왕의 좌를 노리는 게 허락될 성 싶으냐!!!”
온몸이 검은 뱀들에게 휘감긴 체 새들에게 살점이 뜯어먹히는 악마들은 마왕성으로 향하는 나를 보며 소리쳤다.
하긴, 그러고 보니 마녀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마계의 주민이 아니라 한다 했지?
어쩌다 이터널의 원류가 되는 모리아를 멸망시키고 죽음를 뒤집어쓴 마녀가 된 아리아스타와 달리, 좋은 마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용사의 조력자 같은 이미지가 바로 테라의 마녀.
악마들의 눈에는 그동안 마계를 부인했으면서 이제와서 악 코스프레를 두르고 마왕을 노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더군다나 마왕 쟁탈전이 벌어질 시기이니, 얌쌉하게 기회를 노리는 걸로도 보일 수 있고.
그러나.
“우찌라고.”
─타각!!
경쾌하게 손가락이 튕기자, 바닥에서 올리온 검은 가시가 그들의 가슴 팍을 꿰뚫는다,
그 직후 다시 몸속에서 피부를 관통하며 돋아난 가시들.
눈을 부릅 뜬 체 경악하던 그들은 결국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하고 축 늘어진 벌집이 되어 사라지니, 난 그런 그들을 보며 조소를 날렸다.
“어따대고 자격 운운하고 있어? 누가 들으면 마왕이 무슨 명예직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저들이 충성심 때문에 마왕성을 지키는 걸로 보이는가?
아니, 절대, 네버!
저건 그냥 배고픈 승냥이 때들이다.
마왕의 수하를 자처해 마왕성 주변을 맴돌며 힘을 쌓고자 하는 승냥이 때들
목적이야 당연히 마왕 찬탈이고.
배신의 배신을 물고서라도 마왕을 노리는 게 마계인들이니.
마왕이 이들을 용인하는 것도 그리 하지 않으면 개같이 달려들기 때문이지, 충성심을 높이 사는 것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보라.
마왕성 주변에 있을 뿐, 실제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거의 없지 않은가?
나를 향해 역정을 내는 건 그저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덩이가 노리던 먹잇감을 빼앗으려하기에, 빼에에엑!!! 소리를 지르는 것 뿐.
“하여간 악마 새끼를 하는 꼬라지 하고는. 테라 제일가는 인성 터진 넘들이 무슨 말이 많아?”
내가 처음 마왕성 밀어버리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다면 아무도 내개 반박할 수 없으리라.
지하 감옥
마왕의 취향이 잔뜩 녹아든 그곳은 그야말로 내가 급하게 그린 이딴 지옥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외도, 그 자체였으니까.
신성 마술은 아니라도 나도 치료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잡혀온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개를 저었어야 했으니, 착한 어린이는 상상도 하지 말길 바란다.
“오죽했으면 이딴 미친 계획을 듣고도 데지르가 마왕성 쓸어버리는 건 찬성했겠냐? 에휴~~ 말해봐야 뒤진 넘들. 내 입만 아프지.”
그렇게 무심한 듯 벌집 시체를 지나쳐 마왕성을 향하는 발걸음.
시끄럽긴 하지만, 나오는 길은 더욱 조용해질 테니, 문제는 없다.
“여보세요. 손놈....아니지, 손년 왔으니 문 열어라~~”
문 앞에 도착해 소리치지만 여전히 거대한 철문은 요지부동이다.
역시 열어줄 생각은 없는 모양.
하.....이번에도 뚫고 가야 하는가?
소환수를 못 쓰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구만
여기서 용용이랑 카녹스만 쓸 수 있어도 투 탱커를 앞세워서 그대로 밀어버리는데.
“쩝, 오랜만데 직접 고생도 좀 해야지. 부캐 육성 노가다!! 파이팅!!”
부캐를 키우는 건 노력이지!
이게 다 돌아와 본캐의 스팩이 되어줄 것이다.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난 다시 스태프를 들었다.
“플람마 하울”
* * *
“다시봐도 엄청나군......”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마왕성을 바라보는 데지르는 압도적 장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갈라진 대지에서 샘솟는 용암이 마왕성을 흔적도 없이 지워내는 모습.
이번에도 마왕이란 놈이 어지간한 개자식이였던 모양이다.
나름 성은 온존하자, 쓸려면 아껴야 한다 주의였던 그녀가 단 한번도 자기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에, 데지르는 이해가 가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오르리안, 제국 1검이랑 비교했던 게 엄청난 무례였겠어.”
나름 자신은 최고의 평가를 했었다 생각했지만, 상대는 시험을 넘어 아예 문제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는 수준이었던 셈.
그녀의 힘은 압도적이였다.
마왕성을 무너트린 거?
그건 그냥 거인의 발걸음일 뿐이지.
자신들은 그 발자국을 보고 거인의 힘을 예단한 것이고.
원근 마술이 새겨진 안경을 벗으며 데지르는 고민에 잠겼다.
“어쩌면.....진짜 가능할지도?”
처음 그녀의 계획을 들었을 때, 그는 미쳤냐며, 무례조차 잊고 고함쳤었다.
그게 가능할리도 없으며, 제국의 눈을 피해, 스스로 마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존재를 연기하기 위해서, 소환수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
실질적인 그녀의 힘이 소환수로부터 비롯된다 생각했던 데지르는 소환수가 있어도 불가능할 일이라며 결사 반대를 외쳤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까보니 이건 뭐, 주인이 소환수를 씹어먹는 수준 아닌가?
저렇게 강하면 대체 소환수가 왜 필요한 건지......
뭔가 일이 잘 풀리면 정말 그녀의 말대로 제국도 청소하고 골치 아팠던 알브 헤임, 무림 문제까지 싸그리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데지르는 서둘러 품의 지도를 꺼냈다.
“오늘 정리한 마왕성만 3체. 남은 하나는 그 스컬 드래곤을 탈 수 없으니, 내일이야 가능하겠어. 하! 마왕성 정리하는데 이틀이라니, 기가막힌 노릇이네.”
그동안 교단의 용사들은 반성해야 한다.
마녀 하나가 이토록 일을 잘하는데, 지원이란 지원은 다 받아가면서 설치는 용사들은 왜 그 모양 그 꼴인지.
저 무너진 마왕성만 해도 300년이나 건재했던 성이거늘.
품에서 팬을 꺼내 이곳 마왕성에 X표시를 남긴 뒤 다시 집어 넣고. 그는 바닥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내일 남은 하나를 정리, 어느 정도 마황의 이름을 알릴 시간이 필요하니, 그건 이틀에서 3일정도 분배하면 남은 시간 약 1주일 남짓인가?”
납치 당했으면서 최대한 제국이 이를 최대한 늦게 알아주길 바라는 아이러니.
그럼에도 황태자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시간이 부족해. 마계가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어. 중간에 황실로 달려가는 신하들을 막기라도 해야 하나?”
자기 구하겠다 설치는 수하를 직접 잡야 하나 고민하는 황태자라니.
수하들이 들었으면 뒷목을 잡았을 것이다.
그도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긴하지만, 그럼에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팔짱마저끼며 고민하고 있는 것
그러는 사이 어느새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러왔다.
“야 바닥에 앉아서 뭐하냐?”
“아, 오셨습니까?”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가면을 벗어 내려놓는 릴리
표정은 여전히 승전보를 울린 장군과 거리가 멀다.
필시 이번에도 유괘하지 못한 걸 잔뜩 봤기 때문이겠지.
데지르는 그녀를 향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하 감옥은 마왕성의 전통이죠. 마기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이를 전부가 살육에 무감각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이코 같은 것들. 뭐, 내가 한 짓도 있으니, 난 뭐라 말 못하겠다. 니가 내 몫까지 나중에 까.”
“이번에도 똑같이 처리하고 오셨습니까?”
“지금은 별 방법이 없으니까. 마황이 마계에 사로 잡힌 노예들 줄줄 끌고 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일의 대소사는 구분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릴리의 모습.
데지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이다.
용사와는 다르다.
마냥 정의의 불타지 않고, 공과 사의 구분은 철저하게.
그렇다고 마냥 잔인하단 의미는 아니니. 그녀가 한 처리는 죽였다는 게 아니라.
적당히 며칠간 버틸 식량과 응급처리 용품들을 던져준 후보호 장벽을 걸어주고 나왔다는 것.
마계의 노예라고 해도 마왕성에 잡힌 이들이라면 필시 내부에 마왕의 수급 찬탈을 도전해본 자들도 있을 테니, 알아서 회복하고 알아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조치이다.
뭐, 이미 그런 자들 다 죽었을진 모르지만, 식량을 던져놨으니, 일이 끝날 쯤 다시 찾아와 구해줘도 늦지 않을 테고.
“마지막 한 개 남았네,”
“마황이라.....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습니까? 참.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 없는 단어를 생각해내신 건지.”
“왜? 무림에서도 쓸 껄?”
“황과 제는 무림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자입니다. 그런 별호를 함부로 쓰면 바로 목이 날아가요.”
“어라? 내가 알던 무림이랑 좀 다른 느낌인데.....”
아직 지구가 무림이랑 만난 적도 없는데, 무슨 알던 무림이란 말인지
턱을 집은 체 고민하는 릴리를 보며 데지르는 고개를 흔들고는 서두를 것을 요청했다.
“가시죠. 그래야 내일 쯤 마지막 마왕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아, 그리고 내일 마지막 마왕성은 절대 부수면 안 됩니다. 화가 나도 참으세요”
“늘 참고자 합니다만.....”
“무조건 참으세요. 마황이 성도 없을 셈입니까?”
응당 마왕도 성이 있는데 마황도 성이 있어야지.
이런 저런 조언 같은 잔소리 같은 말을 늘어놓는 데지르의 모습에 릴리는 '뇌에, 뇌에' 하는 늘어지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이에 이자쳐서 날아오는 잔소리는 피할 길이 없었고.
어느샌가 더 진지해진 건 데지르라는 사실을 둘은 자각하지 못했다.
릴리의 슬기로운 깽판 생활
제1 프로젝트 마황 탄생.
1일차 마왕성 3체 함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