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문화 교류 (깽판) (6)
* * *
제국 황태자, 데지르 알 카이사르
발할라 이사 겸 특사 대표, 나, 릴리 아스트레아스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이번 사단은 서로의 무례에 대한 사죄를 교환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
황태자는 고개를 숙이며 여성에게 해선 안 될 무례를 범했음을.
엄연히 발할라의 대표로 이곳에 온 날 무시하는 언사를 벌였음을 시인하며 정중하게 용서를 구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비록 그의 언사에 문제가 있긴 했어도, 악의가 없었던 행위에 지나친 대응을 보였음을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고 서로 좋게 좋게 끝났으면 더 없이 좋았을 텐데. 이런 내 맘을 몰라준 주변인들이 문제였지.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거든.
아버지,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황태자를 찾아가 조져버릴 기세고, 소라는 어디서 들고 온 건지, 그와 만나는 자리마다 연장부터 챙기고 있으니, 할 말 다 했지 뭐.
민준이랑 연희도 기분이 언짢다는 걸 팍팍 티 내는 중이고.
별무문이나 그 밖에 따라온 사람들도 마찬가지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본인들도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영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제국도 다르지 않아.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다고 해야 할까?
우리야 서로 잘 아는 사이이고, 기본적인 직책에 대한 구분은 있어도 상하관계는 아니기에 내가 직접 설득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니니까.
우리에게는 황태자의 면상이 걷어차인 사건이어도.
저들에는 고귀하고 존엄한, 훗날 제국의 태양이 되실 황태자의 옥안이 걷어차인 대사건이다.
이게 잘못 돌아가면 자기들 목도 떨어질 판국이니, 분위기가 좋을 수 없었지.
나름 황태자는 잘 말한 것 같아 싸움판이 나는 일은 없었지만, 우리들을 볼 때마다 완전 고슴도치 마냥 가시를 팍팍 세우는 모습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는 회담이고 뭐고 아무것도 진행이 안 될 상황.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와중, 황태자가 말했다.
액션이 필요하다고.
은유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음을.
황태자도 나도 잘 완만하게 해결봤다는 걸 보여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하네.
하여간 귀족이란 양반들은 피곤해.......
뭐가 좋냐고 물으니, 그가 제안한 건 조촐한 파티.
거기서 춤이나 한번 추자네.
이게 또 개수작 부리는 건가 싶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니, 고개를 휙휙 저으면서 절대 아니라고는 하는데. 여간 보통 의심스러워야지.
뭐, 알리샤도 그게 맞다고 하여 결국은 승락했지만.
그렇게 알리샤는 기회를 봐서 회담 끝나가는 타이밍에 작은 모임을 제안했다.
서로 이야기도 주고받고 친교도 쌓을 겸, 좋지 않겠냐며
양측 모두 그게 무슨 개소리냐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는데, 우리가 후다닥 선수를 쳤지.
동의한다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국 스타일로 조촐하게 가자
저명한 음악가는 이미 데려왔다.
그럼 자리는 우리가 마련하면 되겠네.
요리도 우리 측에서 준비하겠다.
우리도 제국 요리를 대접하고 싶으니 함께 하겠다
등등
속사포처럼 끼어들 틈도 없이 진행해 버린 대화에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짓고, 그렇게 다음 날 열린 가벼운 파티.
음악에 맞춰 힘겹게 난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으......설마 내가 살면서 남자 손을 잡을 날이 오다니......
시X 허리에 손 올라갈 때는 진짜 기겁해서 확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뻔한 겨우겨우 참았다.
춤은 언제 연습했냐고?
뭐, 별 거 없던데?
그냥저냥 했지.
아, 키 차이 나서 좀 힘들긴 하더라.
뭐 같은 힐 신으면 내 키가 그나마 황태자라는 양반 명치까지는 가서 망정이지. 에휴~~~ 짜리몽땅의 서러움이여.
솔직히 모양 빠지는 그림일 거 같아 느낌이 별로였는데, 또 다른 사람이 보는 건 다른 가봐.
다들 우리만 보는 거 있지?
어그로 수치가 MAX 점을 초월하는 걸 제대로 경험했다.
그렇게 춤이 끝나고, 노래가 끝나고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진짜 효과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조금씩이지만 경계가 많이 풀린 거야.
덕분에 이어지는 회담은 그야말로 순풍 궤도
막혔던 부분도 쫙쫙 밀어지고, 어느새제국과 발할라의 동맹 얘기까지 나오는 수준이니, 춤 한 방이 그렇게 효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 난 평생 귀족이란 존재를 이해할 날이 오지 거야.
뭐, 그래도 잘 된 일이지만.
메데타시 메데타시~~~~
라고 할 줄 알았냐?
“어.....언빠 설마?”
“딸아......어...엄만...”
“크흑!!”
“제발 지랄하지 맙시다. 이제 나도 좀 쉬자고!!!!”
뒤에서 수근수근 거리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눈물 콧물 다 짜내는 부모님에 해탈이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의 소라.
여기서 끝이면 다행이지.
“야! 너! 내가 이러라고 꾸며준 줄 아냐?!! 이건 배신이야! NTR이라고!!! 젠장!! 미리 혼인 신고서에 도장을 찍어두는 건데!!!”
아직 테라와 지구를 연결하던 진지에 남아있던 예지는 나대면 안 된다는 사항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건지, 날개까지 펼쳐 날아와 내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며 통곡했다.
“이런 게 어딨어!! 이런 게 어딨냐고?!! 아직 안 늦었어!! 내가 먼저 도장 찍으면 그만─”
“언빠는 내꺼야!! 으아아앙!!!”
“여보 사위 될 개새.....아니지 놈 얼굴 좀 보고 올 게.”
“저도 같이가요.”
“와~~~ 유리 누님이랑 성환이 형 결혼 할 때도 대단하다 느꼈는데. 이건 그냥 래전드네.”
“눈치없게 왜 그래요. 이럴 때는 가만히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거라구요.”
설마 제국 측에 평화를 선물하고 내가 이런 개똥을 받을 줄이야.
역시 세상 뜻대로 풀리는 거 하나 없다던데 사실인가 보다.
부들부들 어깨를 떨던 난 이내 몸을 축 늘어트리며 모든 것을 체념하든 하늘을 향해 폭소했다.
“하하하!!!”
젠장
젠장
제에엔자아앙!!!
“오늘 나 빼고 다 같이 죽자.”
지금 나 강릴리의 좌우명이 정해졌다.
그냥 살던데로 살자.
인벤토리에서 조용히 낫을 꺼내 날을 돌려 봉으로 전환
난 모두를 설득(물리)하기 시작했다.
* * *
“어제 상당히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 있었는가?”
“아니, 그냥 오랜만에 운동을 좀 해서.”
“그래? 으음......”
홀짝 홀짝 서로 커피와 홍차를 나눠마시는 나와 알리샤.
우리는 앞에 가벼운 티타임을 즐기며 어제까지 오갔던 제국과의 회담에 대해 이야기했다.
“잘 풀려서 다행이군, 의외로 외교에도 재능이 있을 수도 있겠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
“처음 한 것 치고는 결과물이 좋은 건 사실이지 않나? 물론 그대가 한 고생도 고생이지만, 고생을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인 걸 고려하면, 재능이 있을 수도 있지.”
“다 때려쳐. 안 해. 절대 안 해. 또 시키면 바로 낫부터 꺼낸다.”
이 짓을 또 한다니.
꿈에 나올까봐 두렵다.
역시 사람은 하던 일을 하고 살아야 해.
난 마술 서적이랑 마도구나 쪼물딱 거리고, 짜증나는 넘 나오면 나가 싸우는 담당이지, 이런 걸 할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뭐, 두고 볼 일이지.”
“아 쫌!”
“아무튼 제국과는 이야기가 잘 끝나서 다행이군. 솔직히 무림의 일도 있고 해서 무력적인 부분에 대한 논의가 오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는 게 의문이다.”
“그건 황태자랑 따로 얘기했어, 마냥 무림이라고 우리가 줘팰 수는 없잖아? 비공식 지원 정도로 합의했지.”
무림이 어떤 이유로 테라를 노리는 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렇기에 무분별한 지원을 약속하는 건 우리로서 곤란한 사항.
황태자는 이를 인정한다며, 그렇다면 곤란하지 않을 선에서 지원을 부탁했다.
애초에 이건 황태자의 입지가 걸린 사항이니, 그 편이 황태자 입장에서도 좋고.
“내가 가기로 했어. 얼굴은 가리고.마술이야 공용 쪽으로 돌려쓰면 아무도 모르거든. 소환수도 못 쓰는 건 좀 흠이지만. 그렇게 하면 황태자가 개인적으로 영입한 마녀라고 퉁칠 수는 있으니까. ”
“과연납득했다. 황태자가 충분하다고 생각할만 하군.”
고작 수일 만에 마왕성을 3체나 함락시킨 마녀의 지원이라면 차고 넘칠 것이다.
“대신 마계 일은 우리가 확실히 처리하기로 했지. 근데 이것도 꼭 그래야 하나 싶더라.”
“응? 그게 무슨 말이지.”
“마왕의 자리는 군주와는 다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명예. 마계의 존재들의 목표같은 거라고 알려져 있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뭐?”
우수한 정보의 질을 가진 제국에서도 파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최신 정보.
처음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명예직에 따위에 지랄 발광하는 것도 이상했고, 마왕이 반드시 7명으로 고정된 것도 이상했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제국이 오랜 기간 마계를 조사하며 알아차린 사실은 의외로 단순하면서도 놀라웠다.
“마왕이란 이름은 의미가 없는데, 마왕성이 의미가 있더라고.”
일종의 레이 라인.
마계의 흐르는 마기가 뭉치는 특별한 일곱 장소가 있는데 그게 지금의 마왕성이 세우진 위치라고 한다..
덕분에 마왕성에 항상 머무르는 마족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강해는 해택을 누리며 수명 또한 연장되는 효과를 본다고
더욱이 마술을 사용하는 마왕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환경.
아크 리치가 마왕의 자리를 많이 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드시 7개의 권좌만이 존재하던 이유도 결국 마왕성이 7개였기 때문.
“과연 그렇다면.”
“어, 이번 마왕 쟁탈전. 의외로 피해가 없을지도 몰라.”
우리는 1, 2, 3위를 가리는 대전쟁을 예상했지만, 실상은 3개의 토지를 나눠먹기 위한 영역 싸움.
즉, 오히려 3갈래로 갈라져 분산된 소규모 전쟁이 될 확률이 높다는 소리다.
이를 들은 알리샤는 자기들도 마계에 대한 신경을 놓을 수 있어 안심이라 말하면서도 작은 의문을 피웠다.
“그럼 제국은 왜 그렇게 놀라서 여기까지 온 거지?”
“나 때문이지 뭐.”
“아......마왕성을 무너트린 장본인을 보고 싶었다는 건가.”
“그것도 있고, 좀 더 나아가. 마녀의 소행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하다러고.보니까 관측기 성능의 의외로 좋았지.”
아마 3번째 였을 것이다.
내가 목을 떨어트린 마왕.
그와의 전투에서는 진짜 제대로 빡쳐서 용용이 머리 위에서 마술을 작정하고 펼쳤는데, 아무래도 그걸 본 모양이다.
머리에 이런 꼬깔 모자를 쓰고 마술을 난사하는 존재가 마녀 말고는 따로 없으니.
샤말리아의 마도구에 익숙해져서 미쳐 내가 제국 클라스를 몰라봤던 것이다.
“그만한 대마녀와 마계의 충돌, 이를 잘 활용하면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이번에 도움도 거절해버린 마녀들을 설득할 수 있는 패가 될거라 기대했데.”
“아쉬워겠군, 마녀긴 마녀이나, 그대는 이방의 마녀니까.”
지구의 마녀라면 나도 설득할 수 있는데 라 말하면 난 키득키득 웃었다.
알리샤도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찾잔을 들었고.
“그래도 내가 돕잖아? 이거면 소정의 성과는 거둔 거 아닐까?”
“그들은 소정의 성과라고 생각하겠지.”
실상은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전략 병기를 손에 넣은 거지만.
사실 안다고 변하는 건 없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정체를 다 들켜가며 전력으로 도울 일은 없을 테니까.
소환수도 안 쓸 거고 적당히 조절도 할 계획.
“이제 알브 헤임만 남았군. 제국은 좀 빨리온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알브 헤임은 오히려 늦는 느낌이야.”
“황태자는 알브 헤임과 우리의 회담이 끝난 뒤 경과를 보고 돌아갈 생각인가 봐.”
알리샤는 그걸 거 같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는 무언가 입을 다시면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릴리.”
“응? 갑자기 왜 그래?”
말을 걸면서도 아직도 망설이는 알리샤 모습
난 다시금 홍차를 홀짝이며 천천히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생각이 정리된 것이니 입을 여는 알리샤.
“알브 헤임은 여러모로 많이 다를 거다.”
“그렇겠지. 우리도 걔들 조사 많이 했어.”
성격 더럽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
순혈주의라고 했나?
뭐, 시끄럽긴 하겠지.
특히 어머니나 소라가 조사에 들어가면서 쳤던 구라가 있으니, 어느 정도의 다툼은 고려한 사항이다.
난 피식 웃으며 설마 그게 걱정이냐는 듯 알리샤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고민하고는 말했다.
“조언을 하나만 하지.”
“귀담아 듣겠습니다.”
“안 될 것 같으면 귀를 닫게.”
“예?”
“입도 닫아. 대화를 끝내고 미련을 가지지 말게. 알브 헤임은 그런 존재들이야.”
의미심장한 알리샤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귀쟁이 요정님들
그들은 어쩐 자들일까.
부디 사건 사고만 적게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양심있게 ‘없게’가 아니라 ‘적게’라고 했으니 들어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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