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다크 엘프의 숲 (6)
* * *
순식간에 들킨 사역마에 의해 모두는 당황했다.
성환이는 혀를 차며 아쉬운 기색을 토로했고, 연희와 민준이는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싸매는 모습.
그러나 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야, 아직 링크 안 끊겼어.”
“뭐?”
“그럼....”
“어, 이거 그냥 사역마 잡아서 눈만 가린 거야.”
왜 일까.
이런 실력자가 고작 사역마 하나를 부수지 못할리가 없고, 그렇다고 눈을 가리고 있는 건 무슨 저의지?
이대로 사역마를 해제해야 하나 마나 망설이는 사이.
조금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결된 사역마로 부터 묘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귀여운 장난은 치는군.]
방금 사역마를 낚아챈 이로 추측되는 여성의 목소리.
근엄하지만, 그 안에는 인자함과 부드러움이 섞여있다.
[라그나가 서둘러 오긴 했지만, 이런 사역마 하나를 못 알아 챌 정도는 아닌데......사역마 수준을 보니 알겠어. 술자가 상당한 실력자군. 이 정도를 고작 감시용으로 쓰는가?]
옅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역마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양이다.
여전히 수정구는 암흑이지만, 시야가 움직이는 건 느껴지네.
성환이와 난 잠시 눈빛을 교환
고개를 끄덕이며 연결된 심령을 오히려 강화한 후 목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이 정도는 기본이지.”
[으음? 성능도 뛰어나네. 짐작은 했지만, 말도 전달할 수 있는 건가?]
“댁들은 우리 조사대 데리고 쪼물딱 쪼물딱 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도 얻었고, 또 우리 진지 위치도 아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이 정도는 애교지.”
[이해한다. 서로 입장이 있으니 이 정도 정보전은 기본 중에 기본일 터. 서로 가벼운 인사 수준이겠지.]
“알아주시니 고맙네. 대족장님”
내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왜 날 대족장으로 생각했는지 들어봐도 되겠나?]
“감”
정확히는 지금 사역마를 굴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잔향.
그리고 우리 수준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는 속도로 사역마를 잡은 실력을 근거로 한 감이지만.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또다시 사역마를 어딘가로 옮기기 시작했다.
단지, 의문인 건 옆에서 라그나가 뭐라 만류하는 말을 내뱉고 있다는 점.
그녀는 괜찮다 말하며 역으로 라그나를 물리고, 사역마를 어딘가의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자, 이러면 내가 보이나? 이쪽에선 그대를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
확 밝아지는 화면과 함께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미녀가 등판했다.
온갓 신비로운 문양이 각인된 의자 위에서 양손을 깎지껴 모은 자세로 앉은 다크 엘프.
라그나와 다르게 흑발이지만, 윤기는 이쪽이 더 어나더 레벨이다.
누가 보면 비단 실인 줄 알겠네.
더군다나, 저 얼굴은 거의 조각을 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우리들의 얼굴보다도 한끝발 위를 달리고 있으니
예쁜 사람을 보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의 미(美)가 그곳에 있었다.
[음......답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한순간에 침묵이 된 일동이 겨우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흔든다.
이 정도면 거의 매혹을 패시브로 달고 다니는 수준 아니냐?
저쪽에서 이쪽을 못보는 게 다행이다.
그랬으면 상당히 민망한 추태를 보일 뻔 했으니.
“그........미인이네....”
[서로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잘 느껴지는 인사군. 이방인, 한 가지 테라를 살아가는 작은 지혜를 알려주지. 엘프든 다크 엘프든 외모에 대한 칭찬을 그리 기분 좋게 듣지 않는다.]
“어........왜?”
[라그나에게 듣기로는 그대들은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인간 기준으로 엘프 중에 미남, 미녀가 아닌 자가 있나?]
“없지.”
[그럼 그게 우리에게 칭찬으로 들릴 것이라 보는가?]
나와 일행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과연 이게 오리지널, 태생 엘프가 느끼는 관점인가.
우리들은 엘프라고 해봐야 공상의 존재, 혹은 어머니라 소라처럼 엘프로 변한 자들이 전부다.
즉, 엘프 = 엄청나게 아름답다! 라는 공식
그러나 태생 엘프가 느끼는 건 전혀 달랐다.
[우리가 인간에게 받는 외모에 대한 칭찬은 ‘내가 너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정도의 의미일 뿐. 이젠 너무나 잘 알려진 상식이라. 오히려 인간들도 잘 쓰지 않는 말일 정도지.]
“하나 배우고 갑니다.”
[호~~ 잘 배우는 학생은 싫어하지 않아. 뭐, 이런 장난을 치는 학생은 싫어하지만.]
카메라를 건드리듯 사역마를 한번 툭치는 그녀의 말에 우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즉, 조금 전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이런 감시가 달갑지는 않았다는 의미겠지.
당연하지만, 우리도 이해한다.
세상 어느 멍청이가 감시를 달갑게 받아들인다고.
보이진 않겠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이렇게 시답지 않은 잡담이나 나누려고 얼굴까지 밝히신 건 아닐텐데?”
[시답지 않은 건 아니지, 내 입장에서는 아크 리치와 고대종이라 불리우는 카오스 엘프를 다루는 술자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었는데.]
“뭐?”
[놀라는 게 의문이군.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닐텐데 말이야. 아크 리치나 카오스 엘프나 자아를 가지고 자립할 정도의 최상위 언데드이기는 하나. 그들이 인간, 아니 살아있는 무언가와 함께할 리가 없다는 건 상식일텐데?]
그러니 그들을 다루는 네크로맨서가 존재한다는 게 아니냐 그녀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사도 알아치리지 못하고 상호 실시간 대화까지 가능한 고성능 사역마를 다루는 술자가 나왔다?
거기에 라그나에게 듣기로는 그곳에서 마술사라 보일 만한 건 나 말고는 없었다고까지 했으니.
그게 너가 아니냐는 것.
당연히 상당히 많은 구멍이 존재하는 추측이기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우리지만, 그녀는 심플하면서도 당당하게 내가 써먹었던 말로 되받아쳤다.
[나도 감이지.]
“하!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네.”
[이 자리에 앉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우리 일족은 용병 일족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감이 명줄을 늘어트려준 경험이 적지 않은 만큼, 감에 대한 신뢰는 그대들 보다 크다 장담하지.]
작은 미소와 함께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우리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알리샤.
그녀는 차라리 잘 되었다며, 바로 이 자리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종용했다.
[멀리갈 필요 있나? 이렇게 서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충분할 터.]
“어......댁은 대족장이시지만, 우리는 대표가 여기 없는데?”
[상관없다. 최상위 아크 리치와 카오스 엘프를 다루는 술자라면 응당 그에 합당한 지휘 또한 가지고 있을 터. 충분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겠지? 라그나에게는 별다른 권한 없이 왔다고 하던거 같던데,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뭐, 그렇긴 하지.
이런 미지에 세계에 오는 사신단이 재량권이 없다니.
넌센스잖아?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
그러나 동시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나 같은 마술사가 흔해 빠졌으면 어쩌려고?”
[아크 리치가 흔해 빠졌으면 애초에 우린 서로 대화를 나눌 위치가 아니란 거겠지.]
“그거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어? 알아?”
[아크 리치로 대뜸 해골벽을 세운 이가 할 말은 아닌 거 같군. 선천포고였던 건 아닌 거 같던데.]
“그건 효율충의 미─ 윽!”
바로 반박하려는 내 말은 성환이의 허벅지 꼬집기 신공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 뒤로 잠시 침묵이 지나간 우리
성환이는 자세를 고쳐잡고 내 옆으로 다가왔고, 민준이와 연희는 막사 밖으로 향해 게이트 넘어의 예지에게 이번 일을 전하기 위해 즉시 출발.
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는 좀 시간 아깝긴 했어. 우리가 좀 바빠서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봅시다. "
[서로 마음이 맞으니 다행이군,]
* * *
─화르륵!!
잿빛 불꽃에 휩싸여 사라지는 사역마를 확인하고서 알리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후우......생각보다 대화가 길었군”
하지만 말과는 반대로 알리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으니.
생각 이상으로 회담이 수월하게 흘러갔다.
사실 아크 리치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토록 교양있는 존재들일 줄이야.
어디 대뜸 칼빵부터 들이미는 무림이라던가 무림이라던가 무림과 너무나 딴판이지 않는가?
“너도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라그나.”
“죽여주시옵서서!!”
“후훗, 죽이는 건 아까우니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지옥 훈련으로 대신하마.”
사역마를 끌고 온 게 그리 죄송스러울까.
나름 회의가 짧지 않았는데, 그때부터 바닥에서 이마를 때지 않고 있다.
뭐, 잘못한 일이기는 한데, 알리샤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상대 술자가 너무나 뛰어났던 것 뿐. 자신이 아니면 누구든 알아치리지 못했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여기 들어오기 전 검문을 했던 이들에게 죄를 물어야 할 일이지.
“얼른 고개를 들어라. 잠시 산책이나 하자꾸나.”
팔 걸이 손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알리샤는 라그나를 지나 천막의 천을 치우며 밤의 공터를 걷기 시작했다.
이에 우르르 달려오는 전사들을 한 손으로 물리고, 라그나 만이 그녀를 따라 걷는 사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별들.
사막의 밤은 마도구가 있어도 어두우니, 자신들에게는 저 별이 항상 갈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었지.
“뭐, 무림 따위 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양있는 자들이긴 했으나, 원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지.”
“교두보......저희를 테라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틀리지 않다. 테라의 정세, 문화 각종 사건 등과 같은 정보부터 시작해서 기반이 되는 땅까지 전부 원하는 모습을 보면 틀림없지.......뭐, 교양있는 이들 치고는 바라는 건 좀 많은 편이기는 하구나.”
그러나 불만은 없다.
많은 걸 원하는 자는 강도일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그건 고객이니까.
그것도 손이 아주 큰 고객이지.
제국이나 알브헤임처럼 싸가지가 없지도 않았고.
최소 무림 때와 비교하면 너무도 순조로운 출발이다.
하지만 라그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이 맴돌고 있으니
그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어럽사리 입을 열었다.
“저......대족장”
“응? 네가 그런 얼굴은 하다니.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기분이 좋으니 어서 말해보거라.”
“그럼 외람되오나. 질문드리겠습니다. 어찌하여 이방인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신 겁니까?”
라그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알리샤에게 물었다.
알리샤가 이방인들에게 원한 것.
그건 땅이었다.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그 어떠한 물건도, 금도 원하지 않고 오로지 땅을 대가로서 원한 것.
“왜 그게 의문인 것이냐? 우리가 사막을 떠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넌 잘 알지 않느냐?”
“그러나 거긴 결국 이방인의 세계, 테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어쩌 저희가─”
아무리 사막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테라에서의 이야기다.
이방인의 세계라니, 문화도 무엇도 다 다를 게 분명하지 않은가?
비록 사막이기는 하나, 제국와 알브헤임과 어떻게 쌓아온 관계인데 그걸 모조리 버리고 간다는 것이 이방인의 세계라니.
하지만 알리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라그나......이곳도 그곳도 다르지 않다.”
“예?”
손을 뻗어 별자리를 지침으로 북쪽을 가리키는 알리샤는 말했다.
“저기 북쪽으로 가면 제국이 있다. 저들은 우리를 어찌 대하느냐?”
“......”
“남동쪽으로 향하면 세계수가 나오지. 넌 살면서 그곳을 방문해본 적이 있느냐? 난.....없다. 아크 리치와 싸워 저들을 구했던 그때도 불가능했지.”
제국과 쌓은 관계?
알브헤임과 체결했던 계약?
모조리 의미없다 알리샤는 말했다.
어차피 형편 좋은 구실일 뿐이니, 두 대국이 이곳으로 오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의 힘. 그리고 이곳을 차지한 후 막아야 하는 마계와의 국경 때문일 뿐.
그런 관계가 없어도 두 대국은 어차피 마계 때문이라도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었다.
“무림은─”
“더하지, 고작 피부색, 머리색이 다르단 이유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 자들인데. 그래, 처음에는 우리과 관계를 맺은 자들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황실과의 일로 깨달았지. 그저 이익을 위해서 다른 척 하고 있었을 뿐이란 걸 말이야.”
어떤 의미에서 알브헤임보다도 더 경멸적인 시선을 보내는 게 무림.
이곳에 방문한 자들이 조금 달랐을 뿐. 그곳은 인간도 아닌 종족이 살만한 땅이 아니다.
“라그나, 난 꿈을 이룰 것이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꿈을. 역대 모든 대족장들이 실패했던 우리의 원대한 염원을.”
비록 그곳이 테라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말한다.
다크 엘프는 사막의 엘프라고.
그 말을 들은 자신들은 작은 미소를 짓지.
그나마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니까.
친한 이들이 불러주는 말이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알까?
그게 얼마나 자신들에게 슬픈 단어라는 걸.
은발의 머리는 세계수라는 하나의 나무의 가호를 잃은 증거일 뿐이지, 대자연에 사는 정령의 가호를 잃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근육도, 휘두르는 창도 그저 턱 트인 사막을 살아가기 위해 들고 익힌 무기일 뿐.
활을 들었던 좋은 눈도 여전히 자신들에게 살아있는 상황.
“라그나 난 일족에게 다시 숲을 줄 것이다. 우리 다크 엘프가 살아갈 수 있는 숲을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