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다크 엘프의 숲 (3)
* * *
“하아........”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는 라그나.
이방인들
말을 계속 이렇게 쓰니 구분하기가 조금 곤란하군.
무림 쪽 사람들은 이제 이방인이라고 하지 말자.
대족장께서도 그러셨고, 확실히 무림 쪽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건 이제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니까.
벌써 무림과 테라가 연결된 지도 몇십년,
심심하면.....까지는 아니어도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서로 왕래가 가능한 곳에서 온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
같은 세계에 있으면서 구경도 못 해본 알브헤임의 세계수보다 이제는 가끔 일로서 찾아가는 무림이 더 친숙할 정도니까.
“그러니 이제 저기서 넘어오는 자들이 이방인이겠군.”
사막에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막도록 설치한 막사에서 라그나는 저 멀리 보이는 문, 게이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족장께서 하사하신 임무.
저 문 너머로 오는 존재들을 환영하고 우리 측으로 데려오라는 것.
뭐, 그렇다고 마냥 상대가 호의적으로 나올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다.
엄연히 자신들은 저들의 조사대의 절반을 붙잡은 상태니까.
그를 염두해 두어 충분한 수의 부하들과 함께 이번에 직접 데려온 전사들까지 여기저기 따로 설치한 막사에 포진한 상태.
그렇다고 무작정 싸울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것이다.
단지.....라그나 개인으로서는 이번 임무가 썩 달갑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족장께서 피곤하신 게 틀림없군.”
무림 쪽의 약제들 중에 피로회복에 좋은 것들이 제법 많다고 했었는데, 저번에 좀 구해올 것을.
지혜롭고 강인하시며 위대하신! 그래, 새롭게 배운 단어, 천외천이신 대족장께서 어찌 그런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단 말인가?
남겨둔 이방인들이 한 소리가 하도 허황된 이야기뿐이라, 그는 대족장께서의 설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찾아가 직접 묻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더더욱 커진 의구심 뿐.
자기들이 마왕을 몰아낸 용사의 동료라나 뭐라나
거기에 동맹국에서는 어둠의 정령왕을 쓰러트렸고.
이웃 나라에서는 용제와 사흉을 무찔렀다고 한다.
단어의 문제에서 약간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들이 부르는 마왕이 색욕의 군주라는 점.
어둠의 정령왕이 자신들이 아는 델 피아스고, 사흉이 불멸의 군주라는 건 확인되었다.
그럼 용제도 자신들이 아는 그 오만의 군주라는 말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도 어이가 없어 라그나는 옆의 부하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역시 자신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답변.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도 신문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말하던 꼴이 꼭 살기 위해 뭐라도 지껄이는 겁쟁이들이 더군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단지, 대족장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뿐.
부하로서 불충이다.
언제나 변치 않을 자세로 그분을 모셔야 할 자신이 이런 생각을 품다니.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아시는지 확실히 납득가도록 설명은 해주셨다.
그들이 말한 시기와 군주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던 시기가 일치하고.
또한 군주들 모두가 현재 활동을 자제하며 세력을 응축시키고 있다는 걸 근거로 말씀하셨지.
근데 라그나로서는 그래도 납득되지 않는다.
이에 부관으로 따라온 셀피네는 별 문제 있냐는 듯 라그나를 다독였다.
“어차피 대족장께서도 밑져야 본전이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거기에 지금 저희 상황도 여의치 않고.....”
“그래, 그건 그렇지.”
사실 방금 셀피네가 말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밑져야 본전.
그리고 여력이 없다.
무림에서 일어난 황궁의 움직임에 제국과 알브헤임이 격동하는 지금.
한 줌의 전투력이라도 아껴야 하는 시기이니.
더불어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은 항상 조심스러운 법.
조사대랍시고 온 자들을 이렇게 까 내리고 있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 자신들 기준이지, 완전 무능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고심하는 사이 어느새 셀피네의 옆에 한 소녀가 다가오니.
셀피네의 쌍둥이 여동생 셀라였다.
그녀는 옆에 세운 창으로 바닥의 모래를 휙휙 저으며 셀피네를 향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난 대족장님 의견에 찬성이야, 싸우기 싫어.”
“나도 싸우기 싫은 건 동의하는데, 넌 다른 사심이 느껴진다?”
“그.....그게, 이방인들 입고 있는 것들 엄청 좋아 보이더라고, 언니도 봤잖아. 그 창. 무슨 돼지 목에 진주냐 싶었는데, 다들 별 것 아니라고 하니까. 그 밖에도 먹을 것도 풍족하다고 하고......”
중얼중얼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다.
뭐, 엄연히 포로로 잡힌 자들이니, 그들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는 게 그리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만 한 건 아니지.
한창 호기심이 동할 나이이니 이해는 한다.
특히나 셀라는 무림에도 관심이 많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말 만큼은 셀피네도 라그나도 옆에선 다른 부하들도 쓴웃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풍족하다면 어쩌면 우리도 사막을 떠나 다시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말 끝을 흐리는 셀피네를 대신해 라그나가 대신 뭐라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천막 안으로 문의 감시를 담당했던 부하가 들어왔다.
“라그나 대전사님!! 큰 일 났습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썩 우릴 곱게 보는 건 아닌 모양이군.”
저 부하가 큰 일이라고 한다면 한 가지 일 밖에 없다.
라그나는 자신의 애병인 창을 고쳐잡고, 셀피네와 셀라 역시 창을 잡고 한숨을 내쉰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냐면서.
다른 부하들 역시 각자 무기를 챙기며 준비에 들어가려는 순간
달려왔던 부하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휙휙 저으며 다시금 소리쳤다.
“아...아니 그게 아니라!! 그 뭐라고 해야하지?!! 아...아무튼 빨라 와서 보셔야 합니다!!!”
* * *
“으음!! 완벽해! 역시 시몬이야!!”
내 칭찬에 나와 어깨를 쫙 펴는 해골의 왕, 아크 리치.
휘황찬란한 보석들와 반지, 망토를 두른 시몬은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누가봐도 자신감에 뽕찬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옆에 세운 지팡이만 없었으면 아마 나랑 같이 팔짱을 끼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
그러나
─타악!!
“아야!!”
“얌마, 너무 심했잖아!!”
내 뒤통수에 작열하는 스파이스 스메쉬.
으윽! 내가 엄마한테도 맞아본 적이.......많구나.....생각해보니 소라한테도 맞은 기억이....
아무튼 내 소중한 뒤통수를 가격하며 게이트를 넘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순백의 화랑풍 옷과 영웅건이 돋보이는 우리 성환이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약간 고대 전사 풍의 갑주를 두른 사람들이 차례대로 게이트를 넘어오기 시작한다.
그들의 필두는 같은 무검산 출신의 민준이와 연희.
정확히는 따라온 이들 전부가 둘의 문파, 별무문의 사람들이다.
나온 민준이는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질적이게 변한 주변의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여기 사막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사막은 사막이네요. 저~~기 모래 보이네.”
기본적으로 서 있는 바닥은 검은 대지.
내 위대한 시몬이 친히 모래를 용암이 될 때까지 녹여버린 후 빙결마술로 다시 굳힌 모습이다.
거기에 혹여라도 몸에 안 좋은 독기가 나올까 바람으로 싹 쓸어 환기까지 확실히 시켰지.
우리가 진지를 구축할 곳을 게이트 주변으로 결정했던 만큼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해골의 성벽을 세우고 각종 방어 및 함정, 공격 마술을 대규모로 설치했다.
이런 걸 단시간에 홀로 끝낼 수 있는 건 우리 시몬 밖에 없다구.
나도 아직 내공이 딸려서 못해.
근데.
“야! 왜 때려?!!”
“다짜고짜 게이트에서 아크 리치가 나오면 쟤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냐고?!! 거기에 조용히 있는 거면 몰라. 인페르노를 갈기면 어쩌잔 거냐?!! 이거 용왕도 죽이는 기술이잖아!”
무슨 기괴한 귀여움을 발산하는 건지 릴리의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쪼그려 앉아 머리를 박박 문지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긴 해도, 엄연히 저건 아크 리치다.
그야말로 두려움의 화신.
아크 리치란 것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 누가 시몬을 보더라도 죽음의 왕, 저승의 마술사란 걸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위엄과 포스를 풍기고 있으니까.
근데 그런 존재가 대뜸 게이트에서 나왔다 생각해보라.
이미 그것만으로 경계 태세는 맥스
거기에 인페르노라는 희대의 마술로 사막을 용암의 바다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이미 마왕이다 마왕.
탄식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성환이
난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 대해 반박했다.
“그.....그치만 니가 진지부터 구축할 거라면서?!! 그래서 나한테 정찰 부탁했었잖아?!!”
“정찰을 부탁했지, 위력 정찰을 부탁했냐고! 거기에 저 해골 벽은 뭐냐? 이제 너희들을 이 벽에 일부로 만들어버리겠다 뭐 이렇게 선전 포고라고 하게?”
“저게 제일 방어력이 좋거든?! 내 시몬 무시하냐?!”
“아오!! 우리 레이드 원정 온 거 아니라니까!!”
물론 나도 과한 건 자각하고 있다.
여기에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사막에서의 하룻밤
모래와의 사투
자고 일어나니 침대에 수북한 모래
천막 따위 모래 폭풍의 밥이죠
전갈? 노노, 모래 개미 최고의 단백질 공급원.
같은 글들을 읽은 영향이 없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서 한 행동이다.
저들이 게이트 주변에 뭔 짓을 해놨을 줄 알고?
또 이렇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줘야 조사대 같은 허접들로 인해 우리를 얕잡아 보는 사태를 방지 할─
“누가봐도 전자가 원인이네!!”
성환이는 결국 폭발
그리고 이에 옆에서 다가온 민준이와 연희 역시 새워진 방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누님, 아무래 그래도 해골벽은 좀 선을 쌔게 넘은 거 같은데.....”
“딴 건 몰라도 저건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런가? 음......그래도 저거 진짜 효율도 좋고 방어력도 짱인데.”
살짝 주변의 반응을 둘러보니 따라온 별무문 사람들도 펼쳐진 장관과 벽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린 채 동공지진이 일어나는 중.
한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쩝... 고객님들이 원하신다면야.”
─타각!
손가락을 튕기자 마자 벽들이 무너져 내린다.
시몬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건 착각이 아니겠지.
미안해......
아직 너와 나의 효율충의 미덕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
“엘라임.”
내 부름에 다시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는 엘라임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이 즉시, 스테프를 내려찍으며 가시나무의 성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사막에서 올라오는 가시덩쿨들을 감상하고 있으니. 뭔가 자연의 신비를 거스르는 기분.
그리고 이때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
─씨익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엘라임.
동시에 스태프를 쥔 헤골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시몬.
지겨보던 민준이와 연희는 할 말을 잃었다.
“소환수끼리도 경쟁하고 있어....”
“대한민국, 진정한 의미로 경쟁 사회네요. 취업해도 살아남기 힘들다던데 사실이구나.”
“근데 가시나무나 해골벽이나 오십보백보 아니냐?”
“저 그 말 엄청 싫어해요, 오십보랑 백보랑 어떻게 같아요? 가시나무면 뭐, 해골 벽보다야 낫지”
“그래도 난 저거 무섭다. 전에 봤을 때 저기 막 혼돈 분령들 시체 꽂힌 거 떠올라서. 완전 그때는 통곡의 벽이었는데.”
“아, 그건 나도 동의.”
당시 이 엘라임의 가시나무의 벽을 관람했던 건 민준이와 연희 뿐만이 아니다.
여기 따라온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 수가 그때의 광경을 지켜봤었지.
그렇기에 따라온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릴리가 빡돌면 자기들이 저기 걸릴 거 같아서......
분주하게 가져온 장비들을 설치하는 문파원들의 모습에 민준이와 연희는 애들이 오늘 따라 일을 잘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음? 아, 저기 온다.”
마치 피부에 금이 간듯한 검은 문신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무기를 손에든 채 은발을 흩날리는 무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