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다크 엘프의 숲 (2)
* * *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신중을 기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그만한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일차적인 원인으로는 저쪽에 넘어가 구금되었다는 조사대의 안전.
이번 일은 엄연히 그들에 대한 구출을 포함하고 있기에 늑장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진짜 원인은 따로 있으니.
조금 전 어머니가 언급했던 미국의 간섭이다.
“다 망해가던 중국, 국가안보국 여론몰이 실력도 보통이 아니던데. 미국은 더하겠지?”
“장담하는 데 당신이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경험할 껄요?”
뭘 당연한 걸 묻는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 예지의 모습에 난 혀를 내둘렀다.
아까 어머니의 언급대로 미국이 이번 일을 알아차릴 경우 높은 확률로 주도권을 쥐려할 것이다.
그에 따른 방향성은 틀림없는 적대.
예로부터 공공의 적은 대중의 마음을 모으는 최고의 소재이니.
괴수에게 당한 슬픔과 아픔을 다시금 조성시켜 이번 게이트 너머의 존재들을 향해 표출시키면, 그 과정에서 미국은 높은 확률로 주도권과 함께 다시금 세계 경찰, 아니 그를 넘어 세계 대표의 지위까지 노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랑 일본은 개쓰레기, 인류의 배신자가 되겠지.”
“여론 몰이에 필요한 건 자극적인 소재니까요. 뭐, 실제로 피보는 건 일본 뿐이겠지만.”
“응? 왜?”
“여차할 경우 싸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를 적으로 돌릴 배짱까지 있을린 없잖아요?”
“일본은 괜찮고?”
“뭐......이런 말 해서는 미안하지만, 저희랑 비교하면 감수할만하다 여길 테니죠. 그쪽은.”
씁쓸한 현실이지.
동시에 당연한 힘의 논리이고.
일본도 이를 알기에 철저하게 숨기고 숨겨서 미국이 모르도록 한 것이다.
상황이 틀어지면 피보는 건 자기들 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전 세계에 발표했으면 모를까, 일을 이렇게 튼 이상 일본에게는 우리와 함께 소정의 성과를 내는 것 왜에는 선택지가 없다.
뭐, 그 덕에 우리야 좋지만.
“별의 별 걸 다 주겠다네.”
일본이 제시한 보상을 훑어보며 난 피식 웃음을 삼켰다.
이번 일을 진행함에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이 가장 윗줄에 기본이란 듯이 적혀있고.
그 아래에는 휘황찬란한 보상과 지원의 나열들.
돈이면 돈
먹을 거면 먹을 거까지
거의 여자나 남자까지 지원해달라면 지원해줄 기세다.
그러나 난 서류를 툭 테이블 위에 던지고 한숨을 쉬었다.
“쓸만한 건 없네. 마왕 뿔이라도 잘랐으면 그거라도 달라 하려고 했것만.”
“다 당신 같은 사람만 있는 줄 아나. 마왕 뿔이 얘들 장난이에요? 걔들이 마왕 뿔 자를 껌냥이 됐으면 우리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지.”
대신에 마족 뿔은 잔뜩 지원해주지 않느냐며 예지는 내가 던진 서류를 잡아 흔들었지만, 그게 만족스럽겠냐고?
우리가 가진 용의 뿔과 이빨이 몇 갠데.
그거 다 줘도 용왕급 이빨이랑 안 바꿀 꺼다.
“뭐, 저기 넘어가면 뭐라도 있겠지.”
“여보세요, 저희 레이드 뛰러가는 거 아니거든요?”
“알아.......너무 잘 알지.”
아리아스타는 이번 동화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동화라고 했었다.
서로의 세계를 전멸로 이끌 대표가 없는 가운데 일어나는 동화
이번에는 정말로 순수하게 세계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고 했었지.
그렇기에 저 너머의 존재는 적일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난 아리아스타의 의견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게 말이 쉽지......’
국가를 넘어 세계가.
인종을 넘어 종족이 다를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아군?
그저 적이 아니면 감사할 따름이지, 아군은 무슨 놈의 아군이야.
행복 회로를 돌리기보다는 최악을 염두해 두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터.
아리아스타 본인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고.
“가봐야 알겠지.”
의자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켜며 난 말했다.
나 역시 대화를 할 것이다.
저들이 먼저 대화를 제의했다고 하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문화시민.
고집스러운 말투와 표독한 시선으로 새로운 이들을 차별하는 건 과거의 유산으로 넘겨온 이들이다.
비록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건 긴 시간이 걸릴 일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적극적으로 원한다면 손을 잡아줄 수는 있지.
그러나
“무기는 잘 갈아둬야지 않겠어?”
대화를 위해 무기를 내려놓는 건 어리석은 행위.
여차할 경우 언제든 적으로 간주해 목을 잘라버릴 준비를 갖춰야 한다.
흔히 말하지 않는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마빡에 들이댄 권총만큼 훌륭한 대화 수단은 없잖아? 안 그래?”
“어련하실까. 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가서 우린 대화를 할 것이다.
단지, 어떤 대화를 할지는 서로의 선택이 가르쳐 주겠지.
* * *
─쓰윽
천막의 천을 치우고 들어오는 검은 피부의 남성.
본래라면 항상 반신과도 같은 창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하지만, 이곳에 들어올 때만큼은 예외.
문지기에게 조심스럽게 맡겨둔 상태다.
단지, 그는 항상 생각한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고.
“대족장이시어. 라그나.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했습니다.”
“수고했다. 보고하도록”
역대 족장들의 문양이 새겨진 옥좌에 앉은 여인의 앞에 그는 무릎을 꿇었다.
대족장, 알리샤.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드문 여족장이고
동시에 은발이 주를 이루는 일족 사이에서 매우 드물다는 흑발의 여인.
그는 예를 갖춘 뒤 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제국측 사신단의 호위는 문제없이 완료되었습니다.”
“알브헤임 측은?”
“마찬가지입니다.”
“좋아. 수고했다.”
형식적으로 돌아오는 답변
상당히 길었던 노고에 대한 치하치고는 딱딱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그뿐이랴.
눈 또한 그를 보고 있지 않고 그저 감은 채 긴 머릿결을 늘어뜨리고 있으니 흡사 자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
하지만 오랜 기간 그녀의 옆을 보좌해온 그이기에 알 수 있다.
저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란 것을.
“대족장이시여.......휴식이 필요한 건 제가 아닌 듯 싶습니다.”
라그나의 말에 서서히 눈을 뜬 알리샤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인 듯 싶구나.”
그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젖힌 그녀는 긴 고심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요근래 편히 눈을 감은 기억이 없지.
라그나가 마치고 온 임무처럼
제국측과 알브헤임 측의 사신단이 연신 방문하는 지금의 시기.
골치 아픈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라그나, 네가 내게 답을 주겠느냐? 제국이 좋으냐, 알브헤임이 좋으냐?”
“지혜가 부족한 절 용서하소서. 신은 둘 모두 싫사옵니다.”
“하하! 우문현답이로구나.”
하긴 그렇지.
일족 중 누가 과연 그들을 좋아할까.
이번 호위 임무만 봐도, 그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아 곤란하던 것을 라그나가 자신을 위해 자처해서 지원한 것.
비록 뛰어난 용병으로써 먹고 사는 자신들이고, 그에따라 그 두 대국은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손이 큰 고객이지만.
한쪽은 형편 좋은 고기 방패 및 엘프 짝퉁 노예 취급
다른 한쪽은 무슨 구정물이라도 보는 듯이 경멸이 가득 찬 시선을 던지는 터인데, 누가 과연 그들을 좋아할 수 있을까?
“동맹.....동맹이라. 나 역시 너와 같은 마음이다. 이제와서 동맹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사신단의 다리를 잘라, 대사막을 기어 돌아가게 하고 싶었지. 그러나 어쩌겠느냐? 힘이 부족한 것을”
힘이 부족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그 힘 때문에 지금 두 대국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니
그러나 결국 그 불쾌한 손을 웃으며 잡아야 하는 자신들의 현실과 처지가 안타까운 것뿐.
필시 지금 변화하는 정세, 이방인들 때문이겠지.
“무림이라고 했던가? 십 수년간 잘 있던 놈들이 왜 이제와서 시끄러운 건지.”
처음으로 문을 넘어 찾아왔던 이계의 전사들.
당시에는 많이도 싸웠지.
자신들이야 사막을 살아가는 처지이기에 저들이 찾아온 건 아니지만, 동시에 용병 활동 중에는 심심치 않게 마주쳤다.
제국 측에서도 그들에 대한 대처 때문에 여간 골머리를 싸맨 것이 아니고, 알브헤임은 특유의 독선과 고집으로 무시하기 위해 발악을 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용병이었던 자신들이 그들과 가장 많이 충돌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피만 봐서는 훗날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걸 기나긴 역사의 교훈으로 알고 있었기에 조금씩 싸우는 척 교류 또한 활발히 진행했다.
덕분에 지금 테라에서 저들의 상황에 대해 가장 만은 정보를 쥐고 있던 것도 자신들의 일족.
하지만 알리샤는 최근 들어 그 쌓아 올린 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중이다.
“이유는 모르겠다고 하더냐?”
“예.......황궁이란 곳이 어찌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자신들도 파악할 길이 없다고. 황궁과 무림의 불가침이라는 원칙이 있다고 하더이다.”
“불가침......늘 드는 생각이지만, 그것들은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구나. 형편 좋은 원칙, 문화란 놈이 계속 튀어나와.”
불가침 같은 기도 안 차는 소리를
테라과 그쪽 세계가 부딪친 이례 움직임이 없었던 황궁이다.
자신들도 싸움이 끝나 교류가 생긴 이후에서야 그 존재를 알았을 정도이니 무엇할까.
그런데 그 황궁이란 놈이 이제 와서 테라로 진출하려 한단다.
덕분에 두 대국은 연일 세력을 정비하고 자신들의 문을 두드리는 형국이고.
근데 하는 말이 불가침이라니.....
“정보를 물어다 준 것들이 그치들일 테면서 모르는 척......관계를 계속 이어가야할지 점점 의문이구나.”
“조사의 의한 바로는 저희들을 통해서도, 따로 제국에 심어둔 이들 이용해서 마술사와 주술사, 정령사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다 했습니다.”
“그렇겠지. 전사의 수준이 남다른 그들이지만, 그에비해 그쪽 방면으로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니, 진출을 도모함에 있어. 약점을 보안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을 것이다.”
툭툭 의자를 두드리는 알리샤.
황궁의 저력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러나 찾아온 이방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들어보면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셈
이르기를 황제의 말 한 마디면 백만의 대군이 움직이고
황궁을 수호하는 네 수호신은 천외천에 경지에 닿았다고 했나?
“제 나름대로 일류이니 절정이니 잘 구분지어 놓았으면서 뜬 구름 잡는 소릴 하는지. 라그나, 넌 천외천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죄송합니다.”
“방금 전에 우문현답이란 말도 못 알아 들었겠구나. 하늘 위의 하늘이라고 한단다.”
“대족장 님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하하, 아부가 늘었구나. 뭐, 네가 그런 의미로 한 건 아닐테지만.”
그래서 더 기분이 좋긴 하다.
뭐, 라그가 같은 부하는 소중히 여기면서도 거리를 둬야지.
그런 말을 진심으로 하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 교만하고 오만해지고 마니까.
“너무 날 칭찬하지 말거라. 가뜩이나 사신단이 지껄이는 소리 때문에 잘못하면 나 자신이 용제인 줄 착각하겠어.”
“그러고 보니 제가 없는 사이 자로 잡은 이방인이 용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들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문제도 있었지.”
새롭게 사로 잡은 이방인들....
사실 그들을 이방인이라 불려야 할지 아직 알리샤는 모르겠다.
문을 넘어 찾아온 이방인이란 말에는 부합하지만, 무림의 존재는 아닌 자들
알리샤는 몸을 고쳐 앉고 라그나를 앞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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