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지휘관! 사랑과 정의, 하렘의 이름으로
* * *
아리아스타가 남기고 간 사념
그녀와의 대화를 마친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철수였다.
“이야~~ 네가 먼저 연락을 다 하고 이게 얼마만이냐?”
카페에서 자리에 앉아 스무디를 쪽쪽 빨고 있으니, 저 멀리서 붉은 적발의 청년이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 카페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여성들의 함성은 이미 BGM
저번 테러를 막은 뒤로 철수의 유명세는 더더욱 불이 붙었다.
제길 덕분에 난 무슨 이게 무슨 꼴인지, 날 바라보는 눈빛이 따가워 죽을 지경이다.
“아, 몰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나 문자는? 나야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좋긴 한데,”
“아니 뭐, 전화나 문자로 하긴 좀 그렇고.....”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니 철수는 오히려 더 궁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 뭔데 그래?”
“하.......그게.....”
예민하고 조심스러우며 민감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리아스타에게 들은 특이점의 사례는 철수 밖에 없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는 건데.
지금까지 내가 아는 철수는 판타지아 1위라는 업적과 컨셉충을 제외하고 특별한 걸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철수 또한 특이점이라고 했었지.
그 말은 그의 상태창에도 뭔가 아리아스타 부여한 특별한 힘이 있다는 의미.
난 주변을 살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이건?”
“간단한 결계, 방음이야. 아무튼 상태창에 뭐 특별한 거 없냐? 남들한테는 없는 그런 거. 이게 간단히 말할 문제가 아니긴─”
“어. 있는데? 스킬 커스터 마이징. 그게 왜?”
“.......”
뭐지 이 쿨내 나는 대답은?
사람 마음고생, 눈치 등등 모든 것이 무색하게 긍정해렸어.
누가 보면 잔돈 좀 있냐라고 물은 줄 알겠네.
하도 시원하게 긍정해버린 철수의 모습에 난 그만 어이가 없어 역으로 되묻고 말았다.
“야, 뭐 숨겨야 한다던가 그런 자각은 없냐?!!”
“뭐래? 지가 물어놓고서는. 그리고 말이 커스터 마이징이지, 내가 보기에는 니 융합 마술이 훨씬 더 부럽거든?”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던 철수는 어느새 나온 레모네이드를 받아와 한 번에 들이키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뭐, 나도 사기인 건 인정해. [하백의 가호] 만든 이후로 해상전 디메리트도 사라져서 사기소리 듣고, 요즘도 이것 덕분에 남들 고생하는 거 비해서 난 좀 술술 강해지는 느낌은 있거든. 근데 니 융합 마술은 그냥 개사기지.”
흑마술과 일반 마술의 융합조차 파괴력이 절륜하다.
흑마술의 공통 특징은 일정부분 방어력 무시에 있는데, 그걸 입맛에 맞게 적절한 마술에 부여하니 사기 중의 사기.
근데 거기서 끝나면 몰라.
아예 흑마술보다 더 어이가 없는 혈마술이랑 흑마술을 융합해서 영혈 마술이란 걸 만들어 버린 게 릴리이고 융합 마술이다.
“이 기만러 자식. 전에 보니까 그 뭐다냐? 소환수 무기화? 그것도 성공했다면서. 그게 내 유일 무기보다 좋잖아!!”
“어....뭐, 그리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치......사람 불러놓고 염장 지르고 있어. 아무튼 그건 왜?”
“아니, 누가 그런 특별한 게 있는 사람이 사고 친다고 하더라고.”
“전 무고합니다. 판사님.”
“미리 죽일까?”
“히힉!!”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우리는 잠깐 웃음을 터트리고는 어느새 비어버린 음료를 재주문했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하고는 다시금 질문.
“야, 그 스킬 커스터 마이징이라는 거 게임 때부터 있었던 거야?”
“그렇지. 사실 엄청 초기에 얻었어. 운이 좋았지. 히든 피스나 그런 거 아니겠냐?”
“히든 피스라......”
그럴리가.
아리아스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별 개의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즉, 철수의 스킬 커스터 마이징 역시 그의 재능이란 의미.
상태창은 아마 보조의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게임 때부터 있었다는 소식은 좀 긍정적인 부분.
난 음료를 받아와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철수에게 물었다.
“혹시 너 같은 그런 히든 피스 또 가지고 있는 사람 아냐?”
“아니, 사실 내가 너라서 말한 거지. 이런 건 다들 상식적으로 숨기지. 괜히 히든 피스겠냐? 사실 하이 엘프도 원랜 히든 피스였어. 그거 발견한 사람이 게임 꼬접하면서 루트를 경매에 내놔서 사람들이 알게 된 거지.”
“쩝. 실망.”
역시 너무 날로 먹으려고 했나?
사실 생각해보면 철수의 말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런 걸 누가 말하겠냐고.
더군다나 오히려 돌아다니는 정보는 더 믿을 수 없다.
말이 히든 피스하고 있지, 결국 내가 찾는 건 아리아스타가 힘을 부여한 특이점.
그게 고작 루트가 같다고 중복으로 줬을 리 없으니까.
거기에 철수가 방금 말하지 않았는가?
초기에 얻었더고.
즉, 받을 사람만 받았다는 의미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철수는 좀 고민하더니 예지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예지, 아니 길드장들을 뒤져봐.”
“길드장? 아무리 길드장이라고 히든 피스 같은 걸 이야기했을리가 없잖아.”
같은 조직이라고 생각해도 결국 게임 시절의 이야기.
언제 갈아 탈지 모르는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좋은 정보를 넘기는 사람은 거의 없지.
어쩌면 헐값으로 정보가 팔려버릴지도 모르는 걸 누가 말한다고.
확실히 철수도 그 부분은 긍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다른 관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도 눈치는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아니, 같이 길드 생활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인단 말이지. 판타지아에서는 직업 속이는 놈, 장비 속이는 놈 심지어 변장해서 네카마 짓하는 놈까지 별의 별 놈이 다 있었단 말이야. 근데 길드장이랑 길드원들은 대강 눈치까.”
채팅만 주고받는 PC게임과 다르게 VR은 함께 생활을 한다.
덕분에 하는 행동, 버릇 같은 건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법.
실제로 길드에게 강퇴되고 신분 세탁해서 다시 길드로 복귀한 유저가 금방 발각되어서 쫒겨나는 일은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고.
철수는 그 부분을 꼬집으며 예지를 언급했다.
“걔가 눈치 199단이다. 내가 특수 직업 아닌 것도 얼추 눈치까고 있던데?”
“헐.....”
“사실 너보다 예지한테 먼저 말했거든? 하나도 안 놀라는 거 있지. 뭐, 그런 비슷한 걸 줄 알았다나 뭐라나. 하여튼 장난이 아니야. 예지한테 가봐. 세라핌은 길드 크기도 크기지만, 발이 넓은 걸로도 유명했거든. 그런 사람 있긴 있었을 걸.”
NPC 충무공은 내게 성녀 방문을 퀘스트를 전달했다.
이거 줄줄이는 아니겠지?
* * *
서울 강남에 올린 거대한 건축물.
이제는 번듯하게 자리를 잡은 발할라의 본사다.
나 역시 저번 장 첸과의 일을 마무리하고 발할라의 정식 일원이 되었기에 방문은 처음은 아니지.
뭐, 그렇다고 아무나 우리 성녀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흔쾌히 날 위해 시간을 내 주었다.
“당신이 직접 방문하고 별 일이네요.”
“어째 다들 내가 찾으면 별 일이라고 하네.”
“그만큼 인간 관계에 소홀했다는 의미예요. 반성하세요.”
“네에........”
뭔가 예지의 여러 모습을 보네.
성녀님 복장도 봤고.
전에 탈주, 성녀님의 비밀 스러운 사생활 복장도 봤는데.
이번에는 또 새로운 복장이다.
“오피스 레이디의 정석이네.”
완벽한 여성형 정장.
흠잡을 대도, 굳이 여성성을 강조한 곳도 없는 단정한 복장
이지적인 인상을 주는 안경만이 평범하면서 특별한 느낌을 살린다.
“잘 어울려.”
“전 제일 입기 싫은 옷이지만요.”
“어라? 오는 길에 직원들 보니 다들 편하게 입고 있던데? 입고 싶어서 입는 거 아니야?”
“설마요. 이게 얼마나 불편한데. 제 평소 복장 알잖아요. 그런 거 입다가 이거 입으면 숨막힐 지경이지.”
긴 한숨을 내쉬는 예지는 성녀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준다며 투덜거렸다
듣자 하니, 회사를 장난으로 안다나 뭐라나.
사실 무시해도 상관없는 말이다.
누가 뭐라해도 여기 대빵은 예지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 해봐야 사무직원이니까.
주력이 되는 발할라의 플레이어 맴버들이 하는 이야기도 아니니 신경 쓸 이유가 없지만, 예지 답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그런 이들의 목소리까지 귀를 기울였다.
“직원들 프리로 풀어줬으면 됐지. 왜 너 혼자 자처해서 불편하게 사냐?”
“이게 또 그래요. 지가 불편해서 프리로 한 거 아니냐 소리가 나오니까.”
“쩝, 너도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구나.”
“뭐, 대신 전 여기 많이 안 나오니까요. 일 있을 때만 나오니 그때만 좀 고생하는 거죠.”
그러고 보니 난 철수 투덜거림도 듣고 예지 투덜거림도 듣네.
뭐지?
퀘스트 스크롤 창인가?
스킵 버튼은 없나보군.
그렇게 또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야 난 본론의 주제를 꺼냈다.
보통 예지는 일이 있으면 바로 이런 대화는 잘 안 하는데, 아무래도 예지도 쌓인 스트레스가 좀 있기는 했나 보네.
아무튼 철수에게 전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말하니, 예지는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나도 아는 사람?”
“현수 씨. 마녀의 도시 길드마스터 말이에요. 근데 지금 만나기 좀 힘들다고 하던데...”
“아, 그건 내가 알아. 괴수 소체가 시장에 풀리고 나서 그거 구한다고 해외 경매 원정 다닌다고 하더라”
설마 그렇게 가까이 있는 상대 중에 또 대상이 있었을 줄이야.
아무튼 예지는 그녀를 언급한 이후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본인도 그리 기억력이 좋은 건 아니라고.
뭐,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좋아 보이지만.
당연히 예지도 어떤 이유에서 그런 사람을 찾냐는 질문을 했는데, 난 말을 좀 아꼈다.
아리아스타 이야기는 좀 지금으로서는 신빙성이 좀 부족하니까.
“아, 그래. 요즘 뭐 특별한 소식은 없어?”
아리아스타가 내가 나타난 건 동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이라 했지.
그렇다면 무슨 징후가 있을 텐데.
허나, 돌아온 답변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뇨. 딱히 특별히 신경 쓸만한 건 없네요. 뭐, 요즘 워낙 하루하루 바뀌는 게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 그보다 오늘 시간 있어요?”
“시간? 나야 남는 게 시간인데....”
“잘됐네요. 저녁이나 같이 먹읍시다. 오늘, 모임인데 당신도 오세요. 그런 정보는 오히려 저보다는 당신 어머니가 더 빠삭해요.”
“에? 우리 엄마도 오는 자리야?”
“기껏해야 저랑 당신 어머니, 소라랑 유리 이렇게 4명이서 노는 거예요. 여자들 모임이라고나 할까.”
듣자마자 가기 싫어.......
어쩐지 오늘 소라가 저녁에 모임이 있다고 했는데 설마 이런 자리가 있었을 줄이야.
난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야, 유리만 모르지, 넌 내가 남자였던 거 알잖아.”
“뭐 어때요. 요즘 소라한테 언빠라 불린다면서요? 언빠. 입에 쫙쫙 감기네. 특별 게스트로 허락하니까. 빼지 말고 와요.”
씩 미소를 지으며 예지는 ‘정보를 구하는 자, 발품을 팔아라’ 같은 멋들어진 말을 내뱉었다.
엄마나 유리 모두 날 좋아하니 미인계를 쓰면 다 넘어온다나?
아니 여자가 여자한테 무슨 미인계야.
계속 거절할까 생각도 했지만, 이후 수순이 소라에게 연락할 분위기라 난 어쩔 수 없이 승락했다.
소라가 들으며 내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져서 피곤해.....
또 아까 말 그대로 어머니가 이쪽 방면으로 빠삭하시다고 하니 한 번 뵙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고.
“저녁 8시에요. 소라 손 잡고 늦지 않게 오세요. 릴리 어린이.”
“아씨, 야, 너 요즘 나 놀리는 거 맛들린 거 아냐?”
“사는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자기도 맨날 나 놀리면서.”
그렇게 퀘스트 성녀님을 만나라를 완료.
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귀가했다.
저녁 소고기에 대한 기대 반, 모임에 대한 걱정 반을 품은 채.
그리고
몇 시간 뒤 고깃집에서 일어날 사건은 상상도 하지 못한 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