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다음을 위한 일상 (5)
* * *
세계가 굳이 대표와 스스로에게 힘을 분산하는 건 이유가 있다.
당시를 떠올린 건지, 씁쓸한 미소를 입에 머금은 그녀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굳이 따지면 그때는 내가 제일 강했을 거야. 그럼에도 난 숙여야 했지.”
“고구마 전개라고 욕을 한 사발 먹겠는데? 아니, 한 사발로 끝나려나?”
그녀는 강했으나, 그것이 지킬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런 힘도 주입받지 못한 지구는 그 정도로 무르고 나약했으니까.
싸운다는 선택 자체에서 승패와 상관없이 지구의 종말을 결정 나는 상황.
둘이 손을 잡고 그녀를 노린 시점에서 선택지가 없었다.
“자비를 구걸했어. 눈물을 짜내고 무릎을 꿇으며 빌었지. 부디 살려달라고.”
모성애를 기반을 탄생한 그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어도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게 어미의 마음
비록 이 선택이 의미 없는 생명 연장에 불과할지라도 어머니란 그런 존재다.
그러나 둘에게는 그녀의 행태가 기만으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
진심을 보이기 위해 그녀는 찬탈했던 모리아의 힘을 전부 넘기고도 모자라, 본래 가진 힘마저 일부 빼앗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대로 가면 미래도 없고, 좀 섭섭하잖아? 장난을 좀 쳤지.”
“장난?
“그래, 사실 아루마와 무신 사이에는 간극이 제법 있었어. 공평하게 힘을 나눠주면 사실상 테라의 종말 또한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지.”
그녀는 그 사실을 이용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지는 당사자인 그녀만 아는 사실.
힘을 넘기는 그때, 그녀는 그 간극을 뒤집었다.
“서러운 건 항상 약자. 아루마도 분통을 삼키고 있었으니, 받아먹지 않고는 못 배기지.”
“얼추 예상이 가네. 그 힘 전부 아루미인지 뭔 지하는 놈한테 다 넘긴 거야?”
“다는 아니지, 그럼 결판이 빨리 나버리잖아. 비율로 6대 5 정도? 그렇게 무게추를 맞추고, 그 뒤로 바로 무신 통수치고 도망쳤지.”
아루마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힘도 앞서고 찬스 마저 생긴 상황.
그 자리에서 무신만 처리하면 사실상 도망치는 그녀의 존재 따위 하등 관심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나 위험한 일이었던 건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좀 도박성이 짙은 수였기는 했어.”
“지구가 망하지 않은 걸 보면 도박에서 이기긴 이겼나 보네.”
“응, 무신은 살았고 배신의 쓴맛을 느꼈고, 동시에 힘의 격차가 뒤집힌 걸 깨닫고 아루마를 보며 이를 갈았지. 뭐, 제일 씹어먹고 싶었던 건 나였겠지만.”
“간도 크다. 용케 살았고.”
“약한 자가 강자를 이기는데 그 정도 위험도 감수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니까. 뭐, 운이 좋았다는 건 부정하지 않아.”
지금이야 이렇게 추억처럼 이야기하지, 당시는 정말 생사의 갈림길을 달리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힘도 약해진 상황인데, 잡히면 게임 끝.
지구의 모든 힘이 빼앗긴 것이니 실낱같은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 또 힘을 반으로 나눠야 했어. 이제 그 숫자로 표현하면, 한 10정도 남았네.”
“와~~~55가 10이 되는 마술! 여기서 독자 다 빠져나가겠네.”
“고구마라고 한들 어쩌겠니. 가뜩이나 덩치 큰 놈들이 스테로이드에 아드레날린까지 팍팍 주입된 상태인 걸. 튀는 불꽃에 우리 새끼 다치지 않게 옷은 입혀야 하잖아? 숨기기도 해야 하고.”
전부 응급처치에 불과하지만 할 필요는 있었다.
이성을 잃은 무신이 지구를 박살 내는 건 예방해야 했으니까.
“뭐, 눈에 불을 켜고 도망친 무신을 찾던 아루마 덕분에 괜한 걱정이었지만.”
“그래서? 아니, 솔직히 말은 술술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제 희망이 없거든? 뭔 수를 쓴 거냐?”
이젠 힘의 균형도 엎어진 상황
거기에 그녀가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결국, 공멸이라는 결과도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점을 물어보니, 만에 하나 공멸하더라도 그들의 힘은 하나가 되니, 그 후는 세계가 먼저 흡수한 쪽이 승리
어차피 대표야 힘과 시간만 있으면 세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뭐, 가장 처음 만든 대표만큼 노련할 수는 없겠지만.
그 후 그녀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다.
“난 바로 모리아로 넘어갔어.”
예방조치를 끝내고 그녀가 향한 행선지는 자신이 죽인 대표의 세계.
당시 도착한 모리아는 엄청난 재앙이 범람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기후, 자연재해가 범람해 사람들을 쓸어가는 지옥도 그 자체.
“네가 대표를 죽여서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말은 좀 배배꼬지 말고 제대로 말하면 어디 덧나냐?”
“내가 일으킨 테라와 무림의 격돌을 기회로 잡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거야.”
대표를 잃은 모리아가 선택한 건 새로운 대표를 선출하는 것.
그러나 이미 사라진 힘은 돌아오지 않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걸 다시금 회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급격하게 불어닥친 재앙들은 그 회수 작업의 일환.
“세계 의지가 사람들을, 품에 품은 이들을 죽이는 거야. 새롭게 탄생할 대표에게 부여할 힘을 위해서 말이지.”
“뭐야 그게..........세계가 스스로 죽인다고?”
“그래, 얼마나 죽었을 거 같아? 이미 강해질 대로 강해진 두 대표에게 이길 말을 만들기 위해 대체 어느 정도의 목숨이 희생되었을까?”
다행이라면 처음 선출한 대표에게 부여한 힘이 적었기에 가진 힘 자체는 남아 있었다는 것.
그러나 살아가는 생명들이 멸종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나도 사실 그걸 노리고 간 거야, 대표가 새로 뽑힐 줄은 예상했거든. 뭐.....그렇게 닥치는 대로 죽여댈 줄은 몰랐지만.”
분명 힘의 차이는 있으나 막 급조되어 탄생한 얼치기 대표라면 어떻게든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희박하기는 하지만, 아루마와 무신과 싸우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그러나 모리아라는 세계는 그녀의 예상을 한참 넘을 만큼의 생명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녀에게는 위기.
이렇게 많은 생명을 소모해 탄생한 대표라면 얼치기라도 그녀 정도는 쉽게 이길 터.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동시에 기회였다.
“후배님, 세계는 언제 죽을 거 같아?”
“뭐, 픽션이 현실이 되었으니. 잊혀 졌을 때 죽겠지. 아니면 아까 네 말대로 동화가 끝났을 때 죽거나?”
“전자는 농담이고, 후자는 좀 진지한 답변이네.”
“그래서, 그걸 묻는 이유가 뭔데?”
“죽음의 요인은 둘. 하나는 물리적으로 그냥 박살이 나는 거. 사실 이게 해당되는 건 우리 지구처럼 무른 행성밖에 없지만. 하하.”
“두 번째는?”
내 물음에 조금 뜸을 들인 그녀는 섬찟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온도가 10도는 떨어진 감각.
나도 모르게 난 흠찟 몸을 떠는 순간, 그녀는 말했다.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죽어, 순환이 끝났을 때.”
* * *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기회.
모리아의 재앙은 그녀에게 둘도 없는 기회였다.
세계의 의지로서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과 전쟁들.
그녀는 그 속에 스며들어 진짜 종말을 가속 시켰다.
“너......대체 얼마나 죽인 거냐?”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질문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인 건 한 몇 억 정도? 너무 많이 죽이다 보니 세질 않아서 잘 모르겠네. 모리아는 사람이 좀 많이 사는 곳이거든. 대략 한 400억은 되니까.”
그 뒤 수많은 모략과 이간질, 테러를 일삼으며 그녀는 모리아의 종말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스스로가 재앙을 부르고 있었던 모리아.
물론 세계는 중간에서 멈출 계획이었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욱더
더 많이
대표가 탄생하는 데는 다행히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내에 모은 생명의 몰살을 목표로 그녀는 달려갔다.
“내가 이런 마녀의 모습이 된 건 그때쯤이야.”
죽여도 너무 많이 죽였다.
그 잔향은 그녀의 몸에 스며들었으니,
잠시 지구로 방문했던 그녀는 그 여파만으로 수천만의 사람이 죽어가는 걸 목도하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흑사병이 그때 퍼진 거지. 원래는 병이 퍼져도 그만큼 죽을 정도는 아니었어.”
“과연, 어쩐지 왜 까마귀 망토를 두르고 있나 싶었더니.”
여신으로 추앙받던 존재는 마녀가 되어 죽음의 망토를 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힘으로 중상모략, 이간질 등등 모든 수단을 다 써가며 전쟁을 지속시켜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지 그리고 마지막에 ─”
“힘을 모두 꺼내 남은 이들을 몰살. 모리아의 심장에 비수를 박아넣은 거군. 그리고 죽은 세계의 힘을 네가 먹었고.”
“역전의 순간이면 좋을 텐데......”
“제길, 망할 고구마가 아직도 남았냐?”
“응, 좀 늦었거든”
아루마와 무신 사이의 결판이 나버렸다.
승자는 단연 아루마.
심지어 승리에 취해 한창 여유를 부리는 중이었다고.
아무래도 무릎 꿇었던 것이 꽤나 유쾌했던 건지 아니면 그녀에게 은혜를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지구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고 한다.
어차피 자기가 손쓸 것도 없이 동화만 끝나면 끝이라고.
“띨빵한 놈이네. ‘죽인 놈도 다시 보자’ 모르나? 확인 사살을 이제 기초 교양 과목인데 말이지.”
“덕분에 나만 좋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내 모습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다음이야 정해진 이야기.
사실상 세 대표의 힘을 흡수한 아루마, 비록 좀 힘을 잃기는 했어도 하나의 세계 자체를 흡수한 그녀.
건곤일척의 대승부가 벌어졌다.
힘에서 조금 밀리기는 했으나 결과는 기적으로 승리.
허나, 그럼에도 사이다는 없으니, 나약했던 지구는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설마 동화를 견딜 힘조차 없을 줄이야.”
탄식하듯 마른 세수를 하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녀.
난 오히려 왜 그걸 몰랐냐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너한테 힘 몰빵해서 가진 게 없었다며? 당연한 거 아닌가? 거기에 동화라는 게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거면, 결국 힘없는 우리는 죽잖아.”
“후배님 머릿속에 팩트 폭행이라는 아주 나쁜 단어가 있던데, 어떻게 생각해?”
“아프니까 청춘이지.”
“하아~~~~”
거기에 모리아를 멸망시키고 얻은 저주도 문제였다.
당장 아루마를 쓰러트리기 전조차 잠깐의 방문으로 흑사병을 창궐시켰는데, 아루마까지 쓰러트린 그녀가 지구를 방문하면 어떤 꼴이 나겠는가?
“더군다나 나도 썩 상태가 좋지 못했거든. 숨넘어가기 직전이었지. 내가 테라의 대표라면 바로 죽어주면 될 텐데. 아니잖아?”
아까 이야기했던 만의 하나가 일어난 것이다.
대표가 공멸하면 남은 건 세계가 먼저 힘을 흡수하는 쪽의 승리.
그러나 지구는 싸움의 여파에 다치지 않기 위해 숨겨둔 상태고, 그녀가 있는 곳은 테라였으니.
“지구로 돌아가면, 네 손으로 인류 몰살,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죽으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네. 할 말이 없다.”
“여력이 남았으면 테라를 멸망시키는 건데......”
“거기서 더 죽이냐? 아니, 죽여서 어쩌려고”
“그럼 동화가 일어날 일이 없을 거 아니야. 나야 뭐.......자식을 품에 안을 수 없는 어미가 되겠지만, 그래도 강해졌으니 곁을 지킬 수는 있으니까.”
“........미치겠네. 엄마 졸라 무섭다.”
400억의 세계를 죽이고도 더 죽이겠다고 하는 그 모습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야말로 마녀,
모성애에 미친 마녀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뒤틀렸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어쩌면 진정으로 너무 순수하게 모성애로 비롯되었기에 그런 걸 수도 있다.
자식을 위해 여신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을 꿇는 것도 어미의 마음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속에서 줄 다리기를 하는 것도 어미의 마음
그리고 피 튀기는 사투 속에서 승리를 쟁취한 것도 어미의 마음이니.
자식을 위해 400억을 몰살 시킨 것 또한 어미의 마음일 것이다.
비록 죄책감은 느낄지언정 그녀는 다시금 선택에 기회가 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다행히 내가 지구의 대표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 지구와 연결은 되어있었어. 최선은 지구에서 곱게 죽어주는 거지만, 내가 도착하자마자 지구가 죽을 테니. 그건 어쩔 수 없고, 차선책을 마련한 했지”
그게 바로 우리가 VR이라고 불렀던 게임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