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술래 끝! 이제 역할을 바꿔 봅시다!! (完)
* * *
사실 처음 용생구자를 쓸어버릴 때는 딱히 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 첸이 했던 것처럼 서로 그럴싸한 명분이 갖춰진 상황에서 중요한 건 힘의 논리.
이 싸움의 승자와 척을 지고 싶은 곳은 아무 곳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난 장 첸을 상대함에 있어 뒷처리를 간단히 생각했다.
장 첸을 죽이는 건 부담스럽기는 해도 반 병신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몸에 저주란 저주를 다 때 박은 후 적당히 후유증이라고 둘러대면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거기에 혼자와도 좋을 이곳에 유리를 데려온 이유가 있으니.
이미 성환과 유리는 발할라의 가입이 결정된 상황.
그 덕에 유리의 모선은 단순한 개인이 아닌 나아가 발할라를 상징할 것이 분명하다.
예지 입장에서도 유리의 암살 시도는 결코 간과할 수 없을테니, 발할라를 발촉한 즉시 따지고 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싸움의 구도가 변한다.
개인과 용생구자에서
발할라와 용생구자로.
어느 측의 동아줄을 잡을지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모선의 방송 송출 때문에 한동안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결국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국가들이 알아서 정리해 줄 테니.
하지만 아이링, 샤오링
아니 정확히는 국가안보국, 이놈들이 내 계획을 어그러트렸다.
“정부는 장 첸의 손에 부러졌지만, 저희의 저력은 살아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매스컴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 첸에게 저주를 건 것이 나라는 걸 성토하겠다는 그들.
처음의 난 코웃음을 쳤다.
“어쩌라고? 그래서 날 처벌이라도 하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그렇게 따지면 장 첸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할 것이며, 무엇보다 날 중국의 법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중국에 잡아놔야 하는데 무슨 수로?
당장 모선조차 막을 힘이 없으면서 날 어찌 중국에 구금하며, 또 무슨 수로 처벌할 것인가.
가둘 감옥은 어디이며, 내 탈출은 막을 수 있는지.
그 이상으로 날 제압할 방법이 있기나 한지를 고민해야지.
장 첸도 막지 못했으면서......
하지만 이에 대한 둘의 답은 간단했다.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귀빈의 말씀처럼 저희는 힘이 없으니까요.”
“어느 나라도 당신을 처벌할 수 없을 겁니다. 현 최상위 랭커란 그런 존재이니, 허나 대중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어찌 되었든 간에 인류는 아직 전쟁 중.
상대의 의지로 휴전 중일 뿐이지, 언제 다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
비록 장 첸이 범죄자라 밝혀졌다고 해도 그렇게 처분하기에는 현재의 무검산 1위의 자리는 너무나 큰 셈
날 처벌하라는 목소리는 나올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장 첸에게 걸린 저주를 풀라는 목소리는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국가안보국의 목표.
저들은 내가 잘못되는 걸 바라는 게 아닌 장 첸이라는 패를 온존하는 걸 바라는 것이다.
결국, 난 무식하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낫을 빼 들어 저들의 목덜미에 가져갔다.
“죽고 싶냐?”
여차하면 국가안보국 자체를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
하지만 그게 자충수라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저들을 쓸어버릴 명분도 없거니와 그렇게 되면 단순한 충돌을 넘어 타국을 향한 침탈이 될 터.
이는 장 첸 이상이 된다는 의미다.
타국 입장에서도 단순한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닌, 언제든지 자신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일이 되니까.
그렇게 되면 발할라라고 해도 날 감쌀 수 없게 된다.
아이링과 샤오링은 이 부분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수가 없을까?
“X빠, 까짓거 뭐 저주 풀라는 비난? 무시하지 뭐. 대신 이건 이자 쳐서 값아 주마. 한국에 들어온 십대고수가 5명 있지? 우선 그놈들부터 살아서 귀국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해주지.”
““..........””
“왜? 더 지껄여봐.”
“.......귀빈, 저희는 정말 많은 걸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일에 대해 장 첸과 저희를 분리할 생각도 없습니다.”
“장 첸이 귀국에 한 일. 대가와 책임이 필요하다면 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장 첸은........현 중국의 어쩔 수 없는 대들보입니다.”
그러나
“어쩌라고? 장 첸을 너희가 통제할 수 있으면 티끌만큼 고려 정도는 해보겠는데. 그것도 아니잖아?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저걸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내가 병신으로 보여?”
치욕과 굴욕은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지며,
원한은 묵힐수록 진해지니.
장 첸은 절대 오늘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면서 사람 목숨 개미만도 못하게 보는 자라면 더더욱.
그나마 반병신으로 만들어 살려주는 건 내 개인적인 안위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런 원한의 씨앗을 남겨둘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딱 저주라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는데, 그걸 그냥 보네?
그것도 목줄을 잡을 줄도 모르는 사육사 손에 맡기고?
차가운 비웃음을 둘에게 보이면서 난 낫을 거두고 멜라티스를 불렀다.
“계획에 변경은 없어. 너희들 마음대로 해. 그만큼 나도 나중에 확실히 이자까지 값아주면 되니까. 멜라티스”
내 부름에 따라 페르난도에 짓밟힌 장 첸에게 다가가는 순백의 여인.
난 내가 들고 있던 낫, 생과 사의 단절자를 멜라티스를 향해 던졌다.
“확실히 박아 넣어.”
혹시라도 있을 마력저항조차 뚫을 수 있도록 만드는 나의 무구
내 노기와 함께 이를 넘겨받은 멜라티스는 장난끼 가득했던 표정을 지우면서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마력으로는 부족할 지라도 기술력으로는 나 이상이다.
거기에 마력이나 출력은 내게서 가져가면 그만.
그나마 강화를 하지 않는 건, 순수 저주만으로 장 첸이 죽어버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검은 사신의 낫은 어느새 저주를 머금으며 순백의 낫으로 변하고, 멜라티스는 낫의 날을 장 첸의 목덜미에 가져갔다.
그리고─
* * *
─띠리리링! 띠리리링!
시끄럽게 울어대는 알람 소리.
순간 스마트폰을 던져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지만, 이를 간신히 참아내고 알람을 꺼 다시 침대 속으로 돌아왔다.
“아, 겨우 잠들었는데.”
겨우 2시간 잔 꼴에 기분이 애매하다.
졸리기는 하는데 잠이 달아난, 몽롱한 듯 하면서 정신이 깬 느낌.
아무튼 짜증난다는 뜻이다.
생활리듬이 망가지고 있다는 전조니까.
그러나 다시 잠들기도 뭐해서 난 결국 스마트폰을 집었다.
“역시, 온통 어제 일 일색이네.”
나와 유리의 대륙 원정을 다룬 기사가 쏟아진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정말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해야 하겠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국에서 흑사회의 테러행위가 밝혀지면서 내 행위를 지탄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잘했다는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이게 언론 조작이 가미된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음......”
그 뒤로도 여러 기사를 읽어 내려간다.
아직 장 첸에 대한 소식을 밝혀지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고, 나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다.
모선을 통해 방송을 송출한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자체 검열을 진행했으니, 기껏해야 보인 건 내 뒷모습 정도.
물론 이를 기반으로 한 추측성 기사들은 계속 나오고 중이다.
“좀 더 기다려봐야지.”
기껏해야 몇시간
아직은 시기상조일 터이니 좀 더 경과를 지켜봐야 내가 한 일의 여파를 제대로 확인 할 수 있겠지.
다행이 좀 지루한 기사를 읽었더니 다시 잠기운이 찾아온 난 그대로 눈을 감으려 했지만.
─쾅!! 쾅!! 쾅!!
“야 이년아!! 문 열어!!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어제 고친 현관문을 부술 기세인 성녀님은 아무래도 내 단잠을 허락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 * *
“당신 무슨 일은 벌인 건지 알아요?!!”
“대륙 원정, 천마 레이드.”
“아으.....이게 말이나 못 하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예지는 역시나 이번에도 철저한 준비를 기반으로 날 찾아왔다.
단지, 저번과 다른 점은 그때는 내가 묻고 그녀가 답했다면, 이번에는 역할이 뒤집힌 것.
그녀는 한 발표 자료를 내놓으며 내게 설명을 요구했다.
“이게 뭐여? 나 중국어 몰라.”
온통 한문 일색인 글 뭉치에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예지는 짧게 압축하여 설명했다.
“천마가 모든 죄를 인정하고 폐관 수련에 들어간다는 중국 측 발표.”
“헤에~~~ 폐관 수련?”
“빨리 무슨 일인지 설명해봐요.”
예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날 쏘아보며 말했다.
사실상 나와 장 첸이 부딪친 시점에서 예지는 천마가 살아있을 걸 기대하지 않았다.
필시 죽음
혹은 그에 필적한 무언가.
그렇기에 어떻게든 날 커버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지.
고작 몇 시간 밖에 안 되고, 국내에서 자신과 철수가 겪은 테러에 대한 뒷처리도 골치 아팠지만, 이건 그보다 더 시급한 사안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 걸?
천마가 개과천선이라도 했는지 모든 죄를 시인하고 스스로 용생구자를 해체.
감옥보다 더 독한 곳에 제 발로 들어가 폐관수련을 한다고 한다.
훗날 인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총알이 되겠다면서.
이에 예지는 기도 안 찬다는 듯 다음 이어진 발표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모선의 힘은 인류를 위한 빛이며, 난 이터널과 판타지아 유저의 힘에 통감했다. 중국 정부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라. 장 첸이 자기 입으로 이딴 소리를 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고의적으로 당신에 대한 언급도 피하네요.”
“그러게”
“그러게?”
우리 성녀님 이마에 성스러운 십자 주름이 돋아난다.
아무래도 계속 뜸을 들였다가는 예지의 화병이 터질 것 같아서 난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예지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뭐죠?”
영롱한 빛을 발하는 신비한 구슬.
마치 오로라를 압축하여 구슬로 빚은 듯한 모습에 잠시 감탄하던 예지였지만, 그 뒤 이어진 내 대답에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장 첸의 혼.”
“에?”
“하도 찡얼찡얼거려서 말이지, 인질? 연구자료? 뭐라 표현하기가 힘드네.”
“자.....잠깐만요? 영혼? 내가 아는 그 영혼 맞죠?”
“다른 의미도 있냐?”
당황하는 그녀에게 난 대략적인 당시의 상황은 설명했다.
날 만류하는 아이링과 샤오링.
그리고 그 뒤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사실 장 첸이 없으면 중국이 어떻게 될지 나도 안다.
기둥이라고 아이링과 샤오링이 표현했는데, 딱히 틀린 건 아닌 셈이니까.
둘이 딱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력을 다해 지키고자 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근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좀 고민하다 영혼을 뽑아버렸어. 인질인 셈이지.”
오래 걸렸다.
네크로멘서인 내게는 쉬운 일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지.
그나마 그동안 마녀의 도시의 서적을 뒤적이며 이론을 다지고,
네크로멘서라는 직업을 네메시스까지 끌어올렸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게 장 첸이란 존재가 강인한 영혼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이 작업이 원래 힘든 건지는 아직 모르지만.
덕분에 지금의 장첸의 몸은 일종의 껍데기.
판타지아나 무검산 주술사 중에 이런 껍데기를 다루는 직업은 의외로 많이 있다.
당장 나도 네크로멘서.
시체라는 껍데기를 다루는 직업 아닌가?
“필요한 건 무검산 1위 천마라는 얼굴이니까.”
“그럼 이 발표를 한 건....”
“지들이 빈 몸뚱이를 움직여서 한 거겠지? 뭐, 나야 관심없지만.”
그래도 영혼은 챙겨왔다.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소유 자체가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되니까.
전쟁은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때를 대비하면 장 첸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
혼이 빠져나갔어도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상태이니 저들은 장 첸을 놓을 수 없다.
그렇기에 혼을 손에 쥔 내게 밉보이는 짓을 할 수도 없고.
“덕분에 이런 내게 형편 좋은 기사발표까지 줄줄이 해주네. 얘들도 센스 있잖아? 딱히 부탁한 건 아닌데 말이지.”
덕분에 난 일상으로의 복귀가 빨라진 셈이다.
모든 공적을 이렇게 천마 스스로가 모선에 몰아버렸으니, 난 그저 유리와 친한 누군가 정도로 남을 터.
사람들도 의문의 랭커급 강자의 출현보다는 이쪽에 손을 들 것이고.
비릿하게 웃는 내 모습에 예지는 살짝 몸을 떨었다.
“하하.....영혼을 저당 잡았다라....마녀네요.”
“뭘, 새삼스럽게.”
“아니......진짜 마녀라고요. 덧붙여 묻는데 그거 돌려줄 생각은?”
난 활짝 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