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술래잡기 (5)
* * *
“이야~~~ 삐까뻔쩍하네. 나 이런 곳 처음 와 봐. 엄청 비싼 곳이지?”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식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적발적안의 청년.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마저도 신기한지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알까.
가장 눈에 띄는 건 자기 본인이라는 사실을.
시원하게 뒤로 넘긴 사자 갈기 같은 머리 스타일과 반쯤 풀어헤친 검은 와이셔츠.
이에 대비되는 순백의 정장 바지가 함께 이루는 조화는 묘한 멋을 뽐내며 그의 존재감을 과시했으니.
앞에서 걸어가는 예지는 미운 오리 같은 놈이지만, 제법 코디를 맞춰준 보람이 있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 간다고 했으면 이런 끼니 정도야 평생 먹어도 돈이 썩어 넘칠 텐데.”
“하하, 그건 아니지. 야, 내가 김철수야 김철수 교과서에도 항상 나오는 이름이라고.”
“아......예, 미국 국적.”
“아니, 그건 사정이 있다니까 그러네. 나 군대도 갔다왔어. 이정도면 어엿한 한국의 남아 아니냐?”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그의 모습에 예지는 건성으로 ‘예예’ 하는 식으로 답했지만, 그래도 그가 엄연한 한국의 남아라는 사실은 동의했다.
군대도 군대지만 판타지아에서 보였던 그 미친 컵셉질 덕분에.
판타지아가 나오고 철수가 최초의 유일 무장에 도달한 날.
전 세계 검색 순위에 한국의 유명하신 장군님의 이름이 올라왔으니까.
그는 그것만 해도 한국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공적이 있다.
“근데 여기는 코스요리 나오는 곳이지? 쓰읍, 감질맛 나는 건 별로인데.”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니 즐겨봐. 대식가인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그럼 괜찮아. 코스요리도 하나하나 양이 적어서 그런 거지, 전체적으로 따지면 그리 부족한 건 아니니까.”
“뭐, 미인이랑 같이하는 식사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인이란 칭찬에 예지는 피식, 작은 웃음을 지었다.
미인이라......요즘은 딱히 칭찬도 아닌 거 같은 말이지만.
다들 아바타로 변한 탓인지, 어지간해서는 선남선녀들뿐이니까.
‘뭐, 그래도 듣기 나쁘지는 않네.’
자신을 상대로 허례허식 없는 대화를 하는 몇 없는 이들 중 하나다.
요즘은 그나마 좀 늘었지만, 그래도 저런 순수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칭찬은 듣기 어려우니까.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레스토랑이 있는 층으로 향하는 두 사람.
예지는 슬쩍 옆에 선 철수의 눈치를 보고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서두를 열었다.
“요즘은 뭐해?”
“응? 나? 나야 뭐......훈련? 이것저것 하면서 살고 있어.”
“훈련이라......레벨?”
정점에 가까운 힘의 보유자이다 보니 이제는 싸워서 레벨을 올리는 건 요원한 일,
예지나 여기 철수에게 강해지는 길은 새로운 기술의 습득과 기존 기술의 숙련도 상승이다.
물론 왕도로 따지면 압도적으로 후자가 더 빠르지만, 전자도 의미가 없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철수는 딱히 그런 건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 것도 있지만, 판타지아에서 어쩔 수 없이 완성 못 한 게 있거든. 그거 때문에 요즘은 골렘 제작이나, 소환술, 마술 같을 걸 배워보는 중이야. 마녀의 도시 쪽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지. 가끔 릴리도 거들어 주고.”
릴리가 도와준다는 부분에서 예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녀의 도시 쪽 사람들과 드문드문 만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둘이 같은 일을 하는 건 몰랐으니까.
상당히 흥미가 당기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는 오늘 만남의 목적이 바뀔 것 같기에 애써 호기심을 누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놀랐어. 네가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곳에 초대해 주실 줄은 몰라서. 으으....사실 나도 이런 곳은 부담이라고.”
“작은 복수지. 저번에는 어질어질했던 너희 집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거긴 내가 부담이었어.”
“하하, 미안”
“아무튼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이렇게 흔쾌히 싸인을 해준다고 했는지 들어도 될까?”
릴리처럼 처음 제안에 보류를 선택했던 철수가 직접 연락이 와서 발할라에 힘을 실어주겠다 하니, 예지로서는 기쁘면서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그 사이에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하는 그런 의문이.
기쁜 일이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알고 넘어가는 게 훗날을 위해서도 좋은 법.
딱히 안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기대에 찬 눈으로 예지가 철수를 바라봤으나, 철수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무안한 얼굴을 지었다.
“어.....음. 사실 별 이유는 없어. 아무래도 내가 한국을 떠날 거 같지 않아서. 미국도 중국도, 유럽에서도 연락은 불티나게 오는데, 확 땡기는 게 없더라고.”
“릴리는? 사실 너도 릴리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였잖아?”
최소한 여기 둘은, 그리고 그녀의 전투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탑랭커들은 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힘을.
소환수 하나하나가 괴물 중에서도 규격 외.
판타지아 때보다 성장한 둘도 소환수 하나 상대하는 게 고작이다.
심지어 성장 중이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만약 단신으로 모선을 떨어뜨릴 존재가 있냐 묻는다면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릴리라 답할 것이고,
그녀와 싸울 날이 오면 어떻게 할 거냐 묻는다면 다시 거리낌 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는다’를 골라야 할 정도의 존재.
특히나 그녀의 곁에서 소환수 강화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최대로 받은 권속들은 어떤 의미에서 릴리 본인조차 능가하는 힘을 휘두르니.
철수는 당시 용제와의 전투에서 보았던 릴리와 그녀의 권속들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확실히 만약 릴리가 중국으로 가면 그날로 우리 모두 제삿날이겠지.”
“그정도.....는 아니라고 못 하겠네. 성격상 직접 나오지는 않겠지만, 대척점에 서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악몽으로 다가올 테니.”
“근데 그럴 거 같지는 않거든. 미국으로 갈 수도 있지만, 느낌상 그쪽도 영...... 또 미국은 간다고 해도 우리가 꼭 적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걍 하겠다 한 거야. 겸사겸사 내 결정이 릴리가 발할라에 들어오는 데 도움이 되면 좋으니까. 릴리도 참, 그렇게 강하면서 은근히 계산적이야.”
“오~~~너도 그렇게 생각해?”
“어휴~~ 말도 마라. 알지? 걔도 지금 유일 무장에 눈독 들이고 있는 거. 마녀의 도시에서 하는 짓 보면 아주 그냥 가관이야.”
공짜로 재능과 은혜를 퍼주는 것 같지만 주는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도와주는 내내 유일 무기, 유일 무장 노래를 부르고,
설마 내꺼 보다 다른 사람 꺼 먼저 만들어 주는 건 아니지?
내가 이렇게 발 벗고 도와줬는데 그럴 리 없어.
암~~ 그렇고 말고.
하고 있으니 돈주는 것도 아닌데 손이 떨릴 지경이라고.
그러면서도 마력량이 미친 수준이고 조작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가설상의 설계나 귀한 재료를 소모하는 작업에는 도움을 구하지 않기도 그렇고.
중간중간 서적을 좀 빌려 가는 해도 결국 공짜로 도와주니까.
철수의 이야기를 들은 예지는 과연 그녀 답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내가 재촉할 필요도 없었네. 사실 나도 너처럼 3번째 유일 무장 가지고 싶어서 비슷한 짓을 하려고 했거든.”
“참아라 참아. 너까지 그러면 마녀의 도시 사람들 등꼴 빠진다.”
그렇게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둘은 어느새 드디어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제법 큰 웃음을 터트리니 더더욱 기분이 좋아진 예지의 발걸음은 더더욱 가벼웠지만, 철수는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의 분위기에 다시금 헛웃음을 들이켰다.
“으에~~~ 여기서 먹는 겨?”
“눈치 볼 필요는 없게 룸으로 잡았으니 걱정 말고.”
“야, 나가서 대충 먹자. 어차피 나 싸인만 하면 되는데 뭐하러 이래?”
“내가 다 경험이라고 했지? 그리고 이런 혼란에 시대에 싸인이니 계약서니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냥 너와 내가 한 배를 탔다는 상징물일 뿐이지. 기념적인 날이니 샴페인이라도 터트려야 하잖아?”
“난 생일 축하도 케이크가 아니라 삼겹살로 하는 인간인데 샴페인은 무슨......”
이러나저러나 철수는 불평을 토로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며 예지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조금 걸어 예약한 룸으로.
우연인지 아니면 직원의 배려였는지 릴리와 식사를 가졌던 그때와 같은 룸이다.
그러나 예지는 문을 열자마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응? 왜 그래?”
테이블 위에서 은빛을 발하고 있는 스테인리스의 반원형 접시 덮게.
아무리 예약을 했다지만, 엄연히 코스 요리인데 손님이 오기도 전에 미리 접시를 올리다니.
예지는 혹시라도 방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어 잠시 뒤로 물러나 방문의 표시를 확인하려는 순간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잡아당겼다.
“물러서!!!”
“야, 무슨─”
당황한 예지는 철수에게 대체 무슨 짓이냐 물음을 던지려 했지만, 그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앙!!!!
섬광과 함께 시작된 폭발.
빛의 폭풍은 두 사람과 호텔 레스토랑 전체를 집어삼켰다.
* * *
“과연 따로 이터널 측의 물건을 구할 필요는 없었군.”
한 건물의 옥상에서 호텔을 응시하는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천뢰.
무검산에서 제작할 수 있는 최강의 폭발물은 과연 만족스러운 성과를 보여주었으니.
호텔 플로워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위력은 상상 이상의 장관을 그리고 있었다.
“슬슬 움직여야겠지.”
난간에서 내려와 검집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그는 바로 다음 행동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이에 대해 주변에 서 있던 부하 몇 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했다.
“각하, 저 정도 위력에 살아남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 아무리 생각해도 진천뢰를 직격에서 터트렸는데.......”
“틀림없습니다. 오히려 확인을 진행하는 게 이번 일을 저희가 계획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대체 왜
그것도 우리 전부가 저 현장에 들어가서 확인 작업을 해야 하냐는 의문.
이런 의문을 피우는 건 지금 호텔의 모습을 보면 당연히 알 것이다.
플로워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여파인지 레스토랑이 있던 위층을 서서히 기울어 무너져 내리고,
떨어지는 잔해들로 인해 지상 역시 혼란 그 자체니까.
당연히 경찰과 플레이어들이 모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고립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호방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네들 재밌는 소리는 하는구만. 고작 진천뢰 따위에 판타지아의 두 정상이 죽었을 성싶은가?”
“게임 시절 때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저들도 피육으로 이뤄진 사람인데. 무슨 수로.”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안일하긴”
역시 본국의 제대로 된 정예로 데려왔어야 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소국에서 영입한 인재로 꾸린 부대가 아니라.
실력은 봐줄만 하지만 신념이 없지 않은가. 신념이
애초에 이 작전을 저 둘을 죽일 것이 아닌 제압하여 납치하는 것에 목적.
진천뢰에 죽을 정도였으면 진천뢰를 쓰지도 않았다.
목적은 제압 및 납치.
그를 위해 자신을 포함한 3명의 좌가 움직이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약한 소리나 지껄일 줄이야.
‘보이는구나.’
가늘게 뜬 눈으로 모인 이들 전체를 훑어본 그는 확신했다.
힘이 있어 자리와 권세를 주었지만, 위대한 중화의 혈통을 잇지 못한 이란 결국 이런 것.
마음속에 든 것은 자신의 안정과 안위 뿐이다.
가봐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위기, 그리고 모국을 배신한 스스로의 얼굴이 팔리는 것이 걱정이겠지.
능력보다 더 높은 대우를 원했으면서도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다니,
‘지금 베어버릴 수 없는 게 아쉽구나.’
마땅히 당장 여기서 목을 참하고 싶지만, 그리했다가는 힘들 게 영입한 전력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아직은 본국이 아니기에 통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니까.
‘본국에 귀환하면 대원수께 적당히 솎아낼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려야겠어’
못해도 재교육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남자는 꾸역꾸역 올라오는 분노를 누르며 당근과 채찍처럼 작은 경고와 함께 그들을 다독였다.
“움직여라. 양쪽 모두에게 배척받는 박쥐 취급 당하기 싫으면, 우리만 움직이지 않는 걸 들었을 텐데?”
“그건......”
“윽.....”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갈텐데, 뭘 망설이나? 기운들 내시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말일세.”
결국, 뒤따르던 이들은 마음을 정하고 복면을 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설득하는 것도 마지막이라 다짐하며 남자도 복면을 두르고 그들은 저 멀리 폭발한 호텔을 향해 날아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