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술래잡기 (4)
* * *
─또르륵
커피포트에서 끓어오르는 물을 다시 찻주전자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 티스푼보다도 작은 숟가락으로 살짝 검붉은 찻잎을 두 스푼.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니 서서히 물에서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집안 가득히 향긋한 내음이 자리 잡는다.
커피도 녹차도 딱히 입에 맞지 않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기호 식품, 홍차.
과거 자취할 때는 그냥 티백으로 즐겼지만, 지금은 뭐, 생활 조건이 그때와는 다르잖아?
시간도, 돈도 부족함이 없어지면서 생긴 고상한 취미 중 하나지.
“달게?”
내 물음에 식탁에서 향기에 넋을 놓고 있던 유리와 성환이 후다닥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쓴 건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난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홍차를 밀크티로 전환.
흔히 하시는 오해가 있는데, 밀크티라고 해서 딱히 홍차를 진하게 우려낼 필요는 없다.
그저 평범하게 마시는 정도의 농도에 본인 취향껏 우유와 설탕을 넣으면 그만.
단 걸 좋아한다고 했으니, 그래도 우유랑 설탕은 좀 더 넣는 편이 좋겠다 싶어 완벽한 초보자 용 밀크티를 준비하고, 살짝 레몬즙도 넣어 풍미를 더한 후 난 찻잔을 그들의 앞에 대령했다.
“남의 집에서 홍차를 대접받은 건 처음이네.”
“나도, 보통은 커피나 녹차지.”
성환과 유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그르냐? 난 남의 집에서 차를 대접받은 적도 없다. 대접한 것도 처음이고.”
난 저들과 다르게 순수한 홍차를 들어 홀짝였다.
하여간 인싸들이란.
나 같은 아싸들은 남의 집 같은 미지의 이세계에 발을 내미는 일 자체가 초등학교 이후로는 없다고.
친구 집이라....그립네.
대체 언제 방문해봤더라? 초등학교? 중학교였나?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과거를 회상하며 아주 잠깐의 티 타임을 즐기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난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귀한 분들이 이런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로? 아니 그보다, 내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거야 당연히, 예지가 가르쳐줬지.”
“인간적으로 전화번호는 주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사람 찾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아, 번호 새로 뚫은 지 얼마 안 돼서.”
난 가볍게 손을 올려 사죄의 표시를 전했다.
정확히는 번호가 아니라 신분을 다시 뚫은 지 얼마 안 됐다가 맞겠지만.
의외인 게 둘도 무슨 이유에선지 번호를 바꾼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긴 우리도 고생 좀 했지.”
“번호 바꿔도 의미는 없었지만. 헤헤.”
“응? 고생?”
“어라? 너도 미국 쪽 때문에 고생 중인 거 아니었어?”
“하루종일 진짜 이런 민폐도 없다니까.”
아무래도 나랑은 다른 이유로 번호를 바꾼 모양이네.
하긴 난 여러 이유로 전산 정보 상에서는 잠시 유령이었으니까.
둘과는 달랐겠지.
“그러고 보니, 유리는 이터널 1위였지? 미국에서 시끄럽겠네.”
“와아~~ 알고 있었어? 미국이 이터널 유저한테 극성인 거?”
“극성일 정도냐.......뭐, 정보통이 좀 있었거든.”
종합 엿듣기, 엿보기 주식회사 카녹스 님이요.
그 애단 인가 뭔가 하는 놈이 미국은 이터널 쪽 사람들을 최 중요 대상으로 본다고 했으니, 유리는 아마 나랑 동급 혹은 더 윗줄의 영입 대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여기 성환도.
“넌 중국에서 뭐라 안 하냐? 장 첸이라고 했나? 그 중국 대빵, 너 걔 이겼다며?”
“PVP전이지만.”
“무검산이 PVP 빼면 뭐가 남는다고.”
“오해지. 우리도 스펙 쌓기 나름 힘들다고. 뭐, 판타지아만 하겠냐 만은. 그리고 그러니까, 내가 PVP 이겨도 랭킹이 낮잖아.”
으음, 그러고 보니 성환이 4위였지?
아무래도 무검산도 나름 스펙 싸움이 있기는 있나 보네.
아니지, 그럼 이 자식은 저 스펙으로 랭킹 1위를 밟았단 소리잖아?
용 좀 썰고, 고생도 좀 했으니까. 지금은 장 첸이란 놈 그냥 이기는 거 아닌가 몰라.
허~~~대단한 놈이구나.
“아무튼 그래서 무슨 일인데? 예지한테 들었으면 내 번호 받았단 소리잖아. 전화로 하면 되지 둘이서 오순도순 손잡고 남의 집까지 오신 이유가 뭐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는 내 물음.
두 사람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릴리는 발할라 생각 없어?”
“아, 너희들은 들어가게? 음, 유리 넌 미국에서 제안한 조건이 장난 아닐 거 같은데...... 성환이 너도 중국에서 크게 나오지 않았냐?”
중국은 무검산의 성지가 되어가는 중이고, 미국은 이터널의 성지가 되어가는 중이다.
서로의 정책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두 나라 모두 플레이어를 모으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으니까.
여기 둘은 그 정점에 선 존재들.
성환은 어쩌다 보니 전선에서 개인 임무를 맡아 많이 보지 못했지만, 샤오린이란 놈보다야 훨씬 강할 것이 분명하고.
모선은 따로 말해봐야 입만 아픈 수준.
그건 단신으로 전쟁을 성립 시킬 수 있는 병기다.
몇 조 쯤은 우습게 받을 수 있을 텐데, 둘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중국에 가고 싶겠냐고? 내가 걔들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유리는 성환에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걔들도 그거 알고 더 큰 제안했을 거 같은데?”
“어.....용생구자라고 했나? 거기 1석을 제안받았지. 돈도 잔뜩 준다고 했고. 집도 으리으리 한 거로 준다고 하고. 근데 우린 그런 거보다는 평범한 게 좋아서.”
“안전하게 살고 싶으니까. 좋은 대우를 해주는 건 그만큼 쓸데가 많아서잖아.”
확실히.
샤오린이란 놈도 그런 일 할 놈이 아니긴 하지.
내가 괜히 살려줬겠는가? 십대 고수다 십대 고수.
암살이나 물건 회수 따위로 움직이기에는 덩치가 좀 큰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목표 후보가 예지나 우리 아빠를 포함한 최소 랭커급들이니 그럴 수는 있지만, 그래도 크게 나온 건 사실.
거기에 더 큰 이유도 있으니, 성환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중국은 유리를 딱히 별 볼 일 없는 거처럼 굴어서.”
난 다시금 홍차를 입에 머금으며 성환에 말에 과연 납득간다는 감탄사를 내었다.
미국이 이터널을 대우한다면 중국은 무검산을 대우한다는 건가?
장 첸의 영향도 있겠지만, 미국 정책의 반작용도 있겠지.
미국에서 역으로 무검산을 차별한다고 했으니.
거기에 불만을 가진 무검산 플레이어가 중국으로 흘러가고 그로 인해 중국에서는 역으로 이터널 플레이어를 차별하는 것.
물론 그렇게만 보기에는 유리라는 존재의 크기가 너무 크기는 하지만, 유리는 정상회담에서 대놓고 중국 측에게 적의를 표한 사람이다.
이것도 이유에 포함되겠지.
그들의 의견을 듣고나서 난 다음으로 유리에게 물었다.
“미국은? 거긴 좋다고 하지 않아? 돈 많이 준다며.”
사실 반쯤은 떠보는 질문.
미국의 작업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냐는.
유리는 분명 미국에게 최우선 영입 대상일 테니까.
“30조 정도 부르던데, 뭔가 실감이 안 나.”
“3.....30조?!! 이런 미친?”
“근데 미국도 마찬가지야. 은근히 성환이랑 헤어지라고 하는 분위기여서.”
“나한테도 돈은 많이 주겠다고 하는데 이런저런 조건을 많이 붙이더라.”
성환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미국이 성환에게 제시한 조건.
2차 전쟁이 발발하면 반드시 전선에 선다는 걸 계약서에 명시할 것.
미국 이주 후 무검산 플레이어들을 통솔하는 길드를 만들 것.
그리고 그들에 대한 관리와 책임을 맡을 것.
기타 등등
혜택 자체는 유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일부로 똑같이 맞춘 듯하지만, 그 안에 짊어질 리스크를 상당히 크게 만들어 놓았다.
마치 알아서 떨어져 나가라는 듯이.
그리고 중간중간 유리와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유도했다고 하고.
아무래도 성환이는 중국 쪽으로 갈 것이라 예상한 게 아닐까 싶다.
유리가 미국의 제1영입 대상이라면, 성환은 중국의 제1영입 대상.
동시에 쥐기는 서로 많은 피를 볼 게 분명하니 떨어뜨려 놓는 거지.
“멍청하긴.”
둘을 단순히 가벼운 연인 사이로 본 것인가?
하긴 서류상으로는 그저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그건 오산이다.
내가 맨날맨날 닭살 커플이라고 놀려도 저 둘이 끄떡도 안 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난 슬쩍 그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식은 언제?”
“곧이지”
“축의금 들고 오지 마라. 넌 따로 식비로 받을 거니까. 각이 보여. 1000원 한 장에 식당 전체를 휩쓸, 니 모습이.”
“씁! 까비. 이제 돈도 많이 벌면서.”
“우리가 할 말이다.”
개인사를 아는 이는 몇 없지만, 저 둘은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격변의 날이 오지 않았다면 이미 식을 올리고 신혼여행까지 끝났을 정도.
단지, 어쩔 수 없이 형식적인 절차가 미뤄졌을 뿐, 둘은 이미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간 사이라는 의미지.
‘이런 둘을 따로 잡으려 하다니.’
시간이 길었다면 이 사실을 알았겠지만, 급하게 한 서류 조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거니까.
아마 와서 확인하고 어림짐작으로 둘 다 미혼이니, 동거하는 사이, 가벼운 연인 사이로 파악한 실수겠지.
‘예지한테는 천운이였네. 둘 다 잡을 찬스가 넝쿨 채로 들어온 건가?’
난 잔을 내려놓으면서 지금까지의 밑밥을 토대로 둘의 의중을 짐작하며 물었다.
“미국도 싫고, 중국도 싫고, 그래서 발할라에 가고 싶은데, 나도 같이 와 줬으면 좋겠다? 속 보여.”
““하하하......””
둘은 부끄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너도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응?”
“예지도 마음 고생 심할 텐데. 답은 얼른 줘야지. 이렇게 간만 보는 건 좀 그렇잖아?”
“뭔 소리야. 난 어제 제안받았어.”
““예?””
얼빠진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얘들은 진작에 예지한테 들었나 보네.
음.......이것까지 읽은 노림 수 인가?
이 둘이라면 어차피 타국으로 갈 가능성이 철수 다음으로 낮은 이들이다.
어제 예지랑 대화를 나눴을 때, 거의 영입에 가깝다는 소식을 듣긴 들었었지.
최대한 발할라의 몸집을 키울 수 있는 데로 키운 다음 내게 확실하게 어필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제안하거나 부탁할 때, 상대에게 색안경이 끼워져 있지 않다는 전제 하에. 처음이 가장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상 처음 거절 당하면 그 뒤로는 거절에 대한 망설임도 사라지고, 안 좋은 부분이 눈에 띄게 된다고.
‘그렇다면 예지가 어제 제안한 건 슬슬 타국이 내 정보를 알아낼 시기라는 걸 감안하고 최대한 기다렸다 한 걸 수도 있겠네........하여간 대단한 사람이야.’
성급하게 굴지 않고 착실히 몸집을 키울 수 있는만큼 키운 최고의 모습으로 보인다.
예지가 들고 왔던 자료, 계획서, 준비.
자기 자신만의 시간 카운트 만큼 기다리고 기다려 최대한 모은 거라는 거겠지.
여러모로 난 사람이다.
“음......근데 궁금한 게, 이게 너희 둘이 같이 올 일이냐? 전화번호 받았을 거잖아? 전화로 해도 괜찮을 일인 거 같은데.”
“예이, 이게 무슨 전화로 할 이야기야.”
“우리도 성의를 보여야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둘은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난 그런 그들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조금 큰 소리로 잔을 내려놓았다.
─탁!
“어이, 닭살 커플. 목적이 뭡니까?”
“그.....그게 말이지.”
“하하.....마력 많이 드는 건 알긴 알지만.....”
이후 이어진 둘의 부탁.
난 그것을 듣자마자, 샤오린을 살려 보낸 걸 뼛속 깊이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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