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인재를 찾아 동방의 나라로
* * *
편의점에서 적당히 시간을 죽이고 온 난 다시 집에 돌아와 커튼을 치고 주방을 찾았다.
아까 음료수를 마시기는 했지만, 음료수는 밥이 아니잖아?
까치발을 들어 위쪽 칸에서 즉석밥을, 냉장고에서는 반찬통을 꺼냈다.
반찬이야 차갑게 먹어도 상관없는 종류들이니 그대로 락앤락 뚜껑을 열어 식탁으로 직행하고, 즉석 밥은 살짝 뜯어서 전자레인지로.
타이머는 1분 30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시간은 정말 길다.
뭘 하기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는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니 참 신기할 노릇.
별수 없이 난 부엌에 기대 커튼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내가 이렇게 살 줄이야.......역시 미래는 모르는 일이여.”
매일 보면서 실감이 나지 않는 풍경이다.
아침 햇살로 반짝이는 푸른 물결의 강물.
삼국시대 전성기의 상징이자 서울의 상징 한강이다.
거기에 집은 어떻고
노량진의 원룸 따위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마이 홈.
비록 여럿이 살기에는 좁을 수 있지만, 혼사 살기에는 오히려 이보다 사치스러울 수 없으니, 이곳이 나의 둥지, 나의 요람.
난 자립에 성공했다.
그것도 한강 변에 집을 얻어서.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들겠지?
27세 취준생이란 미명의 백수.
심지어 특이 케이스라 아직 신분 복구도 하지 않은 내가 무슨 수로 이런 곳에서 자립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딱히 자랑스럽게 말할 얘기는 아니지만, 설명해 드리지.
* * *
이터널 측 사람들이 대거 제주 전선에서 빠진다는 주제로 회의를 진행한 후
나와 내 가족들은 오랜만에 식사 자리를 가졌다.
장소는 회의장 근처의 고깃집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앞에두고 아무 말도 없이 정적만이 흐르자, 날 제외한 세 사람 모두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누가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보라고 서로 눈치를 주면서.
결국 첫 번째 희생양으로 당첨된 아빠가 먼저 어럽사리 입을 열었다.
“아들.”
“아들 아닌데?”
“딸이라고 하면 때릴 거지?”
“네”
“.......하....그.....시혁아, 언제 집에 돌아올 거냐?”
“돌아가겠어요?”
살이 배일 것 같은 차가운 대답에 아버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보시다시피 우리 가족은 현재 냉전 중.
당연한 것이 내 입장에서는 과장 조금 더해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된 기분이니까.
트루먼에게 트루먼 쇼 세트장으로 돌아갈 생각 있냐고 물으면 돌아가겠냐고?
경기를 일으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비록 지금까지는 전선에서 혹여 내게 마음 쓰다 다치는 일이 있을까 우려되어 참고 있었지, 이제는 아니다.
적들이 돌아가고 미국이 간을 보다가 뉴욕에 다시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난 바로 집을 나왔다.
“그......오빠, 여자가 돼서 불편한 것도 많잖아. 일단 집에 돌아오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무슨, 가끔 공용화장실 햇갈리는 거 말고는 없는데?”
“생리대는 쓸 줄 ─ 히익!!!”
꺼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에 대해 소라가 입을 열자 내 눈빛이 사나워졌다.
저게 돌았나?
더 말하면 뒤지게 맞는다 라는 무언의 경고를 쏘아 보내자 소라는 바로 잽싸게 엄마 뒤로 몸을 숨었다.
그렇게 소라와 아버지가 아웃.
마지막 최강의 타자가 내 앞에 섰다.
“시혁아, 엄마가 미안해. 그래도 일단 집에 돌아오면 안 될까? 너무 걱정돼서 그래.”
“.........걱정할 게 뭐 있다고. 저 얼마나 강한지 알잖아요?”
아무리 나라도 어머니에게 날 선 반응을 돌려주기는 힘들다.
거기에 저 얼굴은 반칙
가뜩이나 하이엘프가 되면서 진화한 외모에 가련함과 애절함이 더해지니, 잘못하면 천하의 역적이 될 분위기다.
하는 수 없이 그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채 고기를 우물우물거리며 대답했지만, 어머니의 물러서지 않았다.
“소라 말처럼 불편한 것도 많고, 무엇보다 너 아직 신분 재발급 안 했잖아. 찜질방이나 모텔 같은 데서 자고 있지? 그러면 안 돼.”
“크으....”
언제나 그렇지만 정론은 강력하다.
어머니 말대로 난 신분 재발급을 받지 않은 일종의 불법체류자.
성별이 변한 특이 케이스다 보니 소식이 알려지면 귀찮은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걸 알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과거 27세 남자, 강시혁이라는 신분은 증발했고, 릴리 아스트레아스라는 소녀만이 남은 상태.
겉모습으로는 영락없는 중학교 1학년 소녀에 ‘가출’이라는 키워드가 붙은 셈이다.
내 반응을 보고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건지 어머니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날 설득할 또 다른 재료를 꺼내 들었다.
“돈은? 돈도 거의 없잖아. 제주도의 마정석 수거는 이제 겨우 끝났어. 그거 분배하려면 한참 남았다는 말이야. 정부도 지금 그 문제를 걸고넘어져서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 몰라.”
“.........오벨리스크 마정석은 가지고 있어요.”
“시혁아, 그만하자. 엄마가 정말 미안해. 일단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미안함과 애절함이 담긴 목소리.
이성적으로는 여기서 항복을 외치고 져주는 척하면서 돌아가야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나도 만만치 않게 억울하다.
그렇기에 난 어머니의 감정을 같은 감정으로 돌려주었다.
“내가 말로 하면 안 듣는 자식이었나요? 내가 그렇게 못났어요? 그러길래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데요?”
“그건......”
부모님의 마음은 나도 이해한다.
이건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게임 같은 것으로 먹고 사는 걸 바랄까?
번듯하게 대학을 나와
직장을 가지고
결혼해 자식을 가져 자식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길 바라셨겠지.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겼기에 더더욱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셨을 거다.
나도 취준생에 아르바이트도 전전하면서 보아온 것이 있다.
직업이란 수익도 수익이지만,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 가도 중요한 문제.
젊은 시절이야 소라처럼 방송과 곁들여 유명세와 명성을 가지지, 나이가 들면 그리 고운 시선이 받을 수 없는 게 게임이란 분야다.
더군다나 비전도 없으니.
혹여라도 하던 게임이 사장되기라도 하면 어떡할까 불안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왜 말로 설득해볼 생각은 안 하셨는데요?”
부모님은 잘못된 방법을 고르셨다.
말로
대화로 풀었어야 했다.
최소한 내게 선택의 기회는 주셨어야 했다.
내 인생이니까.
결과를 떠나서 그게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배신하지 않는 행위이고 존중인 것이다.
““........””
내 말에 차마 아무 답변도 못 하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역으로 반격에 성공했으니 통쾌해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입안이 텁텁해지니 난 물을 찾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체 서로 이게 뭐하는 짓인지.
그때 앉아있던 소라가 쭈뼛쭈뼛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오....오빠가 정말 재능이 넘쳐서 그랬어. 내가 알아. 만약에 그러지 않았으면 오빠는 무조건 이쪽 길로 왔을 거야. 장담해.”
당시 시혁에게 VR을 가르치던 소라는 그때를 회상하며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기본적인 설명도 없이 3단계 위를 가르쳤었다.
그럼에도 어찌저찌 따라와 버려서 배우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구박하며 단계를 2단계 더 올렸지.
그제서야 시혁은 조용히 물러났던 것이다.
“실제로 봐. 오빠는 레벨을 떠나서 누구보다 잘 싸웠잖아? 남들은 정해진 스킬만 쓸 때, 오빠는 마력으로 신체 강화는 기본으로 하고, 손가락 튕기는 걸로 고위 마술도 난사하잖아?”
알 수는 없지만, VR의 재능은 현재의 몸의 재능으로 변했고 한다.
전투 센스, 동체 시력, 상황 판단력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마력 조작, 내공 수발, 캐스팅 속도 등의 직접적인 부분까지.
소라가 그 대표적 예시.
높은 수준의 재능으로 벌써 새로운 스킬까지 익혔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눈앞의 소녀에게는 조족지혈.
소라가 하루종일 집중해서 성공한 마력 활성화와 그를 통한 신체 강화를 시혁은 이미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고.
스킬의 조합을 통해 공격마법의 속성을 추가하거나 변환하는 연습 중에는 아예 마술 자체를 융합하거나 어레인지해서 날아다니고 있었으니.
같은 흑마술을 배운 사람들은 시혁을 보며 저딴 마술 흑마술 카테고리에 없다며 비명을 질렀었다.
그러나 난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속단이고 예단이야. 그게 날 속일 이유가 되지는 못해.”
“히잉......”
결국 평행선이다.
하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금전과 신분의 문제는 무거운 법.
부모님은 이 평행선을 부수기 위해 일부분을 포기하고 타협에 들어갔다.
“좋다. 독립해라, 대신!”
“일단 집에 들어오렴, 네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준비가 된 후에 나가. 그때는 잡지 않을게. 지금 꼴을 더 봐줄 수 없어.”
가진 힘을 떠나 일단 겉모습은 여중생이다.
오히려 소라가 언니라고 불려야 할 정도.
그런 날 밖에서,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는 이와 함께 재우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의지.
결의의 찬 부모님의 기세에 난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그걸 어떻게 믿어─”
“아까 네 말대로 마정석 문제만 해결되면 네 손에는 큰돈이 들어오잖니? 금전은 이미 우리가 손쓰기도 전에 끝났어.”
“문제는 신분이지. 아비가 무슨 수를 써서든 해결해 보마. 나도 내 자식이 불법체류자인 건 용납할 수 없어. 마지막으로 믿어다오.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 보마.”
정론에 더해 타협안을 제시하는 부모님의 설득
거기에 울먹이는 소라의 표정까지 추가.
아, 결국 여기까지 인가.
‘돌아가기 싫은데.’
지금은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워하는 건 아니기에 사실 져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속여 먹은 게 괘씸하지 않은가?
비록 부모님도 어느 정도 물러선 제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타협안을 받아들이는 건 또 내 의지가 꺽이는 것 같으니까.
솔직히 그 어떤 제안을 해와도 난 이번에 내가 물러서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몰리니 힘드네.
이대로 궤변을 들어가며 물어지기라도 해야 하나?
그렇게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깊은 한숨을 쉬며 서서히 타협안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을 때.
─화라락
옆 테이블과 자리를 구분하기 위한 블라인드 칸막이가 사라지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고깃집과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여인이.
“넌.....”
“예지 씨?”
“연합장 언니?”
우아하게 혼자서 고기를 한 점 한 점 구워 먹는 은발의 성녀, 한예지
그동안 대화에 집중하는라 몰랐는데 워낙 고깃집과 괴리감 넘치는 모습에 이미 주변의 모든 손님의 집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조용히 고기를 굽고 있었고.
우리의 대화가 클라이막스에 가까워지자 티슈로 입가를 정리하고 칸막이를 치웠다.
당황하는 가족들을 뒤로한 채 나를 바라보는 예지는 흥미롭다는 듯이 작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름이 강시혁이었군요. 이름 석자 알기 더럽게 힘드네. 어디 가면 내 명함 한 장 받겠다고 별짓을 다 하는 거 아나 몰라.”
“아니 네가 왜?”
“후훗, 글쎄요? 오늘 운수가 좋은 날인 가보죠?”
그저 우연히 저 가족 3명이 모르는 사람을 끼우고 가는 걸 보았고.
때마침 일정이 비었으며
운이 좋게도 그들의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미지의 소녀가 저 가족의 죽은 장남이라는 걸 유추하는데 성공
주제가 되는 사건은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흐름상 지금 시혁이 곤란하다는 것도 알았으니, 이 어찌 운이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예지는 터벅터벅 자리를 돌아 내 앞에 다가온 후 멋들어진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 동료가 되세요. 보물섬을 찾는 모험 대신 보물섬의 부를 약속합니다.”
비천한 성장형 주인공이 아닌 완성형 먼치킨
밀짚모자 해적이 아닌 티아라를 쓴 성녀님
스팩타클한 모험이 대신 안락한 삶
보물섬 대신 보물섬의 부.
뭔가 전에 봤던 휘광과는 다른 휘광을 등에 업은 예지의 자태.
난 이미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 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한 가족들은 입을 쩍 벌리며 반대를 외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고 한다.
한예지: 히히! 개꿀ψ(`∇´)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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