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뒤끝 가득히 찾아온 평화
* * *
“아나........”
난 소환수로 파악한 타 지부의 전황을 듣고 탄식했다.
이런 영악하고 조심성 많은 시끼를 봤나.
어쩐지 기분이 쌔 하더니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다.
“릴리 씨? 왜 그러세요?”
“뭐, 깜빡하신 거라도?”
잔뜩 일그러진 내 얼굴에 민준이와 연희가 다가와 의문을 띄우니, 난 그저 한숨을 푹 쉬고 난간에 걸터앉아 타 전선의 소식을 알려줬다.
“일망타진은 우리만 성공. 아무래도 다른 곳은 실패한 모양이야.”
“네?!!”
“어.....얼마나 놓쳤데요?”
“적게는 2할, 많은 곳은 4할 정도.”
물론 내가 있는 곳이 완벽한 섬멸을 성공한 이유에는 엘라임이 큰 지분을 차지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타 전선의 소식은 아쉬운 결과물이다.
당장 아크 리치 시몬은 방식은 달라도 엘라임이 만든 벽과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으며, 엘더 벤시 멜라티스의 경우에는 광역 저주기를 잔뜩 무장한 존재이니 집단전에서는 그야말로 탑티어 중에 탑티어.
뭐, 스켈레톤 킹 카녹스나 듀라한 나이트 페르난도야 끄덕끄덕
이해해야지 광역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섬멸전에서 활약하기는 힘들테니까.
하지만, 어비스 나이트 플루라가 무려 3할이나 놓치다니......
속도 하나만큼은 날 포함해서 소환수 최강인데.
거기에 뒤의 카녹스나 페르난도처럼 광역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난 소환수들을 무능하다 말할 수는 없었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
“이놈들 시간차 공격을 했어.”
““예?!!””
엄지손톱을 질근질근 물어뜯는 내 말에 민준과 연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나도 그런데.
설마 거기서 훼이크를 걸 줄이야.
혼돈 전체가 하나라는 가설을 세웠을 때 미리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막상 들떠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아니, 걔들 오는 시간이야 지들 마음대로였지만, 항상 같이 공격했잖아요?”
“예!! 그래서 우리가 어디 지원도 못 가고 자리만 지켰고!!”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냐는 듯 소리치는 민준과 연희의 발언에 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내가 가장 묻고 싶은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해도 짐작 가는 구석은 있다.
재들도 똑똑하니 금방 알겠지.
뻔하잖아?
모든 존재가 혼돈의 하나라는 말은 즉, 가장 먼저 가설을 세우고 혼돈의 일부를 잡은 성환이 가져온 혼천석도 놈의 일부라는 뜻이다.
거기서 혼돈은 낌새를 느낀 거겠지.
‘아, 저놈들이 날 가둘 졸라 위험한 뭔가를 가졌구나’ 하고.
그래서 그런 수단이 있으면 반드시 사용할 내게 제일 우선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뭐가 있는지 간을 본 거지.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이 X됐음을 깨닫고 타 지부로 향한 무리들에게 도주를 지시한 거다.
“아오~~!! 진짜!! 이러면 용제 모가지 따러 갈 수가 없잖아!!!”
나는 괜히 바닥을 퍽퍽 밟으면서 씩씩거렸다.
그나마 전선의 사람들이 임기응변을 발휘해 선제공격을 감행해서 7할 가까이 혼천석에 가두는 건 성공했지만, 결국 3할은 놓쳤다는 뜻이다.
젠장.
그럼 얼마나 남은 거지?
가끔 멍청한 짓을 하기는 해도, 3할을 놓쳤으니 3할이 남았다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필시 일부는 여력을 남겨둔 수가 1만일 터.
아마 전체 비율로 따지면 최소 4할, 많으면 6할까지는 생존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가운데 값이 5할이 남았다면.....
이 지랄 맞은 전선이 아직 안 끝났을 지도 모르지.
우씨!!
“짐승 새끼가 왜 이렇게 대가리가 좋은 거야?!!”
“그거 동물 차별이에요. 동물들 은근히 머리 좋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제주도.....용제 모가지 따야 한다고!! 왜 난 햄보칼 수가 없는 거야?!”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는 릴리를 보며 연희와 민주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무슨 용제한테 돈이라도 맡겨놨나 싶겠지만, 두 사람은 안다.
릴리가 왜 용제에게 이를 가는지.
아니 모를 수가 없지,
자신들도 마찬가지고 제주도에 처음 갔던 모두도 같은 심정 일테니까.
지금도 눈을 감고 회상하면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내려오는 용의 군세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그러나 넓은 날개를 벗어날 수는 없으니
결국 발톱에 찢겨지고
이빨에 물어뜯기며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에 단말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가족들을 보며 구슬피 우는 통곡 소리.
악몽의 기억이다.
힘이 부족해 분통을 삼킬지언정 그 전장에 참여한 이들 중에 용제를 죽이고 싶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특히 용제와 싸웠던 릴리는 더더욱
당시 연합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괜찮다는 위로를 건넸지만, 릴리는 엄청나게 분통을 삼키고 있었다.
본인이 놓쳤다고.
조금만 더 잘 싸웠으면
조금만 더 용제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그 전투에서 용제를 죽일 수 있었다며 뼈저리게 후회했었지.
‘사실 릴리 씨 잘못이 아닌데 말이지.’
당시 가까운 전장에서 싸웠던 민준은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않을 걸 안다.
릴리는 정말 잘 싸웠으니까.
오히려 그날의 책임은 도주를 막지 못한 자신들에게 있었지
애초에 용제가 도주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용제와 릴리의 전장을 지키던 사람들이 밀려드는 군세를 버티지 못하고 뚫렸기 때문이다.
물론, 거의 목숨을 내놓다시피 달려드는 용들을 어떻게 막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변명이고 결과는 막지 못했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 용제에게 빠져나갈 기회가 생긴 거고.
아니었으면 용제가 튀려고 했던지 계속 싸우려고 했던지 간에 그날 끝장을 봤겠지.
당연히 릴리의 승리로.
민준과 연희는 분통을 삼키는 릴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아쉬운 위로를 전했다.
“어차피 금방이에요.”
“네, 혼천석이 효과가 증명됐으니, 다음 전투에서 마무리를 짓죠.”
“...........오겠냐고.....”
바보도 아니고
무적이 깨지고 적에게 자신의 심장을 후벼팔 비수가 들렸다는 걸 알았는데 올 리가 있나.
아마 더 간교하고 영리한 수단으로 날 이곳에 잡아두려고 하겠지.
그러나 민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래도 분명 타격이 있을 건 분명하잖아요? 용제의 군세도 요즘 들어 수가 줄고 있다고 하고, 특히 저번 전투에서 철수 형이랑 연합장 둘이서 유색 고룡 12기에 용왕급을 4기나 썰어서 용들도 기세가 확 죽었다고 하니까요.”
“에~~~ 정말?”
난 민준이 말하는 희소식에 내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세워졌다.
뭐야? 그렇게 잘 싸우고 있었어?
올~~~ 역시 한국 게이머!
하긴 용들도 무한일 리는 없지.
혼돈의 경우에도 엄밀히 말하면 이번에 상당한 피해를 준 것이 사실이고.
확실히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네.
민준에 말대로 우리는 이기고 있다.
단지 적의 수를 몰라서 발을 동동구르고 있을 뿐.
그리고 만약 용들의 기세가 죽었다 한다면.....
“나랑 모선이랑 배치를 바꿔도 될지도?”
“그렇죠!! 뭐, 소환수는 어쩔 수 없으니 그거 땜빵 치려면 이터널 사람들이 좀 와야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제주 전선이 포위망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용들의 기세가 죽었다면 내가 갈 수도 있다는 말이지!”
정말 어쩌면 이번에 내가 제주도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용제 모가지를!!!
난 주먹을 꽉 움켜쥐며 소리 없는 쾌재를 외쳤다.
음.......근데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그 뭐였더라?
주인공 사이타마 훈련법으로 레벨업 하는 소설 소환수들은 막, 거리 제한도 없고 마나 소모량도 없고, 심지어 소환수랑 위치 교환도 할 수 있다던데......
나?
내 소환수는 거리 제한이 미묘하게 있어.
그니까 거리에 비례해서 마력 소모량이 많이 든다는 의미.
또 멀면 강화도 안 되고....
딱 내가 북부 전선의 중간 지부에 있는 이유지.
사실 지금도 좀 간당간당해서 포션도 주기적으로 마시고 있어서 버티는 거야.
생각해보니 거리 무한이랑 소모량 제로는 너무 사기 아니냐?
나도 혼자 무쌍 찍는 먼치킨 되고 싶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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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에 가본 적 있는가?
왕 혹은 황제 및 황실의 혈통들이 거주하는 궁전 말이다.
크기에서부터 압도당하고 화려한 조명 눈을 현란하게 하는 장신구들이 빼곡한 궁전,
영국의 버킹엄 궁전도 유명하고 세계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루마니아의 국회 의사당도 또한 궁전이다.
중국의 자금성 또한 궁전이라고 할 수 있지.
뭐, 지금은 왕이 존재하는 나라가 대부분 사라진 만큼 과거에 비해서는 수가 줄고, 용도 또한 변한 곳이 대부분이지만, 전성기 궁전이 궁전 본래의 기능을 하던 시기에, 그것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한다
그것들이 아무리 화려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재보가 쌓여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곳의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음......”
마치 금실을 짜낸 듯한 머릿결에 천하의 명장이 조각한 듯한 얼굴을 가진 사내가 앉아있는 공간은 가히 신화 속의 한 장면과 같다.
그가 앉아있는 옥좌는 순수한 금 중에서도 최고의 품질로 엄선한 금을 베이스로 오리할콘, 아다만타티움을 섞고 거기에 엘프의 눈물 같은 세기의 보석들을 아낌없이 사용해 당대 최고의 드워프가 조각한 작품이고
여기저기 놓여진 장신구 또한 그저 눈을 즐겁게 하는 도구가 아닌 시대에 족적을 남긴 마법 아티팩트
신비로운 원형의 문양이 그려진 바닥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 미스릴에 지고의 마법진이 그려져 이곳의 한시도 빠지지 않고 마력이 충만하게 하는 장치이다.
만약 마법, 마나 검술을 수련하는 이가 이 공간을 발견한다면 기절할 지도 모를 신물,
그러나 이러한 모든 재보를 소유하고 또 그 모든 것이 하찮게 볼 수 있을 최강의 신구.
[용창 드라고니아] 마저 가진 남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기쁨도, 만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만족은 거녕 오히려 노기가 비치고 있으니
그는 갑자기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 여인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우드득!!
“빌어먹을 가이아의 마녀 따위가.....”
여린 마녀가 새긴 저주의 통증.
이해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다.
이제 막 발아한 가이아의 존재가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래, 양보해서 힘만이라면 고개를 끄덕여 주지.
별의 힘이 분배되고 최고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면 힘만은 가능한 이야기니.
하지만 기술은!
그 마법은!!
그 신구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별이 가진 힘이 생명체에게 주입되어도 어디까지 힘일 뿐, 그걸 갈고 닦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대체 그들은 무슨 수로 그렇게 싸움에 익숙할 수가 있냔 말이다.
“설마 테라가 이미 발을......아니, 그럴 수 없다, 애초에 그건 테라의 마법도 아니었어.”
잠시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스쳐갔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없으니까.
자신이 테라의 주민보다 한발 앞서 가이아에 당도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던가.
별의 심장을 손에 쥐기 위해
행성의 주권을 손에 넣기 위해
문을 만들고, 하찮은 것들과 동등한 계약까지 맺어가며 이렇게 당도했는데 테라의 버러지들이 이미 옛날에 도착해서 마법까지 전파하고 있었다?
거기에 무구까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다.
당장 확인할 수도 있고, 확인할 가치도 없는 일.
설령 운명의 장난이 일어나 그 가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테라의 주민들이 마법을 전파할 이유가 없으니.
그들의 목적도 자신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아리아스타.”
노기와 함께 서서히 머리에 자라나는 뿔과 피부에 돋아나는 비늘
세로로 갈라진 황금의 용안을 보이는 살기로 가득 찬 마력을 발산하는 존재.
용제 카시야스
그는 이제는 사라진 가이아의 대리인을 떠올리며 분노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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