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혼돈에게 바치는 카오스 (3)
* * *
시산혈해(?山血?)란 성어가 있다.
사람의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피가 바다같이 흐름을 뜻하는 고대의 말인데,
만약 눈앞의 마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단어보다 적절한 단어는 달리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마수의 시체가 금방 재가 되어 사라지는 걸 감안하더라도.
“하하하───!!! 뒤져라!!”
미친 듯한 광소를 터트리며 거대한 낫으로 혈로를 그리는 소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릴리.
검붉은 낫이 하나의 궤적을 그릴 때마다 수십의 마수들이 갈기갈기 찢어지니 압도 그 자체다.
뒤따르는 민준과 연희는 모든 것들을 섬멸하는 릴리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핀트 완전히 나간 거 같은데?!!”
“릴리 씨!!! 저....정도를!!!”
“알께 뭐냐?!! 내가 쌓인 게 얼마인데!!”
어떻게 봐도 반쯤 이성을 놓고 폭주 중인 릴리에게 둘은 진정하라는 말을 전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는다.
뭐, 그녀 말대로 쌓인 게 있으니 이해는 하지만, 두 사람이 진짜 진정하라고 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으니 바로
[블러드 스피릿츠 얼터 에고]
릴리가 만들어낸 피의 인형들 때문이다.
릴리 하나만 놓고 본다면 매우 강하다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저 낫을 들고 휘두르는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만, 저 피의 인형의 중심에 선 모습은 사뭇 달랐다.
엄청난 괴리감에서 공포심을 자아내는 모습
지금의 릴리는 아름다운 춤사위처럼 부드럽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해도 그리는 참격 모두 의미를 가지고.
낫을 감싸는 검붉은 화염은 대지를 불태우는 압도적인 힘과 마력을 선보이니,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넋을 잃을 광경이라 할 수 있다.
힘과 기교를 겸비한 소녀의 무도
하지만 인형들은......
“나 저거 본 적 있어. 디지털 공포 시뮬레이션할 때. 이름이 뭐였더라?”
“하데스요. 그거하고 VR접속기에 한 3일간은 들어 가지도 못 했는데.....”
마치 시체가 녹아내린 듯한 비주얼.
눈도 입도 없는
썩은 시체를 쥐어짜 살점과 핏물을 점토로 릴리를 대충 본 떠 만든 듯한 모습이다.
처음에는 그저 붉은 형상의 릴리를 본뜬 마네킹 같은 모습이었기에 기분이 나쁠 뿐 무섭지는 않았는데.
이후 마수들을 도륙하며 피를 흡수하면서부터 점점 형상이 달라졌다.
어떤 인형은 스스로 얼굴을 찢어 뺨에 입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고.
어떤 인형은 낫을 버리고 길어진 손톱으로 마수를 직접 찢어 갈기기 시작하며
또 어떤 인형은.......
기괴해지고 뒤틀려져 가는 인형들.
이제 인형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이형의 괴물. 그래 저건 괴물이다.
마수도 처음 보았을 때 무서웠지만, 릴리가 만든 저 괴물에 비하면 이제는 귀엽게 보일 수준이다.
그러한 괴물들의 중심에서 춤추는 소녀의 모습은 심한 괴리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마녀......”
“그러게 진짜 마녀다.”
아름답다.
릴리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귀여운 소녀다.
아바타를 만들었을 때 얼마나 미적 감각이 좋아야 저런 모습이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릴리는 반칙적으로 예쁘며, 동시에 살짝 창백한 피부와 백색의 머릿결이 가련한 미를 뽐낸다.
그런 소녀가 지옥도 위에서 피의 괴물들과 함께 노닐고 있으니, 마치 혈수의 호수 위에 피어난 수련화.
지옥에 내려온 천사 그 자체.
비록 지옥에 내려온 천사인지 아니면 천사의 모습을 취한 악마인지는 모르기에 이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그저 마녀라는 단어로 릴리를 불렀다.
“나름 나도 힘 좀 써보려고 했는데.”
“자리가 없네.”
“참......랭커 찍고 버스 탄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릴리가 싫냐고 묻는다면, 그럴 리가?
천사면 어떻고 악마면 어쩌라는 말인가.
오히려 마녀기에 더더욱 좋다고 할 수 있지.
별 시답지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따지는 천사보다 융통성 있으며, 사기를 들먹이며 사람 뒤통수나 치는 악마보다는 저런 아름다운 마녀님이 좋지 않겠는가.
거기에 그녀는 지금 우리 편
아.....우리 편, 이 얼마나 황홀한 단어인가.
최강의 존재가, 손짓 한 번, 참격 한 번에 수십의 적을 압살하고, 무시무시한 괴물로 적들을 도륙하는 존재가 우리 편이라니, 전장에 섰지만 두려움을 느낄 수 없다.
“가자!!”
“우리도 질 수 없지!!”
“꽁무니 빠지는 놈들은 혼천석으로 뒤처리나 하고 있든지!!”
어느덧 릴리의 광소는 승리의 함성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자 민준과 연희는 그 광경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사람 휘어잡는 마력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아무튼 덕분에 더 수월──응? 야!!! 저것들 튄다!!”
그 순간 민준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앞에서 싸우는 마수를 뒤로하고 도망치는 후열의 마수들.
그걸 발견하고 소리친 민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어느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혼돈의 짐승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아니 저것들이!!”
“감히 37계를 시전하다니!!”
“병X아, 36계야.”
이에 릴리도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금세 그녀의 표정에는 다시금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니들 도망칠 줄 몰랐을 거 같지? 민준!!”
“오! 모두 터트려!!”
민준의 명령 소리에 연금술사들과 무검산 측 제조사들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품에서 트리거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쾅!!! 콰과광!!!
거대한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오며 도망치는 무리들을 일순간에 소멸.
폐건물들을 무너트려 길을 차단한다.
“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용의 황제라는 새끼도 튀는 마당에 니들이 안 튈 거라 생각했겠어?!!”
“도망치는 거 보면 혼천석 효과 직빵이다!! 빨리 막아!!!”
“오늘 끝짱을 보자!!”
잔해로 길을 차단했다고 해도 서둘러야 한다.
어차피 작은 시간 벌이일 뿐.
마수들도 초인....아니지 초수적인 힘이 있는 만큼 저딴 잔해쯤 금방 밟고 올라갈 터.
하지만 어차피 시간 벌이 정도면 충분하기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엘라임!! 시작해!!!!”
도주를 확인하고 미리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던 엘라임이 내 명령에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모아둔 모든 마력을 일순에 해방한다.
─구구구구!!
흔들리기 시작하는 지면에 나와 민준, 연희는 몸의 균형을 잡으며 미소를 짓은 체 솟아오르는 거대한 무언가에 눈길을 돌렸다.
사방에 가두는 가시나무의 성벽.
나무 사이사이로 끔찍할 정도로 날카로운 가시넝쿨이 돌돌 말려져 있으니, 틈이란 존재하지 않는 지옥의 콜로세움이 탄생했다.
“니들은 오늘 절대 못 나가.”
할짝
입술을 핥으며 사냥감들을 바라보는 릴리는 안광을 반짝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둘러싼 인형, 이형의 괴물들도 찢어진 입에서 들리지 않는 비웃음을 쏟아내니 꿈에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광경이 그려진다.
[끼에에에!!!]
[꾸이이이!!!]
벽이 가로 막고 있음에도 도저히 도망치지 않을 수 없는 릴리와 인형들에 모습에 마수들을 다시금 도주를 선택하지만 기다리는 건 그야말로 통곡의 벽.
그러나 압도적 공포가 고통의 두려움을 이겼다.
마수들은 가시가 자신을 상처입히든 말든 그저 발톱으로 나무을 기어오르기 시작
그 모습은 마치 죄를 짓고 벌을 받는 지옥의 죄수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찢어지고 피를 흘리며 저 두려운 존재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성벽을 오르고 오르지만.
─씨익!
성벽의 주인.
백금발 위에 죄와 꽃의 왕관을 쓴 엘프의 여왕은 그런 마수들을 향해 조소를 내뱉었다.
─타각!
주인을 닮아가는 걸 증명하듯 엘라임이 손가락을 튕기자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마수들의 벽에서 가시들이 솟아나 마수들의 몸에 바람구멍을 선사한다.
“내가 말했지. 니들 도망 못 친다고.”
몇몇 마수들은 그렇게 가시에 꿰뚫린 채로도 성벽의 밖을 향해 손을 내밀지만......
─콰아아아!!!
하늘을 나는 골룡의 숨결에 허무하게 사라진다.
가시에서 떨어지며 찢겨지는 마수들과 가시를 오르지도 못하고 탈출로를 찾는 마수들은 마침내 한쪽 벽에 몰리니.
릴리와 피에 굶주린 인형들은 마수들에게 천천히 걸어가고.
사람들은 이제 흡수시키기도 귀찮다는 듯이 죄인에게 돌을 던지듯 혼천석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마수들은 자신을 잡아먹을 혼천석의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다가오는 릴리에게 더한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이제는 불쌍해 보일 지경.
그러나
“참교육의 시간이다. 어디서 gg치고 가려고? 무한 핵쟁이 시끼가.”
핵쟁이에게는 참교육을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튜브 각을
핵조차 잡는 개잘핵의 보유자가 바로 우리가 바로 한국 게이머다.
우리가 니들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지가 불리하다고 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쳐?
─좌아아악!!!
달려드는 릴리와 피의 인형들은 일말의 자비를 남기지 않았다.
포위 섬멸전
완승
* * *
“후~~~ 끝!!”
손가락을 깍지 껴 머리 위로 쭉 올린 난 그렇게 조금 뻐근한 어깨를 셀프로 두드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폐허를 넘어 이제는 거의 사막화가 멀지 않아 보이는 전 도시의 풍경.
다 끝났다며 자축을 벌이고 있는 북부 전선 사람들.
바닥에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검은빛을 발하는 혼천석.
아직 가설이 증명된 건 아니기에 엄연히 승리라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에 도망치는 놈들을 보면 딱히 틀린 건 아니겠지.
“많이도 썰었구나.”
바닥에 돌아다니는 저 돌멩이 하나당 거의 곰 크기의 마수 한 마리라는 걸 고려할 때, 정말 질리도록 썰고 다녔다 할 수 있는 수다.
뭐, 평소에도 그러고 다녔지만, 그때는 하도 질려서 그냥 마술 폭격으로 감응도 감회도 없는 전투를 한 적이 많아서.
‘그러고 보니 나, 은근히 낫으로 싸우는 거 즐길지도?’
이번 전투도 사실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블러드 스피릿츠 얼터 에고]로 만든 인형의 진짜 강점은 강함 따위가 아닌 압도적인 재생력이니까.
본체의 대한 수비, 그리고 본체는 마술 폭격.
이게 정석이지.
효율충인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릴리로 변한 영향이 있는 것이겠지.
여기 사람들도 잔혹하기 그지없던 전장에 대한 거부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뭐, 이겼으면 됐지!!”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이겼으니 만사 오케이!!
확실한 포위 섬멸이었다.
용의 황제라는 양반도 tt를 시전하는데 혼돈이라고 안 그럴까 싶어 미리 작전을 준비해둔 것이 신의 한수로 작용했다.
아니었으면 반절은 놓쳤겠지.
“폭탄 성능 은근히 괜찮네?”
무검산 측 사람들이 꺼낸 건 진천뢰라고 했었고.
판타지아는 공성용 지뢰라고 했었나?
레벨과 무관한 아이템에 교환까지 가능한 도구인데 효과가 보통이 아니다.
“나중에는 시세가 많이 오르겠지?”
레벨이 허접한 사람은 그런 도구로 스스로를 지킬테니, 이렇게 낭비하는 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뭐, 재작자가 또 만들면 다시 헐값이 될 수도 있지만.
그때는 테러에 쓰일지도?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대충 사람들에게 지시를 끝낸 민준과 연희가 잔해에 앉아있는 내게 다가왔다.
“혼천석은 어떻게 하죠?”
“성환이가 처음 가져온 걸 마녀의 도시 측에 맡겼거든. 아마 거기서 감정이 나오겠지. 쓸만하면 예지한테 말해서 이번에 싸운 사람들 한테 분배하고, 문제 있으면 모아야지.”
“그럼 일단은 모아서 관리할게요.”
“응, 부탁해. 혹시라도 몰래 챙기는 사람이 없도록.”
난 아까 주운 혼천석 하나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듯한 마력.
역시 죽은 건 아니겠지?
이 상태로 혼천석을 부숴서 죽어주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럴 확률은 낮겠지
어떻게든 훗날 처리할 방도를 찾든지 아니면, 방사능 폐기물처럼 따로 모아 어디 묻어버려야지.
“뭐, 릴리 씨가 혼내준다고 하면 그럴 사람 없겠죠.”
“으.......저 같으면 절대 안 그래요. 가지고 있으면 꿈에 나올 거 같에서.”
그 핏빛 인형들이.
민준과 연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기긴 이겼고, 또 완벽한 승리지만, 솔직히 그 인형들 만큼은 딱히 다시보고 싶지 않다.
만에 하나라도 적으로 만나면......
“나같으면 깔끔하게 항복한다. 불라고 하는 거 다 불고,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다 내놓고.”
“그거 다 받고 항복 안 받아준다고 하면요?”
“자비를 구걸해서 자살할 기회라도 받아야지.”
민준의 답에 연희도 그럴 거 같다면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 게임 좀 했지만 그건 격이 다르지.
거기다 리얼로 상대하라니....
오돌오돌 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 둘이면 하나 정도는 상대할 텐데? 그거 별로 안 쌔. 몸빵용이야.”
[익스트림 에고]를 써서 강화시키지 않는 이상 여기 둘이면 충분히 하나씩은 상대할 것이다.
거기에 대인전에 특히나 강한 무검산 출신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내 말에 둘은 절대 사절이라며 획획! 고개를 저었다.
“쌔고 말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릴리 씨 상대를 해야 하니 뒤지는 건 똑같고.”
그렇게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연결된 심령으로부터 소환수들이 배치된 타 전선의 소식이 내게 전해져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