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혼돈에게 바치는 카오스 (2)
* * *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검은빛을 발하는 회색 수정.
그것을 바라보며 난 성환이 남긴 말을 회상했다.
“혼천석이라......”
사실 처음에는 그저 혼돈이 만든 마수의 마정석을 발견한 것이라 생각해 실망했었다.
혼돈이 만든 마수들을 모두 하나같이 그저 잠깐 시체로 남을 뿐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기에 이 발견도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딱히 전선에 변화를 줄 정도의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후 이어진 성환의 설명은 그런 내 예상을 깨는 훨씬 놀라운 이야기였다.
혼천석.
그게 지금 테이블 위에 놓여진 수정의 이름이라고 한다.
무검산에 존재하는 신천석이라는 장비 강화용 소모 아이템을 사용하고 남는 일종의 찌꺼기 아이템이라고 하는데, 성환은 이 잡템이 바로 혼돈의 심장을 노릴 회심의 수 일지도 모른다 주장했다.
아직까지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몇 가지 확인 결과 본인은 확신한다고.
“하긴 나도 좀 이상하기는 했었지.”
사실 혼돈이란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건 나나 성환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혼돈의 행동은 누가 봐도 비효율적이고 이상했으니까.
하루에 무려 1만의 괴수를 만드는 녀석이다.
그런데 왜 바보같이 만드는 족족 이곳에 보내는 거지?
10일, 아니 좀 더 시간을 들여 병력을 모아 침공을 감행하면 우리 자신의 생존은 몰라도 전전을 유지할 수는 없다.
수의 폭력, 인해전술이란 그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혼돈은 그러지 않고 매일 1만, 그것도 1점 돌파는 생각하지 않고 전선 전체를 압박하는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도 필승이 전략이 보이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사실상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치면 초보 중의 초보, 아이가 할 법한 수준.
아니, 아이도 조금만 생각하면 될 일이니,거의 무지한 짐승이라고 해야겠지.
그러나 혼돈이 그런 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으니.
“용제랑 타이밍 맞춰서 오는 걸 보면 지능이 없는 건 아니야.”
비교적 최근에서야 파악한 사실이지만, 용제와 혼돈 사이에는 어떠한 협력 관계 내지 최소한 정보의 교환이 존재한다.
내게 패배한 용제가 이후 보내는 군대와 혼돈이 병력을 보내는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고
강력한 마수를 동원해 내가 없는 틈을 일부러 대놓고 노려 날 북부에 잡아두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지능이 없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리가 없지.
또 협력 관계가 아니라면 오히려 날 용제가 있는 곳으로 보내고, 이후 기다렸다 침공을 가하는 편이 훨씬 이득일 터.
성환도 나와 비슷한 추측을 했는지 여러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왜 혼돈은 이런 행동을 취할까?
강대하고 두려운 그런 괴수가 움직이는데 왜 아무도 발견하질 못했지?
정말 있기는 한가?
대체 마수들을 어디서 오는 거지?
등등
그러나 혼돈의 존재 자체는 확실히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중국 측에서 처음 사흉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4마리의 모습을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검은 마수들을 다르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던 혼돈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거대한 마수의 파도.
중국에 있을 때도 이렇게 했다면 진작에 무슨 소식이 나 돌았을 것이고 숨기기에도 수가 너무 많아 최소한 조짐 정도는 발견했을텐데. 검은 마수들은 갑자기 한국에 나타났다.
바쁘다 보니 그동안 의문을 가지고도 쉬쉬하고 있었을 뿐.
그러나 성환은 그 힘든 추적 기간 내내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기를 반복하며 결국 답에 도달했으니.
그 답이 바로
“3마리의 가짜도, 저 모든 군대도 모두 혼돈 그 자체.”
일종의 진흙이나 점토 같은 분열하는 존재가 바로 혼돈이라는 것.
그러니 저 몰려오는 모든 군대가 혼돈이고
사라져 가루가 되는 것들도 혼돈이며
좀 크게 뭉쳐서 만든 것이 궁기, 도철, 도올이라는 게 바로 성환의 주장.
“그렇게 하면 앞뒤가 맞긴 해.”
턱에 손을 올려 쓰다듬으며 곰곰이 고심에 잠긴 난 제법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 주장 대로면 많은 부분이 설명 가능하니까.
매일 딱 1만이 오는 것? 그야 그게 본인의 크기의 한계니까.
최근 모습을 광조 같은 변형체를 만드는 모습도 한정된 본인의 존재 내에서 최대 효율을 뽑기 위해서겠지.
죽여도 계속 오는 것도 결국 죽은 게 아닌 형체를 잃고 가루가 된 것일 뿐.
그 가루들이 어딘가에서 모여 다시 마수의 군대가 되는 것이리라.
자연스럽게 혼돈이 자취를 감춘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이 된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저 무수한 군대로 분열한 것이지.
마정석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마정석이 있는 부분은 어딘가 따로 때어두었고, 지금 몰려오는 건 전부 살점 같은 것이니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럼 이제 남은 의문.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뻔하지, 용제의 회복을 노리는 건가.”
저번 궁기, 도철, 도올과의 전투 때인지 아니면 용제에게 들은 무언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견적을 뽑은 것이리라.
전력을 다하려면 필시 분열한 모든 존재를 한 곳에 뭉쳐야 할 텐데, 그렇게 만든 본체가 날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뭉쳐서 날 쓰러트리고 다시 분열해 전선을 밀어버리면 그만.
하지만 그게 안 될 걸 파악하고 용제를 다시금 전선에 세울 시간을 벌기 위해 이렇게 내 발목을 잡아 두는 것일 터.
“영악한 것들 같으니.”
난 혀를 차며 엄지손톱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용제에게 무슨 수가 남은 건가?
이미 패배했으면서 대체 왜.......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느낌에 이마를 잡았지만, 동시에 내 입꼬리는 끝을 오르고 올라가고 있었으니.
이유는 바로 혼천석!
“원래라면 너 같은 놈은 답이 없지, 무슨 특별한 수단이 없으면.”
잿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걸 청소기로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갑자기 게임 속의 힘을 얻은 우리가 새로운 마술이라도 개발할 수도 없으니까.
사실상 답을 알고도 눈 뜨고 당해야 하는 외통수나 다름없다.
그래.....‘수단이 없다면’
“이런 맛보기 코너 빌런 같으니라고. 니들이 이제 뒤졌어.”
난 우리에게 ‘청소기’의 존재를 가르쳐준 성환에게 감사하며, 혼천석을 들어 조명에 비치게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깔짝깔짝 맛있게 즐기셨는가?
맛보고 튀고, 맛보고 튀고 재밌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우리도 목숨 하나인데, 너희도 이제 기회는 한 번으로 해야지.”
새롭게 발견한 ‘청소기’
혼천석.
이제 역 참교육의 시간이다.
* * *
“대한민국 게이머의 똘 끼에 다시 한 번 경의를”
“아니, 똘 끼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습니까.”
“그럼 잡템을 1만개나 가지고 있는 게 정상이냐?”
오랜만에 수많은 사람을 대동한 전선에 선 난 옆에 있는 남자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비꼬는 말을 날렸다.
그리고 당사자는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냐는 듯 내 귀에 소곤거렸고.
하지만 난 오히려 역으로 반박하니, 아니, 그럼 이게 정상이냐?
사실 성환의 세운 대책에는 작은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혼천석의 용량과 수량
혼돈을 가둘 그릇으로 쓸 이 혼천석은 용량을 보면 그리 크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고 그에 반해 마수의 양은 무지하게 많다는 점이 있었다.
어차피 잡템이니 그리 큰 기대를 해선 안 된다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확인해 보니 짐승 한 마리에 혼천석 하나라는 비효율의 끝을 보여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단순 계산으로도 혼천석의 양이 1만개나 필요했던 상황.
불안한 마음으로 무검산 측 랭커들을 찾아가고 동시에 혼천석 같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다름 아이템이 없는가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었는데..........
“시빠, 아니 강화 대체 몇 번을 한 거야? 거기가 신천석 최상위 강화템이라며?”
“아니.......그걸 최상위라고 하니 할 말은 없는데. 우리한테는 그냥 기본으로 쓰는 거거든?”
“그래도 쓰고 남은 걸 혼자서 만 개 넘게 가지고 있는 게 실화냐?”
“억울하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우리 문파 다른 애들도 다 가지고 있어. 판타지아랑 다르게 우린 종결템 찍는 게 좀 빠르니까. 다 하고 나면 할 짓이 PVP랑 이런 뻘짓 밖에 없어요.”
나를 향해 여러 변명을 토로하는 남자, 최민준, 무검산 9위의 유저로 별무문이라는 문파의 문주다.
짜게 식은 눈빛을 보내는 나를 향해 그가 끊임없이 억울함을 주장하는 사이, 어느새 뒤에서 검은 머리에 예쁜 꽃무늬가 새겨진 무복을 입은 여성이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이니.
“절대 아니에요. 문주 혼자 미쳐서 저러는 거지.”
“야! 연희야!! 너도 종결 찍고 할 짓 없다면서 템 모았잖아?!!”
“아니, 그래도 혼천석을 1만 개 넘게 모으는 짓은 안 했거든요? 그거 뉴비도 버리는 잡템이야!! 이 정신병자야!!”
“아니 난 이름부터 간지 나는 혼천석이니까, 나중에 무슨 이벤트 템으로 쓸 줄 알고 그랬지....”
“응~~ 결국 게임이 섭종 했죠.”
다가온 사람은 별무문의 부문주 연희.
그녀는 민준보고 미쳤네 돌았네 하면서 놀리고 있는데....... 내 눈에는 그냥 다 미친놈이다.
그 이유야 당연한 것이.
‘이년아, 너도 2천개나 가지고 있었잖아.......’
민준에게 1만개라는 어이없는 숫자를 확인하기 전, 무검산 사람들에게 부탁해 가지고 있는 혼천석의 개수를 확인해 보내달라고 이야기했었는데. 그 리스트 가운데 2번 째 줄에 있었던 것이 바로 연희다.
1만이라는 경이적인 수에 비해 하자가 있을 뿐.
마찬가지로 제정신의 범위를 넘은 2천개......
‘2천개나 1만개나.......’
과연 VR게임은 끼리끼리 뭉쳐다닌다고 하는데, 그 문주에 그 부문주인 꼴이다.
그러면선 1만개라고 놀리는 모습을 보니 참.....
난 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다른 사람 앞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어깨에 기댄 낫을 세워 바닥에 툭툭쳐 주의를 환기하며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한테 배분은 잘했지?”
혼천석으로 혼돈, 그러니까 혼돈의 분체들을 봉인하려면 시간이 다소 요구된다.
죽은 후 재가 되어 흩날리는 순간에 혼천석을 내밀고 기다려야 가능한 방법.
죽이는 거야 나랑 소환수들이 하면 될 일이지만, 그걸 잡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이 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선에 선 것이다.
내 물음에 두 사람은 후다닥 떨어지고, 민준은 가슴을 탕탕치며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당연하죠, 우리도 여기 이렇게 매일 있는 거 질리니까요. 오늘 끝짱을 봅시다!”
“문주, 사실 꿀 빨고 있었잖아요. 제주도에 비하면 여기 천국이라면서, 릴리 덕분에 개꿀 빤다고─”
“시끄러!”
저런 모습을 보면 신뢰도가 좀 떨어지지만, 뭐, 문제는 없겠지.
“아, 온다. 엘라임”
하늘의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용용익 보내온 신호에 심령 연결을 강화에 시야를 공유 받은 난 뒤에 선 엘라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검은 무리를 포착을 뒤에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준비합시다. 다른 사람들도”
“근데, 릴리 씨는 왜 항상 저희한테 대리 지위를 해요? 저희 문파원들도 릴리 씨 말 다 잘들을 텐데?”
“네, 사실 릴리 씨 덕분에 전선에서 이렇게 안전하게 있는데.”
당장 12마리인 소환수 전체가 한 마리씩 떨어져 전선을 유지 중이니 그 누가 감히 내 지시에 토를 다냐는 말이다.
거기에 어디 무슨 쌘 놈만 나오면 내가 나서니 더 그런 것도 있고.
뭐, 사실이긴 하지.
근데 그거랑 누구한테 뭐 시키는 게 익숙한 거랑은 다르니까.
난 둘의 물음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가뜩이나 지시하는 일인데 평소 아는 사람한테 듣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위엄이라고는 1도 없는 몸이기도 하고,”
“위엄과는 다른 엄청난 게 있으시니 문제 없어 보이는데.”
“에이~~~ 힘으로 사람 밀어붙이면 나중에 좋은 소리 못 들어요.”
“그게 아닌데.......”
뭔가 살짝 아쉬워하는 듯한 연희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는 민준.
아님 대체 뭐라는 거야?
“아, 거의 다왔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서서히 다가오는 폐허의 먼지구름을 바라보며 난 낫을 세우고, 엘라임도 지팡이를 고쳐잡는다.
그리고 두 사람도 뒤에 선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직검과 연검을 뽑아들었다.
“자, 가볼까나?”
앞으로 걸어 나가며 낫을 빙글빙글 돌리며 검붉은 화염으로 낫을 감싸는 나.
뒤에 선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나와 같이 각자의 힘을 무기에 마력, 내공 등을 실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싸움이지만 몸이 살짝 떨리는 감각이 느껴지나 난 왠지 모르게 들뜨는 기분.
기분 좋은 긴장감과 고조감
오늘은 다르다.
맨날 하던 싸움이지만
늘 보던 광경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드디어
"니들 제삿날이다!!!"
반격의 서막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