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혼돈에게 바치는 카오스
* * *
“어라? 귀환하셨네?”
“응, 좀 전에”
오늘도 시원하게 광견과 광조들을 도륙하고 임시 숙소로 돌아오니 친숙한 얼굴이 날 반기고 있었다.
새하얀 바탕에 최소한의 무늬만이 그려진 단출한 무복
마찬가지로 무복과 한 세트인 새하얀 영웅건을 두른 잘 정돈된 머리 스타일의 사내
바라보기만 해도 영혼이 홀릴 듯한 영엄한 검을 손질하는 그가 바로 무검산 출신의 플레이어인 진천, 김성환이다.
훤칠한 키의 외모로 보면 당연히 릴리인 나보다 연상으로 보이지만, 이렇게 서로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는 것처럼 우리는 의외로 동갑내기다.
사실 의외일 것도 없나?
지금 나이랑 외모랑 비대칭인 사람이 워낙 많아야지.
성환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금 검신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땠어?”
“늘 똑같지. 바글바글 우글우글. 하~~~”
“미안하다. 내가 빨리 찾았어야 하는데.”
“아,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씁쓸한 얼굴로 사죄를 전하는 성환의 모습에 난 뭘 그런 걸로 사과를 하냐는 듯 손을 이리저리 흔들고 옆에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자리에서 마주 본 성환의 모습에는 성한 곳이 없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해진 옷에 땀과 먼지에 범벅이 된 꼴은 당장이라도 샤워실부터 가야 할 듯 하지만,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피운 채 깨끗한 천으로 검을 닦고 있다.
사실 원래 검을 그리 소중히 여기던 건 아니었는데 3일 밤낮을 도망칠 때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한다.
저 검도 보통 검이 아니라 저런 손질할 필요 없는데도 그러고 있어야 마음이 정돈된다고.
고생한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에휴~~~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성환의 임무는 혼돈에 대한 수색이었다.
분명 초반 어그로 자체는 성환이에게 끌렸으니 그가 가장 추척할 가능성 높은 인물이라 선정된 인선.
사실 궁기, 도철, 도올이 혼돈이 만든 가짜라는 게 밝혀져서 혼돈 본체에 대한 전투력이 미지수로 남아 불안한 상황이었지만, 용제 바로 아래 선에서 도주에 문제 없을 사람이 북부 전선에 성환이랑 나뿐이니 어쩔 수 없이 맡아준 것도 있다.
그때 유리가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지,
지금도 그때 당시를 떠올리면 오던 잠도 날아간다.
“아무튼 너도 고생 많았다. 네 덕분에 북부 전선이 유지하고 있으니. 나도 판타지아에서 소환사나 할 껄 그랬어. 소환수 완전 사기.”
“소환수는 맞는데 나 네크로멘서거든? 그리고 돌려 까냐? 나 꿀 빤다고.”
“어? 들켰나?”
성환은 내 대답에 피식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성격 능글능글하긴.
제주도에 있을 때에 비하면 나야 큰놈 나올 때만 좀 힘쓰지 대부분 그리 어려운 일이 없다고 저러는 거지.
그래도 내 덕분에 전선 유지하는 건 맞는데, 저걸 그냥 확 그냥!!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난 한숨을 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성환을 보며 말했다.
“괜히 살렸다. 그냥 궁기 한 끼 식사 되도록 버려두는 건데.”
“그리고 막 ‘감히 내 동료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이러면서 짠! 하고 나오게?”
“아니? ‘훗, 결국 갔나? 뭐, 나약한 놈은 도태되는 법이지. 원수 정도는 갚아주마.’ 하면서 나올 생각이었는데?”
“하하!! 와~~~ 그것도 썩 나쁘진 않은데? 역으로 더 친해 보인다.”
덕담 대신으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 받은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웃음보를 터트리고 나서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진성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런 농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저렇게 배까지 잡아가며 웃어주는지.
뭐, 웃는 모습이 나쁜 건 아니고, 또 내 농담에 웃어주니 오히려 고맙긴 하지만.
그렇게 몇 마디 더 장난을 주고 받은 후에야 성환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며 나를 향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상회의! 정상회의는 어떻게 됐어? 별일 없었어?”
“딱히? 유리가 중국에 선전 포고하고, 나중에 회의 내용 들은 예지랑 아빠랑 연합 사람들 개빡친 거? 그것 말고는 없는데?”
“별일이 아니라 초대형 폭탄이잖아.......아니 그것보다 유리가 선전 포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걔 성격에 회의 참여한 것도 의심스러운데. 거기다 연합장는 그걸 그냥 듣고 있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성환.
하긴 그의 말대로 유리 성격이 좀 소심하긴 하지.
히키코모리 자격증 하급(일단 기초 사회 생활은 함)에 부탁받으면 거절도 못 하는
대학가에 서 있다가 종교라도 권유받으면 이야기는 있는 데로 다 들여주고 결국 교회까지 끌려갈 상이 유리다.
잠시 그런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피식거리고는 난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성환이에게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제주 전선이 다시 폭발해서 우리는 회의에 참여를 못 했다는 것부터───
“야! 제주도가 폭발했는데 니가 여기 있으면 어떡해?!! 용제 뜨면 다 뒤지는 거 몰라?!”
“시끄러! 내가 그 시끼 배빼지에 낫빵을 얼마나 쑤셨는데 벌써 일어나겠냐?! 그 상태면 철수랑 예지가 다구리만 쳐도 충분히 다 도망칠 시간은 벌 거든?”
“회복 마술 있잖아!!”
“흑마술 저주도 있거든?!!”
“........아, 그래? 미안.”
“하여튼. 쌍으로 애인 때문에 눈 돌아가는 꼴 하고는. 나 같은 솔로 서러워서 살겠나.”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 거리는 그를 향해 난 툴툴거리며 몇마디 불평을 던지고 나서야 테이블에 덕을 괴며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정확히는 예지와 아버지, 어머니 같은 회의 참석 예정자들은 다시 제주 전선에 투입.
회의 자체는 불참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근데 여기서 저들이 유리의 모선의 성능을 알았는지 연락을 보내왔고, 유리는 특유의 성격 때문에 무시도 못 한 채 전투 중 회의에 참석.
이런저런 정보를 건네주며 회의 내용을 듣다가 거기서 중국 측 인물을 보자, 여기 성환이 저치들 때문에 북부 전선에서 죽을 뻔 한 걸 떠올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너희들은 뒤졌다’는 말을 던지고 회의를 나갔다고.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성환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더니 이내 마지막 순간 유리가 화냈다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
“지 남친 죽을 뻔했으니, 방금 너처럼 눈 돌아간 거지. 이해는 한다. 다들 쌓인 게 있었는지 잘 했다 하는 분위기고. 또 우리가 나라 정서적으로도 중국한테 쌓인 감정이 많잖아?”
“크...... 유리야.....”
그러나 성환은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들어올리며 감동에 졎어있었다.
하도 눈꼴 시리긴 한데 여기서 딴지를 걸어봐야 내만 추해지겠지?
젠장.
“왜? 그 소심한 여친이 너 때문에 선전 포고까지 하니까 감동이냐?”
그래.........저 두 인간들.......커플이다.....
그것도 이 사태 벌어지기 전 부터.
성환은 내 말에 감격한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제길. 졸라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하던데 졌어.....
패배의 쓴맛을 삼키고 있는데 성환은 그런 날 조금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넌 가끔 말하는 거 보면 남자 같아. 걸크러쉬인가 하는 그거냐? 아까 내가 화낼 때 유리한테 부러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닥쳐. 개인 사정이 있는 법이야.”
알고 싶으면 제 4의 벽을 넘어서 ‘자동사냥이 키운 마녀님’ 장르 확인하고 오든가.
아무튼 다시 봐도 신기하네.
한쪽은 무검산 PVP 대회 우승자
다른 한쪽은 이터널 랭킹 1위.
하는 게임도 다르면서 대체 어디서 접점이 생긴 건지, 완전 커플 쌍으로 무쌍이구나.
턱을 괸 채 썩은 동태 눈으로 성환을 바라보고 있는데, 성환은 그 뒤 이야기를 계속해서 내게 물어왔다.
“그래서 다음은?”
“뭐가?”
“연합장이랑, 사람들 엄청 화냈다며? 대체 회의가 어떻게 됐길래 그래?”
“한 나라만 남기고 다 포기하자는데? 대충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질지도 모르니까. 한 나라를 정해서 거기에 플레이어들을 모아서 싸우자고, 나머지는 뭐.......”
“......이런 미친 새끼들.”
성황은 방금 전의 환한 얼굴은 어디 가고 악귀나찰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지.
이성으로는 이해하지만, 그저 이성일 뿐.
인간이 할 선택이 아니다.
물론 질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지.
그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외에 버려지는 목숨들을 대체 너희가, 우리가 무슨 자격을 책임진단 말인가.
살아남아야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는 가져야 한다 생각한다.
어쩌면 상황이 한결 나은 우리나라에 있기에 할 수 있는 무른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입안에 쓴맛이 올라오는 기분이다.
과연 그게 필요악일지 아니면 위선일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당연히 파투났지. 우리가 참여 안 하는데 별 수 있겠냐? 그리고 다른 나라는 병신이야? 누가 곱게 죽어 준데?”
“하긴, 그건 그렇지.”
“그보다, 넌 1주일은 있겠다고 한 놈이 왜 4일 만에 왔냐? 많이 힘들어?”
“힘들긴 했지.”
성환은 마치 다시 생각하기 싫다는 듯 팔로 눈을 가리며 의자에 기대 고개를 젖혔다.
드넓은 땅에서 마력 추적기 하나만을 의지해 달리고 또 달리고.
가끔 쏟아지는 검은 짐승들 때문에 잠자리를 마련해도 항상 불안에 떨며 품에 검을 쥐고 자야 했으니까.
치료해야 할 트라우마가 오히려 심해진 기분이라 도저히 빈말로라도 힘들지 않았다고 하긴 힘든 날들이었다.
거기에 혼돈 녀석이 추적을 간파한 후부터는 과거 자신을 죽일 뻔한 혼돈의 큰 분령, 도철까지 등장해 자신을 위협했으니.
비록 3일 밤낮으로 3마리에게 도망치던 때에 비하면 상황이 나아서 어찌저찌 도철을 처치하고 추척을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부상이 늘어나고, 그걸 마술사와 엘프들이 준 약으로 때우는 나날이 계속됐다.
마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시간이었지.
“이런 말 하면 이해할진 모르겠는데. 진짜 군대를 다시 가고 싶어졌었다.”
“와......인정. 졸라 힘들었구나.”
남자 입에서 군대를 다시 가고 싶었다니.
대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하물며 그게 고작 4일 만에 튀어나온 말이니, 그 4일이 더더욱 두려워졌다.
그렇게 성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신세를 한탄했지만 동시에 입꼬리를 말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어.”
신이 그를 버리지 않았는지 정말로 성과가 있었다.
비록 혼돈의 위치를 잡은 건 아니지만.
충분히 그에 준하다고 할 수 있는 성과가.
성화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물건, 검은빛이 새어 나오는 회색의 수정을 내 앞에 꺼내며 말했다.
“혼돈의 팔다리를 다 잘라버릴 방법을 찾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