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3주간의 역사
* * *
“후~~~”
이제는 주인이 사라진 어느 낡은 건물의 옥상에 기댄 나.
곰방대를 문 입에서 긴 연기를 내뿜으며 난 저 멀리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진한 녹색 먼지로 뒤 덥혀 잘 보이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가려진 게 더욱더 나은 그런 경치를
마치 대지진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마냥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갈라짐들.
폐허의 중심에 드문드문 보이는 전투의 흔적
까마귀의 울음소리
내가 릴리가 되고 또 이 사태가 벌어지고 3주의 시간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난 길다고 표현하리라.
내 생에 이처럼 농밀하게 압축되고 많은 것들을 경험한 시간은 없었으니.
“에휴~~ 저것들은 또 오네. 이젠 상대하기도 귀찮다.”
먼지 속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존재들을 보며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검은 짐승의 무리.
광견병의 진화판 정도로 보면 되려나?
덩치는 개라고 하면 상처가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래 봐야 내겐 광견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까.
사람들은 마계의 짐승이니, 요마니 다양하게 부르는 것 같아 나도 멋들어진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은데 너무 귀찮다.
대충대충 부르자고
어차피 다 죽일 건데.
“[나의 피의 계약을 맺은 종복이여, 영혼의 약속을 함께한 동반자여. 지금 이 순간 그 이름으로 너의 이름을 입에 올리니, 나의 부름에 응하라. 엘라임]”
마력이 실린 언령.
마치 뮤지컬 속의 대사와 같은 단어들이 내 입에서 나오자, 사방의 대기가 진동하며 발아래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는 폭발한다.
건물 옥상 전체를 감쌀 듯이 퍼져나가는 그림자는 종국에 작은 점으로 뭉치니, 그 중심에서 서서히 형상을 드러내는 건 백금발의 엘프.
그러나 소라와 어머니 같은 아름다움을 떠올릴 수는 없다.
그 미색美色, 가히 폐월수화, 경국지색을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이는 향기로운 꽃의 아름다움이 아닌 심연과 같은 퇴폐미를 뽐내니, 그녀는 웃고 있으나 그 누구도 그녀를 보며 웃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하늘한 순백의 옷은 웨딩드레스 같지만 동시에 면적이 적어 아찔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니 전 남자였던 난 사실 정면에서 보기는 좀 거북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시몬을 제외하면 내 최강의 심복이니 불평할 수는 없지만.
그럼 시몬을 꺼내면 되지 왜 엘라임이냐고 하면 우리 시몬 출장 갔거든.
다들 바빠요.
저랑 다르게
기분 나쁘다는 엘프 여성들의 격렬한 반대에 이렇게 엘라임만 내 옆에 남은 거지.
“나중에 따져야지!”
우리 엘라임이 어디가 어때서!
얼마나 예쁜데.
너희들 기분 나쁘다고 했을 때, 우리 엘라임이 얼마나 훌쩍거린 줄 아냐?!
뭐, 엘프 시체의 말로라고 하니 네크로멘서로서 차마 할 말은 없다만, 엄연히 엔 살아 있는데.....
새로 태어난 거야! 이름도 멋있는 카오스 엘프로!!
우씨!
속으로 투덜투덜 신나게 그들을 까는 사이 엘라임은 순백의 꽃과 섬뜩한 가시가 조화를 이룬 관을 머리에 쓰고 내 앞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거참 하지 말라고 해도 항상 하는 게 미운 3살이 따로 없네.
다 나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내가 참아야지.
난 건물 난간에서 톡 하고 내려왔다.
“하~~~~움. 어이쿠 이젠 하늘에서 까지 지랄이네.”
지루함에 긴 하품을 고개를 젖히니 저 멀리 하늘에서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수천의 검은 괴조들
하도 엘라임 손에 죽으니 이제는 하늘에서까지 공격하려는 건가 싶지만, 난 그저 재미없다는 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바보도 아니고
설마 공중이면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동안의 방식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작 힘의 차이가 이렇게 나면 그런 것도 다 의미 없는데 말이지.
“심심한데 식전 운동으로 저건 내가 잡아야겠다.”
─타각!
튕기는 손가락과 함께 발동되는 [혈마술]
박쥐의 날개를 연상케 하는 핏빛 날개가 내 등에 돋아나며 난 인벤토리에서 칠흑의 낫을 꺼내 들었고, 엘라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그림자 속에서 한 자루의 지팡이를 뽑아냈다.
나뭇가지와 같은 뿔을 가진 이름 모를 짐승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스태프.
뿔 자체는 사슴을 닮았지만 사슴은 아니고, 얼핏 듣기로는 가상.....이제 가상이라고 하기는 그런가?
아무튼 웬디고의 머리뼈와 같았다.
웬디고 자체가 악령인지 스테프에서 나오는 기운도 섬뜩하니, 엘라임과 같이 묘한 조화를 이뤄 그녀의 퇴폐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음......따지는 거 나중에 하자. 이렇게 보니 나도 조금 무섭긴 하네.
쫀건 아니야! 절대로.....
“엘라임, 평소처럼”
끄덕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라임을 뒤로하고 난 핏빛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사실 원거리에서 마술로 학살하는 게 정석이고 또 편하기는 한데, 하도 질리고 질려서 이렇게라도 안 하면 진짜 전선에서 잠들 것 같아서.
─휘이익
잔해에서 나온 먼지투성이의 하늘이지만, 바람을 가르는 감각은 나쁘진 않았다.
먼지 때문에 폐가 조금 걱정이기는 한데, 잠이 확달아날 정도로 시원하니까.
그렇게 녹빛의 상공에 오른 난 수백 마리의 괴조들의 중심에 섰다.
[끼에에에에엑!!!!]
“어이쿠, 시끄러워. 목청이 너무 좋은 거 아니냐? 3단 고음도 되겠다.”
나와 바닥에 엘라임을 번갈아 보며 결국 날 좁밥으로 결론 짓은 그들은 우선 나부터 먹어 치우고 가겠다는 듯 이형의 날개를 펄럭이며 새의 부리과 짐승의 이빨을 내밀지만.
광견, 아니 광조들아.
너희들 한테는 미안한데, 내가 좀 모자란 인간이기는 해도 부하보다 약하지는 않거든?
“점심 치킨조차 되지 못한 가련한 새들이여. 내가 안식을 내려주마.”
[융합마술]
[데스사이드 기요틴] + [혈기 폭주]
과거 오벨리스크의 다리를 썰어낸 거대한 흑염을 두른 칠흑의 낫이 등장.
이후 핏줄처럼 낫을 타고 올라가는 붉은 혈기와 융화되어 검붉은 영혈(?血) 낫으로 변한 무기를 난 전방향을 향해 쓸어냈다.
─좌아아아악!!!
“시원하구나!”
낫으로 베어졌다기보다는 마치 찢어발기는 듯이 사지가 도륙 나는 괴조들의 무리.
그들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지상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피가 없는 것은 아니니.
스르르르....
낫과 날개 그리고 내 몸에 빨려들어 오는 혈수.
살짝 중독될 것 같은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난 다시금 거대한 낫을 고쳐 쥐었다.
“아직 많이 남았구나.”
물경 1000이 가볍게 넘게 왔는데 한 방에 끝날 리가 없지.
그럼 오히려 내가 아쉽다고.
그래도 오래 끌면 밥때 늦으니까. 속도는 좀 올려볼까?
“[블러드 스피릿즈 얼터 에고]”
모은 혈기들로 이뤄져 탄생하는 피의 인형들.
그저 인형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만, 서서히 붉은 손에 들리는 걸 보면 결코 이들은 인형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 검붉은 불꽃의 낫을 쥐며 눈도 없는 얼굴의 입가가 찢어지며 호선을 그리는 광경은 그 누가 보아도 공포에 질리기 충분했다.
심지어 저 미친 괴수들조차도
나와 같은 날개까지 꺼내 들며 찢어서 만든 듯한 입으로 소리 없는 조소를 흘리는 인형들을 앞세운 채 난 가볍게 손벽을 쳤다.
─탁!
“한 번 휘둘렀으면, 운동은 됐겠지?”
무려 자동사냥이 키운 마녀님 아닌가?
인생 모토는 변하지 않는 법.
손벽 소리와 함께 날아가 낫을 휘두르며 학살의 왈츠를 추는 인형들을 보며 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이후 아래의 전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시나무의 넝쿨들을 지배하며 수천의 무리를 짐승을 학살하는 엘라임.
찢고
꿰뚫고.
짓누르는
저주받은 숲의 여왕.
엘라임은 그저 가시나무가 만든 정상에 올라 앉아있을 뿐이다.
“크......내 성격 쟤 때문에 다 버렸어. 진짜......”
엘라임과 너무 오래 있었는 게 아닌가 싶다.
심령이 연결된 게 다 좋은데 이게 문제네.
취향이 비슷해져.
나도 엘라임을 닮고, 엘라임도 나를 닮아가니, 이걸 참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투만 들어가면 핀트가 돌아간단 말이지.
난 원래 이렇게 잔인한 성격이 아니라고~~~
뭐? 오벨리스크 때부터 광년이 포스가 있었다고?
나 때문에 오히려 엘라임이 이상해진 게 아니냐고?
시꺼
뭐, 이러나 저러나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다.
2035년 1월 4일.
격변의 날로부터 3주가 지난 한국의 북부
인류의 전선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 * *
지루하고 재미없는 역사 시간이 찾아왔어용~~~
뭐, 3주를 역사라고 해봐야 웃길지는 모르지만, 훗날 역사책이 다시 쓰여지는 날에 이 일이 빠지지는 않을 테니 역사 시간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
참혹했던 중세 시대의 흑사병조차 유렵 인구의 3할을 죽였을 뿐.
전 세계의 인구의 3할을 죽이지는 못했잖아?
그러니 이 일이 역사가 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
어느 날 갑자기 격변의 날과 함께 나타난 문.
어느 나라의 사람들은 그저 문이라고 부르고, 게이트라고 부르는 곳도 있으면, 차원의 경계라 부른 곳 또한 있어.
뭐, 이름이야 중요한 게 아니지.
어차피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난 적당히 섞어 차원의 문이라고 할게.
그 차원의 문에서 나타난 이계의 존재들, 몬스터들은 인류에게 이 땅의 주인이 정녕 인간인지 되물었어.
마치 이렇게 나약한 너희들의 어떻게 지구의 지배종일 수 있냐고 말하며 건물을, 도시를, 그리고 나라를 박살 내며 땅을 점령하기 시작했지.
뉴욕의 검은 밤하늘을 열고 나타나는 어둠의 정령, 델 피아스와 타락한 대정령들이 이끄는 정령의 군대.
중국의 스촨성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이빨을 드러내며 도시를 휩쓸고 사람을 학살하며 수백의 짐승을 낳고 더럽히는 사흉(四?) 혼돈, 궁기, 도올, 도철
남성에게는 고혹한 미녀로, 여성에게는 절세의 미남으로 보이는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오사카를 시작으로 마계의 무리들을 이끌고 인간을 납치하고 학살하며 일본을 침략했지.
전란이 시작되고 세계가 불타올라.
여기저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통곡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나날들.
이쯤 되면 나오는 것들 있잖아?
종말론
인류 최후의 날
심판
쓰기 좋은 말들이 즐비하지.
사이비 종교에 쓰기 좋은 말들 말이야.
전쟁 자체도 너무 힘들지만, 역시 인류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까?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 중에 동족인 인간이 빠지는 날이 없네.
이렇게 보면 참, 정말 인간이 짐승보다 못할지도 모르겠다.
한낱 짐승 무리도 먹을 걸로 싸우는 일이 있을지 언정 무리의 적이 나타나면 뭉치는데 부끄러운 일이지.
마치 인생을 포기한 것 마냥, 날 뛰는 사이비 범죄자들의 손에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어.
힘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동시에 얻지 못한 사람도 많으니까.
VR게임이란 게 은근히 전투 육성은 하드한 장르라서 강함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거든.
방화, 강간, 살인 등등 하나하나 뉴스와 신문에 대필되기 충분하고도 넘칠 것 같은 범죄들이 이어지는 나날이 반복되지.
그리고 동시에 유럽 지중해 티레니아해에 출몰한 간다르바라는 거대한 바다뱀이 유럽의 군대마저 간단히 몰살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니 더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어.
핵도 3방이나 날렸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막지 못한 변명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간다르바와 얼음과 물의 괴수들은 여전히 기세가 죽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이탈리아 나폴리를 향해 진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지.
한국도 많이 힘들어.
제주도에 나타난 차원의 문이 대박이었거든.
드래곤의 대군이라는 지랄도 이런 지랄이 있을 수 있을까.
한 마리 한 마리가 하늘에서 브레스를 내뿜는 광경이란 절로 종말을 이야기하게 만들었지.
이렇게 보면 또 사이비를 마냥 미친놈이라고 말하기도 그렇네.
진짜 종말일지도?
위에서는 사흉의 분령과 타락한 마수가 지랄이야
아래에서는 드래곤이 지랄이야.
내부에서는 범죄가 지랄이야.
지랄이 풍년이구나.
얼씨구~~!
그나마 탑 플레이어들의 천국인 한국이라 이정도지 참, 이걸 보고 중국이나 인도는 어떨지 상상하니 몸이 부르르 떨린다.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은 원격으로 회담을 주고 받았데.
당연한 일인가?
그럼 좀 재밌는 사실을 말해보면 대통령 같은 국가 원수 중에는 모습이 바뀐 사람이 없다는 건 알아?
딱 그 사람들만 안 변한 게 아니고. 아바타랑 본인 모습이랑 그냥 똑같데.
거의 안 바꿨다는 거야.
왜 그런가 싶었는데, 거의 인생의 반 이상을 VR속에서 지내는 사람이 많으니까. 가상 세계에서도 얼굴 팔고 홍보한다고 그렇게 됐다나?
크크크
과연 권력을 유지해서 기뻐하고 있을까 아니면 회춘하지 못해서 슬퍼하고 있을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서 알려줄 게.
음, 주절주절 떠들다 보니까 시간이 다 됐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말해 줄게.
걱정 마
작가가 미쳤는지 오랜만에 연참을 한다고 하니까.
그럼 잠깐 안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