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커밍 아웃 (2)
* * *
한국종합대학병원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최고의 병원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지금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이다.
─북적북적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부상 당한 사람은 물론 피난민까지
그야말로 바닥의 대리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상황.
드문드문 국회의원 뱃지를 내보이는 사람과 스스로를 큰 기업의 총수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지만 예외는 없다.
그저 어떻게든 자리를 찾아 바닥에 주저앉을 뿐.
저런 사람들까지 이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있는지 알수 있으리라.
과연 이들은 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서라도 이곳에 있을까?
아파서?
물론 아픈 사람도 있지만,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다.
과거의 의술 따위가 아닌, 신성력을 바탕으로 한 치유 마술로 외상 정도는 순식간에 치료할 수 있고, 이미 있던 환자들도 게임 속의 모습이 되면서 대부분의 병이 완치되었으니까.
오히려 장기 입원 환자 중에 강자는 꽤 있는 편이다.
아픈 기간을 이겨내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이 바로 VR게임이니, 전투는 아니어도 플레이 타임은 다들 긴 편이니까.
그러나 그런 이들도 병원을 떠나지 않는 건 밖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 때문이다.
“아니마 사람들이지?”
“그래, 판타지아 길드 2위.”
지금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집단 중 하나가 된 아니마
이들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부대가 지금 병원을 사수하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영화속에서 나온 듯한 전사와 기사 그리고 마법사, 연금술사들이 합작해 만든 골렘에 각종 공성전 장비로 절대 뚫릴 수 없다는 기세를 내뿜는 그들.
순수함과 정의로움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아쉽게도 저들이 저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길드장님 괜찮으시려나?”
“괜찮겠냐?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겠지.”
“하긴, 내가 멍청한 소리를 했네.”
아니마의 정예 전투원, 전석과 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의 사망 소식으로 쓰러진 길드 마스터.
급한 대로 부 마스터와 함께 이곳 병원에 오기는 했지만, 이게 맞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엄연히 최고레벨인 1000lv 의 육체를 가진 길드 마스터가 정말 몸이 안 좋다고 생각하기는 힘드니까.
슬픔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겠지.
쉽게 일어나지는 못하리라.
아니,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더 잔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어떡하냐 우리?”
“일단 길드원들은 뭉치자는 반응이지. 전 마스터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정부도 무반응이니까.”
만약 이번 일이 거짓말처럼 뿅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이상 많은 것들이 변할 건 자명한 사실이다.
군대는 이미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힘이 없다.
급하게 출동했던 공군이 겨우 하피 무리 때문에 전멸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심지어 겨우 떨어트린 폭격에 오크조차 죽지 않는 것을 그들의 두 눈으로 확실히 목격했다.
방식 또한 단순.
그저 마력을 두르면 될 뿐.
초토화 병기, 핵이 나오거나 아니면 현대 화기에 지대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더는 군대에게 이 사태를 진정시키는 걸 기대할 수 없다.
남은 건 길드와 플레이어들의 무력만이 희망인 상황이다.
“살아남으려면 뭉쳐야 해. 특히 길드 위주로”
“그건 그렇지, 세라핌도 집결 중이라지?”
초강자를 중심으로 강자들이 뭉치고 있다.
시대의 변화가 시작되는 조짐.
스스로 시대를 거스를 힘이 없다면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상책이고, 동시에 강한 흐름을 타야지만 앞서갈 수 있다.
그런 큰 흐름의 중심이 바로 라이언하트 강찬석, 이클립스 한예지와 같은 초강자의 경지에 들어섰으면서도 동시에 집단의 우두머리들.
그런 면에서 이미 아니마의 소속인 자신들은 운이 좋은 경우일 것이다.
“어라? 야, 저기 사람.”
“응? 어디, 어 정말이네. 혼자 걸어오는 걸 보니 피난민인가?”
그렇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둘은 병원 정문에서 누군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포착했다.
검은 마녀 모자 뒤로 백색의 연홍빛이 감도는 머리와 검은 로브를 흩날리며 다가오는 소녀.
동시에 한 손에 무언가를 끌고 오고 있는데, 발걸음에는 여유가 넘친다.
딱히 무언가에서 도망쳐 오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렇다면 그저 사람을 찾아 이곳을 찾아온 플레이어겠지.
홀로 살아남았다면 강자일 것이다.
전력 보충으로서는 반길 일.
하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길드원들은 이내 눈은 크게 뜨며 경악했다.
“저.....저거 뭐야? 손에 끌려오시는 분. 설마!!!”
“모두 전투 준비!!! 전 길드 마스터가 당했다!!!”
작디작은 소녀의 손에 뒷덜미가 잡힌 채 끌려오는 건 물건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
그것도 불패의 길드 마스터라고 불렸단 라이언하트 강찬석!
아니마의 부 길드마스터!
사고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길드 마스터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며 아직도 길드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그가 어째서!
서둘러 전위들은 진형을 구축하고 연금술사들은 만들어둔 골렘을 가동, 마법사들은 마법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며 소녀의 귀여운 얼굴에 검은 그늘이 드리우고 이내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소녀는 손에서 거대한 칠흑의 낫을 꺼내려는 찰나
찬석은 후다닥 소녀의 손을 잡으며 길드원들에게 소리쳤다.
“길을 비켜라!!! 내 아들─”
“아들이라고 하지마.”
“그럼 딸─ 꾸엑!!”
“딸이라고 하면 죽어”
“그......그럼 어쩌라고......”
태세를 정비하던 아니마의 길드원 들은 강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면서도 동시에 대체 저게 무슨 모습인가 하며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사이가 좋은 건지, 아니면 나쁜 건지.
대화 내용을 보면 나빠보이지는 않는데, 소녀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하다.
그저 찬석만이 해픈 웃음을 지을 뿐.
저렇게 반 떡실신이되서 끌려오고 있는데도.
이내 찬석은 지금의 꼴로는 말의 설득력이 없을 거란 판단이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을 쑤시는 통증이 아려오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허리를 세우고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웃으며 길드원들을 향해 다시금 소리쳤다.
“내가 왔다.”
“지랄”
그리고 아들 같은 딸에게 한 대 더 맞았다.
* * *
병원 1인 실.
특실 중에서도 방송에 나올 법한 사람이 쓸 것 같은 그곳에 인지를 초월할 정도의 미를 가진 두 여인이 있다.
한 명은 침대 위에서 마치 악몽을 꾸는 듯 신음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탄식한다.
윤영희와 강소라
길드 아니마의 마스터와 부 마스터이며 동시에 강찬석의 아내와 딸.
그리고 죽은 강시혁의 어머니와 여동생이다.
모습이 변했지만, 오히려 익숙한 엄마의 모습이기에 소라는 거부감은 없었지만, 동시에 차마 엄마가 깨어나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눈을 떠봐야 기다리는 건 참혹한 현실이니까.
“제기랄......”
소라는 엄마의 손을 꽉 잡으며 이를 갈았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길드원들을 규합하는 대신 바로 오빠에게 뛰어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근본적으로 가족 모두가 시혁이 VR게임을 하려는 걸 막지 않고 지원했다면, 발견한 재능을 막지 않고 키워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나 다 부질없는 후회일 뿐.
결국 일은 이렇게 되었다.
“어...엄마?!!”
“소라야.....”
손에 쥔 악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통탄이 그녀에게 전해졌기 때문일까.
서서히 눈을 뜬 엄마, 영희는 힘겹게 뜬 눈으로 소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혁이...시혁이는 어떻게.....”
“..........”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소라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엄마와 눈이 마주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만으로 답은 충분하다.
소라의 지금의 행동이 무엇을 말하는지 영희는 알았기에 그녀는 다시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흑.....시혁아....미안해....”
자기 욕심 때문에
그냥 남들 다 가지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아들을 원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이라는 수십 가지 가정 속에서 하나만 잡았다면 사라지지 않았을 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목이 메어오며 숨이 타들어갔다.
“아...안 돼......”
“엄마!!”
당장이라도 아들을 찾으러 가려는 듯 침대 옆으로 굴러떨어지는 영희의 모습에 소라는 바로 뛰어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다시 침대 위로 올리려 했지만, 영희는 그런 소라의 손길을 뿌리쳤다.
대체 지금 침대 위에 누워서 뭘하라고
아들이
사랑하는 아들이 그렇게 됐는데.
죽었을 리가 없다라며 머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또 죽었다면 반드시 죽인 그 괴물을 죽여버리리라.
산채로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평생을 태워 죽이리라 가슴이 비명을 지르는 그녀는 마치 허공을 헤엄치듯 영희는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현실을 알기 때문일까.
그녀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다시 주저 앉았다.
“시혁아.....”
“엄마, 내가 미안해.....내가 더 강했으면. 오빠 괴롭히지만 않았으면....”
뒤에서 자신을 감싸 안으며 눈물짓는 소라의 울음소리에 영희는 더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딸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전부 자신과 남편이 함께 시켜서 한 일인데.
전부 자기 잘못인데.
그렇게 두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우는 순간.
건드리지 않았던 병실의 문이 열렸다.
─드르륵
여닫이 방식의 문이 사라지고 혹 아빠, 강찬석인가 하며 고개를 든 두 사람.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작은 소녀였다.
“뭐야?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아나, 둘 다 얼굴이 바뀌니까. 누가 누군지 모르겠잖아.”
도저히 병실에 찾아온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을 때.
소녀는 갑자기 뒤를 돌아 누군가를 불렀다.
“아버지, 누가 소라에요?”
아버지?
누굴 부르는 거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듬직한 몸매의 구릿빛 피부의 남성.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그리고 기다려온 강찬석이었다.
그런데 왜 저 소녀는 자신들의 남편이고 아빠인 찬석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지?
의문이 드는 와중에 찬석은 은발의 검은 제복과 코트를 착용한 소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발 하이엘프”
“오~~~ 하이엘프? 엄마는? 엄마도 하이엘프?”
“그렇지.”
“커플룩, 아니 커플 종족이네. 사이 좋아서 좋겠다. 나도 아빠처럼 오거 로드 였으면 최고였겠네? 그렇죠?”
마치 비꼬는 듯한 소녀의 말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찬석의 모습에 두 여인은 더더욱 의문을 키워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여보, 이 아이는 대체?”
“앤 뭔데 아빠보고 아버지라고 하는데요? 무슨 숨겨둔 자식이에요?”
“아...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나 찬석이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눈앞의 소녀는 입고 있던 로브와 모자를 벗어 찬석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손에서 우두둑 뼈 소리를 내며 손을 풀고는 복싱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소라야, 아빠가 1시간 동안 맞았거든? 그니까 넌 딱 3시간만 뒤지도록 맞자.”
“네?”
“아, 아니다. 실수. 정정한다. 내가 차마 홍익인간의 이념을 지키는 환웅의 후손이다 보니 어머니는 못 때리겠으니까. 그 몫 1시간 추가해서 너가 대신 4시간만 맞자.”
“저기 설마 오빠야?”
“시....시혁이니?!!”
대화의 문맥을 통해 소녀의 정체를 알 것 같은 두 사람은 바로 환한 미소와 함께 외쳤지만, 소녀는 그저 무심한 듯 답 대신 어머니인 영희에게 물건 하나를 던졌다.
“이건, 그이 휴대폰?”
품에 똑 떨어진 건 찬석의 스마트폰.
정확히는 이제 사라진 시혁의 스마트폰 대신이고, 동시에 목적은 화면에 나와 있었다.
00 : 00
“어머니, 타이머 켜세요. 시작합니다.”
“시혁아? 이게 무슨”
“오빠, 장난이지?”
“장난?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내 친히 네 머릿속에 든 마구니를 정화하리라.”
신고 있던 구두까지 벗어 맨발로 스텝을 밟으며 휙! 휙! 주먹을 내지르며 쉐도우 복싱을 하는 소녀는 이내 은발의 엘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정의의 철권!!! 스트레이트 펀치!!!”
포동포동한 발바닥이 소라의 얼굴 앞으로 날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