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019. 비밀의 방이라고 하면 요즘 10대는 모른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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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가씨께서는 근심이 많은 편입니다.
세련되게 말하자면 아내로는 만점인데 여자친구로서는 60점을 넘기기 힘든 스타일입니다. 미소녀 보너스를 감안해도 70점짜리 여자친구라면 관계의 진정성을 고려해보는 편이 좋습니다.
아니면 빠르게 결혼으로 넘어가든가.
아무튼 본래도 근심이 많은 큰 아가씨를 저는 자극하고 말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한나진 씨의 행동력을 회복시켜줄 지시가 무엇인지 알려줬거든요. 다름 아닌 머즐드독스의 표결권을 우리가 휘두를 수 있게 확보해 달라는 지시였습니다.
큰 아가씨께서도 지금의 상황에 있어 단 하나의 표결권이라도 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바, 지시 자체를 철회하지는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던 것처럼 큰 아가씨는 여자친구로서는 피곤한 스타일입니다. 그 특성이 십분 발휘되어 큰 아가씨께서는 한나진 씨와 작은 아가씨,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차 계십니다.
“……총수가 꼬장이라도 부리면 어떡할 건데요?”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라고도 부르지 못하는 본인 처지나 좀 걱정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뭐 어쩌겠습니까?
겪은 세월이 큰 아가씨를 불효막시무스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그리고 큰 아가씨의 걱정 전반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총수님은 정말 비비 꼬인 인간이니까요.
괜한 도움 요청을 구했다가 오히려 우리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겠다는 핑계로 화친파에 합류하는 트롤링을 벌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한나진 씨를 호출한 것은 첫째로 그가 총수님의 방식을 잘 알고 있거나, 혹은 잘 알게 될 거라고 전망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한나진 씨가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기 때문입니다.
저와 큰 아가씨는 성격이 많은 다른 편입니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두도록 합시다. 알아서 잘 하겠죠. 저는 여자친구로서도 아내로서도 빵점일지 모릅니다만 어머니로서는 한 78점 정도는 나옵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저희가 나아갈 방향입니다.
“이세형 대표가 말한 파계종의 위압이 느껴지는 문 말입니다만.”
“그거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착란 상태에서 뭔가 잘못 말씀한 게 분명해요.”
“아뇨, 있었습니다.”
땅딸막한 직감주의자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그런게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설혜윤이 환술을 해제시켜 드러냈던 문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S등급에 비견될 만한 위압이 느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하지만 저의 디테일한 보고에도 불구하고 큰 아가씨의 반응은 회의적입니다.
“그렇게 강한 파계종이 있는데 어째서 문 바깥으로 나오지 않을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설혜윤은 청풍명월이 지정능력을 이용해 문을 잠가 놓았다고 설명했습니다만, 아무리 S등급 지정능력자라고 해도 S등급 파계종을 장기간 봉인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설혜윤은 청풍명월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그 문을 닫아놓은 것이 청풍명월이 맞는지도 불확실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혜윤이라는 꼬마를 우리가 어떻게 믿어요?”
그 말 그대로입니다.
이세형 대표의 수술이 시작된 이후, 저희는 현장에 함께 있었던 그녀의 딸 이소영이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한나진 씨를 통해 건너건너로 담당 의사와 연락에 성공, 이소영이 입은 상흔이 풍월검도에 의해 입은 자상이라는 소견을 얻었습니다.
현장에 파계지점이 발생한 것은 아직까지도 설명해내지 못했습니다만, 어쨌거나 이번 기습의 주체가 풍월검도 수련자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세형 대표가 기습당한 바로 그 순간에 이곳 수련장에서 부재했던 수련생은 설혜윤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녀이지만, 우리는 그녀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논리에 의해 우리는 설혜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광경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 아이, 환술을 주로 쓴다면서요.”
예. 그게 진짜 문제입니다.
A등급에 준하는 환술 능력이면 어지간한 것들은 전부 꾸며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위장하는 것부터 시작해, 어쩌면 파계종의 위압이 느껴지는 문 자체가 그녀가 만들어낸 환상일지 아닐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수련생은 혜윤이의 환술을 꿰뚫거나 하지는 못 한대요?”
“환술 자체를 배운 사람은 많습니다. 청풍명월의 모든 기술을 익힌 선화란부터 시작해서 태유영 씨와 류장건 씨도 어느 정도는 환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상급에 속하는 환술은 해제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선화란과 청풍명월을 제외하면 환술에 있어서는 설혜윤이 가장 뛰어나다는 겁니다.”
“……선화란 씨를 부르는 건 어떨까요?”
“지정능력을 못 쓰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설혜윤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해서 당사자가 이곳에 없는 만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술인지는 풀어내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외통수입니다.
……장기 안 해봐서 모르는데 이런 게 외통수 맞습니까?
아무튼 체크메이트입니다.
“그럼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죠?”
“이곳에 팝콘이 없는 건 유감입니다만…….”
저는 반만 닫혀 있던 장지문을 밀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큰 아가씨께는 유감스럽게도 거유는 있습니다.”
그곳에 태유영 씨가 가슴부터 모습을 드러냅니다.
***
엄밀히 말하자면 태유영 씨는 완전한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그녀가 지금까지 아무런 수상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또 저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을 뿐더러 이번 관리국 분열 사태에 대해서도 맨 처음 정보를 제공하고 도움을 구하러 오시긴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녀는 풍월검도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풍월검도 내부인들을 의심했으며, 그와 동시에 태유영 씨마저 잠재적인 용의자 선상에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태유영 씨에게 그런 사정을 전부 밝히고 추가적인 협조를 구한다면 우리를 향한 그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재수없겠죠.
저는 기본적으로 재수없는 년입니다만 그런 상황을 양팔 벌려 반기는 미친년은 또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가급적이면 태유영 씨까지 사안의 본질에 엮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온도만 대강 체크해서 위험하지 않다 싶으면 손을 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태유영 씨도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시신마다 풍월검도에 의한 상흔이 남겨졌다면 그 수련생들을 의심하는 건 불가피한 수순이라는 점을 그녀도 감안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태유영 씨는 수련생의 일원으로서 차마 동지들을 대놓고 추궁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녀가 못할 일들을 우리가 대신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희는 결국 태유영 씨와 정보를 공유합니다. 설혜윤이 수상쩍다는 사실부터 시작해 벽면 한 가운데에 숨겨져 있는 수상한 문까지.
“그런 문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태유영 씨를 부른 것은 문의 존재 유무를 묻기 위함이 아닙니다.
“환술과 그 이후의 봉인, 해제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태유영 씨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립니다.
“정말로 S등급의 파계종이 있다면 우리가 수습할 수 없습니다.”
“유영 언니 말씀이 맞아요! 다짜고짜 문부터 따는 건 무모해요. 차라리 호남하고 영남의 지정능력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해서라도……”
걱정거리 많은 사람이 둘이군요. 골치 아픕니다.
우선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저는 문의 환술과 봉인을 해제할 수 있냐고 물었지, 문을 열자고 제안하지는 않았습니다. 확신도 없이 수습 불가능한 행동을 취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큰 아가씨의 제안처럼 다른 지정능력자들을 불러모으자는 것도 아닙니다.
뚜렷한 연줄도 없이 S등급 파계종에 대응 가능한 지정자를 확보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와 정보 오염을 일으킬 게 뻔합니다.
지금의 문제는 가능하면 적은 수의 외부인에게, 특히 최소한의 풍월검도 수련생에게 알려진 채 진행돼야 합니다.
다만 저는 문의 환술을 해제하고, 그 봉인을 풀어내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확인하는가 하면 그건 이세형 대표의 발언과 연관된 것이지요.
파계종과 다를 바 없는 것.
“……환술까지는 분명 해제가 가능합니다.”
태유영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엽니다.
“저는 B등급 지정능력자이지만, 정확히 측정하면 혜윤이와 엇비슷한 B+등급 정도가 됩니다.
다만 제 특기는 환술이 아니라 발도술이므로 저 혼자서는 혜윤이와 같은 수준의 환술 해제를 펼칠 수 없습니다. 보조자가 몇 명 필요합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태유영 씨 말고는 신뢰도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건 그대로여서 저희는 태유영 씨의 다음과 같은 제안에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기준을 제시하시면 최소 인원을 추려 오겠습니다.”
“그럼 우선 욕심이 적은 사람이요.”
큰 아가씨께서 곧바로 첨언합니다. 현명한 기준입니다. 큰 목표를 위해 장기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은 이런 단기적인 사안에 써먹기 어려우니까요.
저도 몇 가지를 조건을 덧붙입니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 청풍명월과 불화가 적은 사람.
그리고 앞으로 목도하게 될 일들에 대해 잘 견딜 만한 사람.
태유영 씨는 그 조건들을 하나하나 듣고, 엄숙한 얼굴로 복도를 나섰습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엉덩이가 실룩실룩 움직이는군요. 동작 자체도 음란합니다만, 허벅지가 드러날뿐더러 허리 라인이 꽉 달라붙는 도복 덕분에 몇 배는 에로하게 느껴집니다.
아, 제가 이 와중에 갑자기 태유영 씨의 몸매를 조명하는 것은 특별히 제 성적 취향에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거든요.
“태유영 씨, 도복 더 있습니까?”
“있습니다.”
“저희 사이즈에 맞게, 아니 실제 사이즈보다 조금 작게 각각 한 벌씩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저 도복 싫은데요.”
풍기위원장이 따로 없는 큰 아가씨께서 곧바로 반발합니다.
근데 풍기위원장이라는 말 한국에서도 씁니까?
선도부인가, 아무튼.
정정해서, 노출에는 자신이 없는 큰 아가씨께서 곧바로 반발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저희가 노리는 수입니다.
“저도 입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입으셔야 하고요.”
“저기, 저는 저런 옷 입으면 어색해서 쭈뼛거리거든요.”
“여고생이 야한 옷 입고 쭈뼛거리는 건 존재 자체로 대박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그런 겁니다.”
저는 보조자들을 선발할 마지막 기준을 추가했습니다.
전원 남자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