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96화 (96/112)

〈 96화 〉 016. 뭔가 재연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3)

* * *

선화란을 자칭하는 소녀를 마주한 직후 그야말로 찰나와 같은 순간. 파계종과의 전투에 단련된 나와 유의 두뇌가 팽팽하게 반응했다.

맨 먼저 내가 랑을 끌어안고 드러누웠다. 화란이 이쪽을 공격할 경우 랑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고 내 등짝이 전부 받아내도록.

물론 A등급 지정능력자의 칼질을 받아낼 깜냥은 없고 칼같이 불굴을 발동. 마찬가지로 칼같이 지정력의 소모가 시작.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무렵 기습 허그를 당한 랑이 얼굴을 빨갛게 만들고 버둥거린다.

그렇지만 길게 못 가고 고작 5초 정도 그러다가 이내 팔을 내 등으로 뻗어서 꽈악…….

“손 내려 인마!”

거긴 수비 범위야. 퍼뜩 정신을 차린 랑이 허겁지겁 내 품 안으로 파고든다.

방어팀 역할이 끝났으니 공격팀이 나설 시간이었다.

그쪽은 나보다 더 재빨라서 이미 준비가 끝났다. 거실에 연결된 부엌 식기들이, 주로 포크나 젓가락 나이프 따위가 두둥실 떠올랐다.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쇠붙이들이 화란을 향해 돌진. 타인을 상대로 했으면 살인 기술이었겠지만, A등급 지정능력자에게는 견제구에 불과하다.

다음 타격은 내가 이어나가야…….

“어, 어? 저, 저기요?! 잠깐만요?!”

화란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지정능력 못 쓰는ㄷ──”

목소리보다 유의 염동력이 빨랐다. 맨 먼저 날아간 과일용 포크가 푸욱, 화란이 들어 올린 오른팔을 관통했다.

“꺄아아아악! 아파! 아파! 저 죽어욧!”

새된, 어쩌면 오버스러운 비명 소리와 더불어 핏물까지 튀자 유가 깜짝 놀랐다.

화란에게는 위압이 있어서 약한 지정능력은 씹어 먹거나 튕겨내야 하는데.

거기까지 사고가 미칠 무렵, 유는 분명 지정능력을 못 쓴다는 화란의 멘트를 곱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수는 없다는 게 유에게 있어 당연한 결론이다.

만일 화란이 우릴 속일 목적으로 팔의 상처 하나를 내어줬다면, 그걸 믿고 공격을 중지했다가는 기습적인 반격을 당한다.

그때 우리가 입을 피해는 고작 상처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를 말리지 않았고.

일순간 기세가 꺾였던 날붙이들에 다시금 속도가 붙었고.

화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것은 늦게나마 살 끝 감각들의 날을 세웠다.

자기지정을 발동해 위압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던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란이 일말의 위압도 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달려들어 화란을 끌어안고 있었다.

뭉클. 화란의 전신은 그야말로 뭉클했다.

이쪽에서 강하게 끌어당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쪽에서 품 안으로 쏙 파고 들었던 탓이 크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촉감을 미처 자각할 새도 없이, 등 뒤로 수많은 날붙이들이 꽂혀들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피해는 최소화된다.체력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통증은 그대로라서.

“갸아아악!”

“오빠! 미쳤어요?!”

미쳤는지는 모르겠고 따가워 죽겠다!

바닥을 뒹굴었다

중요한 결전 때는 이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는데 긴장을 좀 덜 한 상태에서 당하려니 엄청 아프다.무엇보다 자잘자잘한 피해가 여러 군데에 동시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특히.

눈이 핑핑 돌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등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 랑이 그랬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손이 조금 더 컸다.

그래봤자 여자 사이즈인 그 손이 누구 것인가 하면, 당연히 화란이었다.

시야를 내려 화란을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딱 맞아 떨어졌다.

당황해서 상기된 뺨과 비틀어진 입술. 이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화란이 유를 향해 소리쳤다.

“거기 꼬맹이 미쳤어요?! 등에다가 포크를 그렇게 꼴아 박으면 어떡해요?!”

“뭐요? 꼬맹이?!”

갑자기 성사된 캣파이트.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화란을 떼어내고 일어섰다.

그러자 화란은 아까보다 더 파리해진 안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그러다가 죽여요, 이 미친 남자야!”

“안 죽어요!”

“등에 포크가 십수 개는 박혔겠구만 무슨── 어?”

당연히, 하나도 안 박혔다. 암만 유의 염동력으로 강화됐더라도 자기지정을 펼치면 찰과상 이상으로 번지지 않는 것이다.

화란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연신 등 여기저기를 쓸어댔다.

그리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 순간.

뒤돌아 있던 랑이 화란의 양손에 수갑을 채웠다.

***

오늘 차 따를 일이 뭐 이렇게 많지.

녹차를 우려내고 거실로 돌아오니 유, 랑, 화란 셋이 옹기종기 앉아 TV 뉴스를 감상하고 있었다. 살인 용의자 선화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기사가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우리 집에서 수갑 차고 유튜브 보고 있고.

당연하지만 보통 수갑은 아니다. 강력한 지정능력자를 구속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국내에 딱 다섯 기만 존재하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시제품이다.

다행히 비싼 값을 해서 저것만 채우면 위압의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정능력을 거의 못 쓰게 된다.

지금의 평화는 전부 저 수갑 덕분이다.

“저기요. 저는 어차피 지정능력 못 쓴다니까요?”

“아, 예예, 그러시겠죠.”

당사자는 그렇게 항변하고 있지만 우리가 고려할 사항은 아닌 듯하다.

“저기, 혹시 소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가요?”

“일단 그쪽 누가 봐도 소녀는 아니고요.”

아까 21살인 유영이 화란을 놓고 무의식적으로 언니라고 불렀다. 그렇다면최소한 22살인데, 내가 22살이니 여기서 저 여자는 연장자(다수) 아니면 연장자(단독)이다.

아니 뭐, 여자는 누구나 소녀라고 하는데다가 겉보기에도 유와 크게 차이 날 정도는 아니니 일단 소녀의 자칭은 해도 상관없다고 본다.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고.

“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온 거죠?”

“으읏, 그게요. 하이 씨, 지금 제가 생각한 그런 상황이 아니거든요?”

투덜거리는 화란. 그러면서 발까지 동동 구른다.

이쪽은 정장 차림이었던 유영과 달리 옆트임 도복을 입고 있어서 저런 행동은 봐주기 어렵다. 랑이 배우는 게 빠를 나이거든.

안 그래도 유가 제지에 나섰다.

그러면서 아까 전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에요? 곤란에 처한 소녀는 다 도와주는 팀이 있다는 게?”

“그, 그쪽 때문이거든요?!”

화란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제갈유라는 고등학생이 속한 팀에 가면! 곤란에 처한 소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주는 소년이 있다고! 제가 그렇게 들었거든요?!”

“……언제쯤?”

“대, 대략 두 달 되었을까요?”

아, 그건가.

“이거 그거죠? 한월이 오빠네 팀 얘기.”

“응. 그거네.”

“우리 팀 인지도가 이 수준이네요.”

“무, 무슨 얘기인지 저한테도 좀 알려달라구요!”

화란이 소리치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랑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젖소. 우리 무서운 사람들이야.”

“히끅.”

“랑, 암만 그래도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젖소는 젖소. 게다가 살인마.”

“사, 살인 안 했어요!”

본인 주장으로는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풀고자 제갈유라는 소녀가 속해 있는 ‘미소녀라면 누구든지 돕습니다 팀’에 찾아가려 했던 모양인데, 이것 참 안타까워라.

여기에 잘 생긴 남고생 한월이는 없고 21살 공익 출신 아재 한나진 씨만 있었답니다. 왜냐하면 제갈유는 이미 팀을 옮겼거든요.

“그, 그럼 저 좀 그 박한월이라는 분 계신 곳에 보내주면 안 될까요?”

“싫은데요.”

“그러지 말고 한번만.”

“싫어요.”

제 발로 기어들어온 범인을 우리가 왜 내보내야 하지?

지금의 평화가 조성된 것은 우리가 화란을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영의 전화번호를 모르는 탓이다.

저쪽이 우리 번호를 받아갔으니 얼마 못가 연락이 오겠지만 뭐, 아무튼 수갑도 채웠고.

“저 진짜 안 죽였거든요?!”

“해명은 서에 가서 하시고.”

“그, 그러니까요! 지금 서에 가서 해명하면 안 들어준다니까요?!”

“아, 예예. 그러시겠죠.”

그나마 건성으로라도 대답해주는 것은 나뿐이고, 유는 아까 유영이 건네준 서류 정리를 랑은 모바일 게임을 돌리고 있다.

참고로 지금은 랑이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휴대폰을 뺏어 하늘 위로 높이 들어 올리자 깡충깡충 뛰기 시작하는 랑

물론 제일 높게 뛰어봤자 내 어깨에도 못 닿는다.

그렇게 자신이 인수인계 예정의 짐짝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란은 거의 울먹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저기요! 지금 경찰하고 군부까지 전부 관리국하고 엮여서 계파 싸움 중이에요! 저 잡히면 그냥 즉결처분이에요!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여기 쥐 계십니까?”

“없어요.”

“새 씨 계십니까?”

“없네요.”

“그렇다고 합니다.”

“아악! 살려주세요! 우으으윽, 살려주세요오……!”

믿기 힘들 정도로 애처롭고 안쓰럽게 울고 있지만 그래봤자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유영은 언제 연락하는 거지. 가급적이면 오늘 밤 안에 연락해줬으면 좋겠는데.

“저기, 저기요! 저만 도와주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네? 네?”

“안 버려요. 가진 적이 있어야 버리는 거지.”

“우으으, 우흑, 도와만 주시면 풍월검도도 가르쳐 드릴게요…….”

나는 힐긋 화란을 돌아보았다. 마음이 동하는 건 아니지만 특이한 떡밥이 던져졌기 때문이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던 화란에게는 그 작은 시선마저도 굵은 동앗줄로 보였는지, 화란은 통신판매 홍보업자들처럼 자신의 상품성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아, 알고 계시죠, 풍월검도?! 이게이게 엄청 강력한 지정능력인데 커리큘럼대로 따라만 하면 누구든 배울 수 있거든요! 게다가 저는 스승님 직계제자였구요?!”

“지정능력 못 쓴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 그거하고 가르치는 건 전혀 다르죠오……. 네에? 네? 네? 응? 오빠? 잘생긴 오빠?”

아까도 말했지만 이 여자는 최소 나하고 동갑이다.

하여간에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아주.

이런 줄도 모르고 처음에는 수사 과정에서 수상한 점은 없나 청풍명월 본부를 비롯해 여기저기 연락도 돌려봤는데, 그런 거 없댄다.

다름이 아니라 청풍명월의 시신에 같은 풍월검도의 수련생이 입힌 것으로 확실시되는 상처가 났다고.

문제는 풍월검도 수련생 중에 스승을 이길 만한 인재는 여기 있는 선화란 하나라고 한다.

“아, 찾았다.”

“뭐가?”

찾았다는 목소리에 되묻기도 전에 랑이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에 번호가 하나 떠올라 있었다.

“이거, 아까 그 사람 번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폴트한테.”

“네 이전 메이드 제니퍼 말하는 거지? 그쪽에서는 어떻게 알고?”

“감시 감청 능력자 협회 소속이니까. 온갖 스토커 공작꾼들 다 있어. 유명인 번호 찾는 건 금방이래.”

뭔가 무서운 주제로 빠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번호는 잘 받았고, 곧바로 발신 버튼을 누르려 한다.

누르려 하는데, 화란이 다시 징징거리기 시작한다. 아까보다 훨씬 절박해진 상품성 어필이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노예가 되겠다느니 하는 얘기까지 나오는 순간에, 유영이 받았다.

화란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그렁거린다.

[태유영 받았습니다. 한나진 씨 번호 같은데 맞습니까?]

“아, 네, 맞아요.”

[번호 안 드렸는데 어떻게 연락을……?]

“어쩌다 보니.”

화란이 수갑 찬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면서 수화기 너머에는 들리지 않게, 도와주세요살려주세요제발부탁드립니다뭐든지할게요알몸으로춤이라도출수있 “여기 선화란 있어요.”

화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나는 미소녀 콜렉팅하는 취미 없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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