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3rd Episode Epilogue. 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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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눈이 섞여서 내렸다.
며칠을 방구석에서 잠만 자다가 간신히 창문을 열어 깨달은 사실이 그것이었다.
사건이 몰아치고 지나간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머즐드독스에서는 고용자가 수행인을 간호하는 부조리한 광경이 펼쳐졌다.
랑이 너무 잠만 자면 더 안 좋으니 깨어 있으라고 다독이는 걸 무시하고 푹 잠든 채 버텼다.
역설적으로 정신이 맑아졌을 때는 랑이 집에 없었다.전화를 걸어보니 “간식.”하고 짧은 말투로 대답했다.
말투에 대해 묻자 “삐졌어.”하고 통화가 끊어졌다.
5분 정도 있다가 문자로 한마디가 더 날아들었다. ‘언니가 간대.’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냥 다시 잠이나 자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있어요?”
랑은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경쾌하다기에는 다소 쳐지고 우울하다기에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특유의 말투로 유가 조잘거렸다.
있는데 “왜 대답이 없어요?” 목이 잠겨서 대답을 못 하거든, 하고 말하려 했지만 목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컹컹거리자 유가 주섬주섬 마스크를 썼다.
“감기였죠?”
“보다시피.”
긁는 목소리를 간신히 냈다.
그때 유는 내 머리맡에 과일바구니를 하나 내려놓았다.유난스럽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농담이나 떨기에는 목이 아까웠다.
대신 유가 스스로 덧붙였다.
“나눠 드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는 휴대폰에 ‘무슨 일이야?’하고 타자를 쳐서 보여줬다.
유는 희미하게 웃고는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내가 앓아 누운 이후로 랑이 늘상 지키고 있던 자리였다.
유는 말했다.
“여러가지요.”
유는 혼자 말하려니까 민망하네, 하고 볼을 긁적거렸다.
“일단…… 실직했어요.”
유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흘깃 유를 바라보자, 녀석은 다소 과장된 웃음을 이어나갔다.
“아, 억지로 잘린 건 아녜요. 그런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뭐랄까, 결과적으로는 저희가 제대로 했잖아요? 하젠야크트를 무사히 없애버렸고. 사실 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갈룸까지 싸그리 없어지는 게 깔끔하죠.”
다만, 하고 유는 덧붙였다.
“다만 더 이상 그 팀에서는 일할 수 없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손끝이 빳빳하게 굳었다.
유가 자신의 이상을 부정하던 가문에서 뛰쳐나온 이후, 그녀를 받아준 곳은 ‘그 팀’이 유일했다.유에게 새카만 칼날들은 언제나 ‘우리 팀’이었다.
그런 유가 방금은새카만 칼날들을 ‘그 팀’이라고 말한 것이다. 유의 목소리로 들리는 그 단어는 지독히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니, 모독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뭐가 됐건, 유는 자신이 서 있을 위치를 잃어버렸다.
“다른 팀으로 가는 건?”
타자를 쳐댈 마음이 싹 사라져 말로 물었다.
그러자 유는 한숨을 후 내쉬고는 대답했다.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게 됐어요. 복잡한 이야기인데…… 관리국 내부에서 알력다툼이 있었나 봐요. 배신자도 있고, 개중에는 파계종의 편에 붙은 사람들도 있다고.
현재는 관리국 자체가 거의 마비 상태래요. 승도 아저씨도 뛰쳐나왔어요. 그 팀도 자연스럽게 3인 체제로 돌아갔고요.”
“큰일이네.”
손쉽게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사실은 별다른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했다.
유가 전하는 소식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마치 버스기사나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두가 ‘큰일이네.’하고 중얼거리는 것처럼, 뉴스 기사 한 귀퉁이에 대고 내뱉는 듯한 한탄이었다.
“큰일이죠.”
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텅 빈 침실에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 침묵이 싫었는지, 유는 슬쩍 마스크를 내려서 과일 바구니의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댔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오히려 홀로 울리는 씹는 소리가 더더욱 공허하게 느껴졌다.
유는 한 입을 겨우 삼키고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월 오빠에게 들었어요.”
말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죠. 함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무거나 해도 되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아니었던 거예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 입었을까요?”
“나뿐일 거야.”
“그건 그거대로 끔찍해요. 한 사람을 영원히 외롭게 만든 거잖아요?”
더는 뭐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랬다간 유를 더더욱 슬프게 만들 뿐더러 나 자신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게 만들 것 같았다.
많은 일들이 끝났고, 의외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구해졌다. 그러나 그들을 구한 사람들은 온통 이곳에 모여서 서로에게 돋아난 상처나 흉터를 교환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목구멍이 저절로 헛헛해져 기침을 토해냈다.
유는 마스크를 올리는가 싶다가, 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그리고 북북 찢어버렸다.
“팀 신청서였어요.”
유가 말했다.
“저도 모르게 갖고 왔어요. 같이 팀을 하자고 말씀드리려고요. 그 재수 없는 금발 메이드도 넣어서, 랑은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우리끼리 정의로운 팀을 만들어 봐요! 같은 말이나 지껄이려고 했는데……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니.”
내가 낮게 목소리를 내자, 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말했다.
“아주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생각해.”
천천히 등을 베개에 내려놓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 이상한 고용관계가 청산이 되면.”
“걔는 이미 찬성했어요.”
“뭐야, 나 몰래 진행한 일이었어?”
그러자 비로소 유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며칠간 잠만 퍼질러 잤다면서요.”
“그렇긴 해도 너무한데.”
나도 헛웃음을 흘려줬다.
“그렇지만 그 신청서라는 거,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냐? 관리국도 난장판이라며.”
“그렇긴 해도요. 국가 공인이라는 데 의의가 있죠.”
“됐어. 동아리 활동 같은 건 전부 대학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요즘 동아리는 알차거든요?”
유가 이불 안에 파묻힌 내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툭툭 내리쳤다.
나는 가만히 얻어맞고 있다가 받아쳤다.
“팀이 상처 입힌 사람은 없어. 상처 입는 사람이 있었는데, 팀이 있었던 거지.”
“그러면 오빠는 대체 왜 싸웠을까요?”
“처음부터 없는 사람 취급받자니 열 받으니까?”
“어린애들.”
유가 툴툴거렸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감은 채로 평온하게 이어나갔다.
“나도 생각해둔 게 있어.”
“네에?”
“특별히 팀이 된다거나 그런 건 생각 안 해봤지만, 뭐랄까, 너희들 시간이 남으면 부탁 하나 하고 싶었거든. 그걸로 조건을 달면 되겠다. 이것 하나만 들어주면 랑은 바지사장, 나는 바지멤버로 들어간다.”
“뭔데요?”
천천히 호흡했다.
말을 내뱉었을 때, 나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헌화하러 가자.”
“헌화요?”
“응.”
유가 당황했는지 말을 버벅거렸다.
“꽃을 바친다는 거죠? 그러니까 어, 예전 애인 분께…….”
“그런 거지.”
“나 참, 그런 걸 조건이라고 말씀하시나요?”
“꽃을 줘본 적이 없어.”
유가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새삼 기억을 더듬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죽기 이전에도 죽은 이후에도 꽃을 줘본 적이 없다.
사실 생전에는 꽃을 준다는 게 뭐랄까, 너무 낡은 것 같고 아저씨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요즘 커플들 사이에서는 그런 닭살 돋는 문화가 없어서.
그래서 그냥 꽃을 선물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정작 그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어떤 꽃도 바칠 수가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주지 못한 꽃을 죽은 뒤에야 건네준다는 것이 찝찝했다.
꽃을 건네줌으로써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잘못이나 기억을 전부 내 편한 방식대로 고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잊어버릴 것 같았다.
며칠을 꽃말을 찾아가며 화원을 돌아다니던 발길은 그렇게 끊어졌다.
어느새 나의 품에는 꽃이 남았으나 무덤에는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으니까.
이대로 감추고만 있다가는 기억은 잊어버린 채 감정에만 갇혀 살 것을 알기에.
“알았어요.”
유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꼭 가요. 같이.”
“그래.”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에게 용서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덤에 있어서 꽃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물을 먹이며 심는 것이 아니고 받는 이와 주는 이에게 영원히 남기기 위해 말려 바쳐지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서랍 안에는 아직도 말라붙은 피안화 다섯 송이가 남아 있는 것이다.
꽃말은 슬픈 추억, 죽음, 아니면 환생이었다.
***
한나진에게 씁니다.
안녕하세요. 한월이입니다. 그날 이후로 2주 정도가 지난 것 같습니다. 그날, 이라고 하면 조금 애매한가요.
하지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날을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갈룸이 죽은 날인지, 형이 왜 저를 부담스럽게 여겼는지 그 이유를 알아버린 날인지, 형과 제가 싸운 날인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문자를 씁니다. 글을 조금 못 써도 이해해주세요. 제가 국어 못하는 거 아실 테니까.
관리국이 매우 시끄럽습니다. 내부에 파계종에게 설득되거나 아예 그것들을 종교처럼 숭배하다가 들킨 사람들이 많아요. 사실 당연한 거죠. 바니걸은 독일에서 소실된 하젠야크트의 데이터가 관리국 데이터베이스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걸 토대로 네 번째 형태를 살려낼 방도를 찾고 있었다고.
그런데 도대체 그 데이터가 왜 굳이 그곳에 있었을까요? 노래 형태로, 대체 왜? 네, 내부인들이 넣었습니다. 잘 아시는 무뢰한이 배신자들을 처리하고 있지만 어려워요. 듣기로는 정치인들도 연관이 돼 있다고. 조만간 뉴스에도 이 사태가 보도될 것 같네요.
혼란스러워요.
아시겠지만, 저는 진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우연히 지정능력 검사를 받았다가 힘을 손에 넣었고, 재인이를 구해줬어요. 유를 만나게 되기도 했습니다. 둘은 제게 항상 A등급으로서의 자각을 가지라고 충고했습니다. 제 힘에 책임감을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소한 뉘앙스는 달랐어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사소한 뉘앙스가요.
그 뉘앙스가 이 차이를 만들어냈다고도 가끔은 생각합니다. 그것 말고도 지난 2주간 많은 생각을 해봤어요. 뭐가 잘못됐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그날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니라고. 여기서 ‘그날’이라는 건 짐작하시는 두 가지 모두를 말하는 겁니다.
형의 애인 분께서 돌아가신 그날과, 갈룸이 죽은 그날. 저는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물론 그러기 전에 먼저 형과 형의 여자 친구까지 구해달라고 관리국에 요청을 하겠죠. 하지만 저 자신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날 제가 직접 형에게 달려갔더라면 시민들은 다치거나 죽었을 테니까요. 그건 또 형과 같이 상처 입은 사람의 숫자를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갈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형의 방식대로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렸지요. 하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갈룸이 죽었으니까요. 그 아이는 제게 ‘내가 바라는 일이다.’라고 말했지만, 그건 그 아이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줄곧 자신을 ‘짐’이라고 말했으니까요. ‘나’라는 갈룸이 진정한 갈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다녔던 갈룸에게는 ‘짐’이라는 말이 따라붙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몇 번이라도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러니 위의 그날과 마찬가지로 이번 그날에도 저는 제가 하려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누군가와 맞서 싸우게 되었고, 그래서 이전의 그날과 달리 지금의 그날은 실패했지요.
형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형이 왜 그런 판단을 내리셨고 왜 저를 믿지 못했는지 압니다. 그 사실을 전부 이해하지만, 그렇지만 갈룸은 살렸으면 싶습니다. 형은 줄곧 저에 의해 외면당한 누군가가 죽는 것을 걱정했지만, 정작 형이야말로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아이를 외면한 겁니다. 그 사실만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백승도 아저씨는 관리국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팀 활동을 중단했고, 유는 스스로 나갔습니다. 재인이와 마베 꼬마는 당황해 하고 있고, 저도 사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일이 이런 식으로 해결된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승도 아저씨의 말씀에 따르면 ‘더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할 거다.’라는데, 저는 싸움의 크고 작은 것보다 깊고 얕은 것이 신경 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정능력자이고, 가진 힘만큼 갚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은 제가 밉겠고, 저도 형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래야만 할 필요가 생긴다면, 다시 힘을 뭉쳐서 싸울 수 있었으면─────
자판을 두들기던 한월의 손이 멈추었다.
써 내린 모든 글을 일순간에 지워버린 한월은 메시지의 내용을 짧게 고쳐 전송했다.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소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통이 차오를 때까지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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