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92화 (92/112)

〈 92화 〉 015. 지는 거북이 (3)

* * *

몇 분 정도, 유는 건틀릿에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기만 했다.다리가 전부 풀려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지러웠던 정신이 되돌아오면서 유는 자신이 격전지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랑은 언니를 놓아주거나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신발 근처에는 유조차 알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장치가 붙어 있다. 그것이 랑이 자기 키의 몇 배나 되는 높이로 쿵쿵 뛰어다닐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유는 이 말을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내뱉었다.

“이길 수 있었어.”

“아뇨, 무리입니다.”

대답은 메이드가…… 아니, 이제는 메이드도 뭣도 아닌 무관계자가 대답을 해주었다.

그녀는 언젠가 나진을 통해 사진으로 본 적 있는 슈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흉물’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그걸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따질 겨를이 없어서 유는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무관계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아가씨께서 마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저희가 달라붙어도 별 다를 건 없습니다. 작은 아가씨는 싸우는 법을 모르시고, 제게는 싸우는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쪽한테는 섬광탄이 있잖아요.”

“네. 하지만 섬광탄만 들고 서든어택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황당한 비유였으나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강한 빛을 일으켜 잠깐 시야를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상대방의 모든 걸 마비시킨 것은 아니다.

마베 꼬마는 시각이 없어도 자유자재로 마법을 휘두를 수 있고, 더군다나 섬광탄이라는 건 숨겨놓고 있다가 처음 한 번 사용할 때 효과적인 것이다.

이후로 여러 번 쓴다고 해서 상대방이 쉽게 걸려두는 술수가 아니다. 예상만 어렵지 예방이 어려운 수는 아니라는 뜻이다.

“다행히 저쪽 검은 스타킹 군사조무사도 걸려 들었습니다만.”

“아, 재인 언니는 어떻게 했어요?”

“걸고 튀었습니다. 저희가 못 이기지 않습니까.”

그때 랑이 멈추었다.

랑은 고속도로를 따라 아마도 나진과 한월이 향했을 방향으로 달려가던 참이었다.

털썩, 랑이 유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을 돌린 채 앞을 응시했다.

그러자 유는 뭔가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묻기도 전에 친절한 제니퍼가 제 입으로 말해주었다.

“작은 아가씨에게도 걸었습니다.”

“네?”

“섬광탄 말입니다.”

그녀는 금색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두 분은 참으로 똑같으십니다. 못 이기는 걸 알면서 싸우시니까요. 그래서 걸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걸고 튀었습니다. 제가 작은 아가씨를 업고.”

“이길 수 있었어!”“라고 우기셨지만 말이지요.”

그제야 랑이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억척스러운 억지였다.

그러나 그 억지는 유가 부리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목표를 바라보는 채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변명을 내뱉는 자매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자매는 남이 뭐란다고 생각을 고쳐먹지도 않았다.

“저 꼬맹이한테 동조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다시 가서 싸워야 해요.”

“두 분 다 억지춘향이시군요.”

“억지춘향이라뇨! 애초에 말이죠, 마녀라는 건 워프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제 예상대로라면 지금쯤이면 여기까지 워프해왔을 거라고요!”

“그러면 왜 지금 이곳에 없습니까?”

제니퍼가 나지막이 묻자, 유는 미간을 좁혔다.

“제 목표가 실패했으니까요?”

“마녀가 쇄도를 도우러 갔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그걸 막으려고 싸웠던 건데, 섬광탄 좀 먹였다고 튀면 어떡해요!”

“그거라면 걱정 없습니다, 아가씨. 마녀는 우리를 쫓으러 오지도 않았고, 쇄도나 한나진 씨에게도 가지도 않았습니다.”

제니퍼는 단언했다.

그리고 그것이 유를 열받게 만들었다. 제니퍼의 말은 지금의 유와 랑이 안전함 속에 머물 수 있도록 억지로 꾸며낸 거짓말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유가 지휘봉을 움켜잡고 ‘헛소리 마세요!’라고 말하기 직전, 제니퍼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곳에는 10분 전에 수신된 문자 메시지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발신자는 ‘한나진 씨’였다.

***

한월이 취한 동작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저 강기를 검에 감싸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로 한월과 나진 사이의 힘의 격차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나진의 특이한 자기지정 때문이었다.

한월이 단순무식하게 달려든 첫 번째 이유부터 분석해보자.

나진에게는 한월의 방향이 뚜렷한 공격을 빗겨 내거나 피해낼 능력이 없었다.나진의 전신은 크게 느려져 숙련된 지정능력자에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게다가 나진은 자신의 자기지정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공격을 피하고 있지도 않았다.

여기서 두 번째 이유가 설명된다.한월이 아는 바로는 나진은 일정 수준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나진이 공격에 대해 전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나진은 수비 편향적인 B등급 지정능력자일 뿐, 무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강한 공격을 무효화할 수 있을지언정 무지막지하게 강한 공격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월은 자신의 자기지정으로 검강을 극도로 강화해, 단 일격에 나진을 쓰러뜨리기로 결정했다.

이제 입장을 바꿔서, 나진을 위주로 말해보자.

나진이 취한 동작 또한 너무나 단순했다. 나진에게는 어차피 한월의 공격을 피하거나 역이용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 가능한 타계책은 오직 하나. 자신의 자기지정을 믿고, 어쩌면 나타날지 모르는 한월의 틈새를 공략하는 방법뿐이었다.

나진은 한월이 달려드는 방향 그대로, 클로를 들이밀고 달려 나갔다.

나진은 아마 바롱과는 차원이 다른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별로 상관없었다.

나진은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자신만큼은 용서할 수 있다고, 당당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갈룸이 취한 동작마저도 단순했다.

나진이 갈룸을 죽이려 달려들고 있다지만 한월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갈룸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갈룸은 그저 나진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죽음으로 달려드는 멍청한 불나방 같은 인간을, 가만히,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말한다.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받음으로써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소년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왔고, 지금 행복하다.

갈룸을 위해 싸우는 소년은 언젠가 갈룸에게도 인정받을 것이다.

갈룸은 소년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때 청년이 말했다.

청년은 말한다.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받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영원히 괴로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일에라도 스스로가 죽음 속에 내던져져, 고통 받고 괴로워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고.

그러나 소년과 달리 청년의 말은 다소 허황돼 보였다. 청년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용서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청년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그들에게서 용서받는다고 해도,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갈룸은 청년의 동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만.

다만 갈룸은 소년보다는 청년이 고귀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에게 용서를 받는다느니 어쩌니 하는 있어 보이는 표현에 넘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쪽은 분명 소년일 터였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갈룸은 청년의 편에 서주고 싶었다.

청년의 말이 맞으니, 그의 방식대로 선택한다면, 청년 또한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갈룸은 단순한 동작을 취했다.

갈룸은 달려드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칼날이 갈룸의 배를 가로질렀다.

클로가 갈룸의 등을 꿰뚫었다.

핏물이 번지지 않았다. 검은색 먼지가 사방에 흩뿌려질 뿐이었다.

먼지가 사방을 뒤덮을 즈음 소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다음, 청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검은 먼지의 괴물은 그들이 지금 이 순간을 불행 속에서 살지 않도록,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말해줘야만 했다.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는 것을.

갈룸은 먼저 정면의 소년에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일이다.”

뒤를 돌아 청년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던 일이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나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겠구나.”

***

소년은 분노에 일그러져 울부짖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다.

소년은 소녀가 남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남은 먼지를 끌어안고 이글거렸다.

청년은 그곳에서 도망쳤다.

분노한 소년에게 대적할 수 없는 자신으로서는 최고의 선택이기도 했다.

청년은 소녀가 남긴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추스른 청년은 친한 여성에게 ‘사건 끝. 안 와도 돼.’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