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015. 지는 거북이 (2)
* * *
처음, 나진은 한월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쇄도대지 안에서 극도로 느려진 나진은 달린다고 달려봤자 보통 사람이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수준에 간신히 미칠 뿐이었다.
클로를 휘두르는 동작도 마찬가지였다.
날을 휘두르는 동작만큼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제법 빠르게 베어낼 수 있게 되었지.하지만 쇄도의 영역 안에서 한월은 어린아이가 칼싸움을 하는 것처럼 불안정한 동작으로 클로를 휘두를 뿐이었다.
가뿐하게 피한 한월이 대검을 내리쳤다.
그대로 나진의 몸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작용했다.
그때부터 한월은 대검의 날이 벼린 부분을 돌리고 대신 칼등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힘 조절에 실패하거나 저쪽에서 자기지정을 해제할 경우, 눈앞에서 사람이 두 동강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월은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진은 아주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나진이 다시 달려들었다.
한월은 이번에는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느릿하게, 그러나 피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나마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날붙이가 한월의 코앞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정지했다. 위압이 맞붙었다가 굉음을 터뜨리며 분산됐다.
한월은 그야말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나 나진은 한월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진은 한월을 괴롭게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도 한월은 괴로워했다.
아까부터 인상을 찡그린 한월은 나진이 조금도 지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게 괴로웠을 터였다.
나진은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 사실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한월과 동등하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적수라도 되는 것처럼 처절하게 날을 휘둘렀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섯 차례의 연격이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한월은 칼등으로 나진의 어깨를 내리쳤다.가뿐한 동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진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데도 나진은 버티고 서 있었다. 아무리 얻어터지더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월은 이 싸움을 견딜 수 없었다. 멈추어야 했다.
“그만하거라.”
그러나 가장 먼저 속내를 내비친 것은 한월도 나진도 아니었다.
주저앉아 둘의 격돌을 멍하니 지켜보던 갈룸이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 그대가 잘 알고 있을 터다.”
“그걸 알아도 해야만 했어.”
나진이 방향을 바꾸었다. 갈룸에게. 한월이 다급히 손을 뻗자 한월의 손끝에 새카맣고 기다란 날이 맺혔다
자기지정에 의해 물질처럼 변한 검기였다. 검기는 나진과 갈룸 사이를 차단하는 격벽이 되었다.
그러자 나진은 격벽에 클로를 박아대기 시작했다.
그것도 실패하자 빠르게 방향을 돌렸다.
이쯤에서 한월이 다시 끼어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어.”
나진이 소리쳤다.
“터무니없는 싸움을 했어야 했던 거야! 그 장소에 있는 게 나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뭘 했지? 나는 달려오지 않는 너를 생각했어.”
한월은 나진이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월은 재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과거는 잊고 지금을 살아가자고 약속할 수 없었다.재인의 과거는 스스로 무너졌지만 나진의 과거는 한월이 망가뜨렸기 때문이었다.
내뱉을 말을 망설이는 동안, 갈룸이 대신 말했다.
“그대는 무가치하게 죽었을 것이다!”
갈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냐?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하겠으나, 그대 앞에 지금의 한월 공과 같은 강대한 적이 나타났다면 그대는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그대는 죽었을 터였어. 그래서 도망친 것을 누구도 비난하지 않으니라.
그런데 왜, 어째서 싸움을 이어가려 하느냐.”
“개소리 집어치워. 다른 사람이 날더러 뭐라고 말하는지는 상관없어! 하지만 그 사람의 남자친구는 나였잖아! 나만큼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평가를 해야 해.
그리고 그 결론이 이거야.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그대가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룸은 자괴감에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월 공이 짐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받고, 그들에게 사죄할 기회를 주겠노라고. 내 가치를 잃지 않게 해주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는 건 아무 소용도 없어!”
나진의 목에 핏대가 섰다.
“장인을 만나서 죄송하다고 무릎 꿇고 사과했어! 다 내 탓이라고,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실토했어! 그리고 그분께서 날 용서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어! 네 잘못이 아니니 괜찮다고, 내 딸을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몇 천 번이고 들었어!
하지만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 아직 남아 있으니까!”
나진의 유백색 위압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수많은 뱀이 그의 몸을 감싸 이리저리 기어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한월은 속으로 나진이 얼마동안 자기지정을 유지할 수 있는지 계산하며, 동시에 몸으로는 갈룸 근처에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나진은 갈룸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런 효과가 없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뚫리지 않을 방어막을 난도질하며 나진이 소리쳤다.
“이제 비로소 기회가 왔어! 누구도 달려와 주지 않고, 적은 결코 쓰러지지 않아! 그래도 내가 옳다고 믿을 수 있다면!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그것만큼은 원망하지 않는다, 알아 들어?!”
그 말을 듣자, 방어막 안에서 갈룸은 주저앉았다.
한월은 그녀에게 많은 사람이 그녀를 용서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다. 사죄할 수 있게.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갈룸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는 한월이 갈룸에게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유일한 것.
갈룸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녀는 하젠야크트의 일부로서 독일에서의 학살을 방관했다. 개체가 분리되었다가 자신만이 사라지는 경우가 생길까 두려워 다른 세 개체가 미쳐 날뛰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거나 혹은 인격 가장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외면했다.
그렇게 행동했던 자신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해줘도, 용서한다느니 뭐라느니 지껄여도 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눈앞의 사내가 그 산증인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진정 스스로에게 용서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갈룸은 짧은 생각 끝에 비로소 답을 얻었다.
그때, 한월이 검강을 뒤집어씌운 대검을 쥐고 나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
유는 지휘봉을 움켜잡았다.
마베 꼬마는 컨디션이 최고조일 때 유성 낙하와 같이 큰 지정력을 요구하는 마법(본인 말로는 대마법)을 일곱 번까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여기저기서 자잘한 마법을 써댄 데다가 길게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기에 남은 스택은 다섯 개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유성이 지면으로 낙하했다.
주변이 민간인이 지나다니는 도로였으므로 유성의 크기는 제한적이었다.
극단적으로는 상가 건물 하나 정도의 거대한 운석을 떨어뜨리던 마베 꼬마였지만, 이번에는 그 상가의 가게 하나 정도 크기였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로 어마어마해서 유로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염동력을 가하고, 또 가했다. 자동차가 지나가지 않는 순간에는 가드레일을 조각조각 뽑아 그대로 날려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성은 특별히 멈출 기세가 없었고, 아마 몇 분 안에 지상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베 꼬마는 마법을 이어나갔다.
“얍! 매직클로!”
행동을 지정할 필요도 없이 가볍게 날려대는 그 공격은 어딘가의 온라인 게임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유는 그녀에게 게임을 가르쳐준 한월을 새삼 원망하며 염동력으로 매직클로를 피해 다녔다.
공기가 죽죽 찢어지며 무시무시한 상흔을 휘갈겼지만 유가 공중을 이동하는 속도가 아슬아슬하게 더 빨랐다.
“제법 하시는군! 받아라! 더블 매직클로!”
“더블만 붙인다고 되는 거 아니거든?!”
그러나 실상은 마베 꼬마가 옳았다. 찢어지는 공기의 칼날이 이름 그대로 두 배로 늘어 유를 잡아챘다.
간신히 피해 다니던 유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자 입고 있던 교복 치마 끄트머리가 죽 찢어졌다.
유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고, 지휘봉을 움직였다.아직까지도 떨어지는 유성으로 날아들던 가드레일 몇 개가 지상으로 향했다.
[행동지정: 마법: 매직 프로텍터!]
물론 가드레일 따위는 가뿐하게 가로막혔다.
그러나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직 프로텍터는 예의 ‘대마법’은 아니어도 ‘중마법’ 정도에는 해당하는, 지정력을 제법 잡아먹는 마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소모전으로 이끌고 가면 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을 마베 꼬마라고 해도 모르지는 않았다.
“유 양, 경고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해두겠소.”
마베 꼬마가 스태프를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앞으로 2분 40초 뒤에 유성이 떨어질 것이오. 동시에 나는 트리플 매직클로를 쓸 거고, 9서클의 화염마법과 9서클의 냉기마법을 사용할 거요.
이쪽은 간신히 기절하기 직전까지 지정력을 쓸 테지만, 유 양은 확실히 제압되겠지. 유 양에게 승산은 없소.”
“누구는 모르는 줄 알아?”
“시간을 낭비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다, 이런 것이군.”
마베 꼬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 양,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오. 유 양께서는 해야 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결코 이치에 맞지 않소.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한국 사극과 조선시대 배경의 영화가 이를 증명하지.”
“또 삼천포로 빠진다.”
“삼천포라니. 확실하게 해두자는 거요.”
마베 꼬마는 쏘아대던 매직 클로를 멈추었다.
유 또한 더 이상 무의미하게 가드레일을 집어던지지 않았다. 말하는 것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해서 설득하는 편이 낫다고 유는 확신했다.
그러자 마베 꼬마가 말했다.
“해야 하는 것을 선택해 그대로 행한다면 아무것도 구할 수 없소. 2분 뒤에 떨어질 운석을 부수어야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잖소, 유 양께서는.”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건?”
“그건, 이런 거지.”
마베 꼬마가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광휘에 대답하듯 하늘 저편으로부터 소름끼치는 굉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는 소스라치게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고, 이후 절망했다. 2분 뒤에 떨어지기로 했던 운석이 그대로 지상까지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 10초, 유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에 염동력을 둘렀다.
그렇게 하여 살아남는 것은 가능했다.다만 지휘봉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것만큼은 자명했다.
8초가 남은 시점에서 마베 꼬마가 말했다.
“아시겠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나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오!”
이제 5초가 남았다.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요.”
3초.
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바로 머리 위에 뜬 운석에 의해 그림자가 사방을 드리웠다.
마치 밤처럼 어두워진 한 가운데로 유는 그렇게 3초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는 다시 3초를 셌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아주 조금, 자신의 콧날이 향하던 만큼의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운석이 있었다.자신의 정수리 위로 고작 몇 십 센티미터.아찔하게 정지한 운석은 자기 혼자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유는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마베 꼬마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말했잖소! 할 수 있는 걸 하겠다고.”
마베 꼬마가 터벅터벅 유에게 걸어왔다. 그러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흘린 슬리퍼를 유의 발에 턱 걸쳐 주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었다. 멍한 얼굴로 유는 마베 꼬마를 올려다보았다.
마베 꼬마는 활짝 웃어주고는 말했다.
“같이 가자는 거요. 한월 공을 도우러.”
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저 어린아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베 꼬마는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안 갈 거요?”
“하지만 나는…….”
“오늘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시오. 사과하면 되는 거니까.”
“아니.”
그때 유가 마베 꼬마의 손을 확 쳐냈다.
“내가 하려던 말은! 나는 네가 살려줄 필요도 없이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거야!”
그러자 마베 꼬마가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랬다간 다쳤을 테지. 그런 일은 내게 있을 수 없소. 한월 공이 용납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동정 따위 받고 싶지도 않아. 이 일을 하면서 죽거나 다치리라는 걸 누가 모르겠어?”
“동료에게는 다치지 않겠지.”
마베 꼬마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할 것이오? 그대야말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건 아니오?”
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은 다른 누군가가 들려주었다.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마베 꼬마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마베 꼬마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그 방향에는 휘황찬란한 화면이 머리가 아프도록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베 꼬마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동시에 마베 꼬마는 운석에 대한 통제권을 놓쳐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운석은 추락을 이어나갔고, 그 밑에 주저앉아 있던 유는…… 누군가가 자신의 옷깃을 잡아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잡아 당겼음에도 불구하고 손은 아니었다.
정확히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건틀릿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