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015. 지는 거북이
* * *
유백색 위압이 폭발했다.
인근와해. 좁은 범위 안에 뭉쳐있던 모든 것들이 거칠게 튕겨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첫째는 나아가고 있던 택시가 왼쪽으로 고꾸라지며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는 것.
둘째는 한월이 방벽을 전개해 택시기사가 다치지 않게 조정했다는 것.
셋째는, 한월이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갈룸이 열린 문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는 것.
휭─ 가드레일과 바닥 사이에서 갈룸은 그런 소리를 들었다.자동차들이 스쳐지나가는, 어쩌면 이곳을 피해 달아나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때의 불쾌감을 갈룸은 떠올렸다.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아 온다는 공포가 불쾌감을 뒤덮었다.
사방이 어두웠으나, 달빛이 산란하는 반사광은 눈에 사로잡혔다. 클로였다.
달빛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그리고 인근와해의 네 번째 결과가 모습을 드러냈다.
넷째는, 한월은 그따위 조잡한 지정능력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강기를 두른 대검이 비집고 들어와 나진의 클로를 쳐냈다.
이어서는 그나마 살아있던 별빛들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영역지정: 쇄도대지]
나진은 온몸에 무시무시한 중압감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한월의 영역지정은 순간마다 대상을 포착해 개별적인 중압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으나, 강도는 바롱이 휘두르던 염동력만큼이나 강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자신의 몸이 기하급수적으로 느려지는 것을 나진은 느꼈다.
그러나 나진은 쓰러지지 않고 다시 갈룸에게 다가갔다.
그때 갈룸은 비명을 지르며 몇 걸음을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월이 나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금 클로를 쳐냈다.
아무렇지 않게, 클로의 날 하나가 부러졌다.
나진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행동지정: 인근와해] 다시 사방에 위압을 터뜨렸다.
그러나 한월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았다.
그저 인상을 찡그리고 왜곡력을 흘려보낸 한월이 말했다.
“그만하세요.”
그러나 기다려도 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월은 롱패딩의 지퍼를 올리며 다시 말했다.
“왜 이렇게 열심이신지 이제 알겠어요. 형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용납할 수는 없어요.”
“이런 일이 어떤 일인데?”
나진이 갑작스레 묻자, 한월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나 한월은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정을 강요하는 일이요.”
나진은 잠시 갈룸을 돌아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아무리 원망스러운 너라도 그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네.”
나진은 코트를 동여맸다.
“나는 그 사람이 죽은 뒤에야 울어댔으니까.”
한월이 대검을 움켜쥐었다. 직감적으로 나진이 무엇인가를 저지르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원거리에서 싸울 수단이 없는 나진이 전조가 뚜렷한 공격을 준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월은 이대로 맞받아치거나 먼저 달려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직후 한월은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그것은 나진 그 자체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진이 코트에서── 언젠가 런던에서 입고 다녔던 코트에서 꺼낸 무엇인가 때문이었다.
거리 탓에 시각적으로는 정확히 뭐라고 단정할 수 없었지만, 한월은 그것이 어마어마한 지정력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월은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무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천천히 몇 걸음을 다가가자 지정력 덩어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실험실에서 사용할 법한 원형 액상이었다.그 안에 커다란 눈알이 담겨 있었다.
한월이 지금이라도 달려들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나진이 말했다.
“바롱의 눈알이야.”
그때 한월은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파계종의 신체와 인체를 결합하여 작용하는 경우가 있고, 런던에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고.
그 사례가 타락한 기업인이라고 한월은 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때 사용된 눈알이 지금 나진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게 있으면! 나는 B등급의 염동력과 그만큼의 방어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돼!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등바등 버티고 서려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지 않아도 돼! 누구에게나 강자로 인정받을 수 있어! A등급의 촉망받는 지정능력자인 너라고 해도 확승을 장담할 수 없는, 진정한 강자가 된다.”
한월이 대검을 허공에 휘둘러 강기를 감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묻고 싶다.”
한월은 나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상황과도 나진에게 주어진 것과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나진은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고, 그저 말한 그대로 묻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정의롭다는 거야? 뭐가 영웅이라는 거야? 너는, 너는 강할 뿐이잖아.”
나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 위기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려는 어린아이를 사로잡아 가까스로 내놓았던 답을 빼앗고…… 설령 그 답으로 인해 괴로움에 빠지고 고통을 겪더라도 당당하게 살아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짓밟아 인형처럼 살아나가게 한다니.
그걸, 지금까지 모두가 그걸 구원이라고 했던 거야?”
한월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나진이 말을 가로챘다.
“너는 타인의 부채의식을 빌미로 삼아 네 바람을 성취할 뿐이야! 그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건 네 말이 옳고, 너 자신이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네가 강하기 때문일 뿐이야!
그런데, 그런 네가! 고작 너 같은 놈이 영웅이라고?”
나진은 분노에 달아올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감정이 가라앉기도 전에 한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요.”
한월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울고 있잖아요.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를 내뱉는 법을 몰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잖아요! 손을 뻗어 남을 기다리는 행위가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거라고 멋대로 생각해서. 눈물까지 집어삼키고 그냥 이러고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구요!제 바람은! 결코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않는 겁니다!”
소년은 대검을 짚어 다시 일어섰다.
한월이 내뱉은 것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떠오르는 진심의 조각들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소녀가 이 세상이 그렇게까지 어둡고 탁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괴로움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어 떳떳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검이 되었다. 새카만 형체가 한월의 검을 뒤덮고 이어서는 검을 부여잡은 양팔까지 휘감았다.
그것은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힘이었다. 주변 사람들조차 알맞은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그 힘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재인에게 있어서 그 검은 형상은 방패였다.
세상으로부터 비난받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입을 때 눈앞에 나타나 아픔을 막아주었다.
마베 꼬마에게 있어서 그 새카만 형체는 뿌리였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휘둘리기만 하던 삶을 한월이 붙잡아 이곳에 자리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유에게 있어서 그 어둠은 안식처였다.
자신의 길을 끊임없이 의심하던 그녀를 한월이 비로소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월은 그 이름들에 납득할 수 없었다.
한월은 아직까지 자신의 힘이 무엇이라고 뚜렷하게 정의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망을 근본으로 삼아 바라는 것을 관철할 수 있게 해주는 힘.
상처를 꿰매고,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기도의 도착지.
한월은 한참이나 그 이름을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서 정했다.
한월은 갈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말조차 내뱉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마음만큼은 분명히 정해져 이곳에 한월이 서 있을 수 있도록 격려한다.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준다.
그렇다면 그 힘은 분명── 무슨 일이 있어도 뚫고 지나가는 신념.
[자기지정: 돌파]
그리고 그때, 다른 누군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액상 용기를 드높이 쳐들었다.
그것만 있다면 눈앞의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다시는 누구도 잃지 않을 수 있다.
바라고 바라던 강자의 자질은 고작 손 안에 사로잡혀 있다.
나진은 용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간신히 눈알을 담고 있던 유리는 박살 나고 그 안에 담겨 있던 흉흉한 붉은 동공을 드러냈다.
자, 이제 그것에 손만 뻗으면── 목소리가 턱끝까지 차올랐다. ‘드디어.’ 라고 중얼거리는 환청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마침내 나진은 자신의 발을 들어 그 혐오스러운 눈동자를── 뭉개뜨려 버렸다.
일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달려들던 한월조차 지금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해 멈추어 섰다.
그러나 나진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다. 나진은 고개를 숙인 채 터뜨려진 눈알만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나진은 앞을 보고 말했다.
“내 말을 도대체 어떻게 들어 처먹은 거야.”
나진은 양손에 클로를 붙잡았다.날이 부러지거나 무뎌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약한 것들이었다.
지금의 나진에게 있어 한월을 쓰러뜨리는 것은 요원했다. 기회가 있었으나 그것은 나진 스스로가 걷어찼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 환청이 들리느니 어쩌니 하는 부작용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나진은 그저 하던 이야기를 끝마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 나는 도망쳤다! 약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뭐? 지금은 강해졌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쓰러뜨리면 된다고? 죽은 사람을 도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야? 그 녀석은 강한 사람을 원했던 게 아니라고!”
나진은 다시 코트의 단추를 여몄다.
어쩌면 흐르고 있을지 모르는 눈물을 클로 날 속의 손바닥으로 닦아 내렸다.
이렇게나 당연한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날 나진이 해주지 못한 것은 강한 사람으로 있어주는 게 아니었다.
파계종에 맞서 싸워 그들을 쓰러뜨리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나진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이 원했던 것은.
믿음직스럽지 못해도 좋으니까. 약하더라도 좋으니까.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도 좋으니까.
“잘 들어라, 쇄도. 나는 네가 쳐놓는 방벽 하나 뚫지 못하고, 네가 휘두르는 칼날 하나 막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딱 한 명이라도 좋으니─ 자신 앞에 버티고 서주는 누군가를 바랐던 거라고.
“반드시 해내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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