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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84화 (84/112)

〈 84화 〉 014. 두 마리의 자라 (2)

* * *

“상황을 정리해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30분 전에 재인이가 갈룸을 데리고 도망쳤어. 재인이가 통상적이지 않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게 가능해?”

“음, 아뇨. 읽는 그대로 현실에 불러내는 능력이 있다곤 해도 본인이 구조를 완전히 납득해야 하거든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우주비행선 이런 건 애초에 안 되고. 언니가 헬기 설계도 같은 걸 배운 걸 본 적은 없네요.”

그렇다면 재인은 차를 타고 한월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동시에한월과 마베 꼬마는 각자 능력으로 재인 쪽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한월이네는 한참 전부터 종로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으니 인천 동북부에서 이미 합류했겠지.

따라서 재인이 데리고 있는 갈룸도 한월에게 되돌아오게 되었을 테고.

우리는 지금에서야 뒤쫓는 입장이다.

“시간이 좀 늦어졌지만 상관없어요. 종로구 본부로 다시 향할 거예요.”

“확실해?”

“확실해요.”

유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한월과 마베 꼬마가 본부로 향했던 것은 그곳에 있는 관측 장비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이 관측 장비란 전국에서 발생하는 위압을 감지하는 설비인데, 작동을 위한 절차가 관련 조약에 따로 규정돼 있어 사용자가 현장에서 확인 절차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새카만 칼날들 팀은 아공간의 위치를 탐지하기 위해 관측 장비를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시간상 한월은 그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쪽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갈룸을 회수했으니 관측 장비가 있는 본부로 돌아갔을 테고.

재인이가 갈룸을 사로잡으러 이미 움직였는데도 어째서 한월이가 종로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불필요한 과정을 거친다는 걸까.

그 부분을 묻자, 유는 깔끔하게 정리했다.

“예쁜 여자애가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눈이 홰까닥 도는 스타일이거든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은 종로구의 본부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든지, 아니면 한월이가 그쪽으로 가는 도중에 따라잡아 갈룸을 바람대로 사살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적이란 오직 말이 쉽지, 도저히 우리끼리 달성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먼저, 본부에서 한월이네와 싸우는 건 무리야. 본부에서 우리를 신뢰해줄지 한월이네 작전을 밀어줄지 확답할 수 없어. 아니, 확답하기 어렵다기보다도 굳이 비정규 B등급과 정규 B등급 각각 한 명의 말을 믿고 따라주느니, 새카만 칼날들을 돕겠지.”

유는 입술을 으득 깨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쪽은 유의 기분을 일일이 감안해줄 수가 없었다. 말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본부에서 싸우는 걸 포기한다고 해도…… 우리는 한월이네의 목적지만 알 뿐이지 가는 경로는 알지 못해.그쪽은 마베 꼬마와 한월이가 지정능력으로 어디서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잖아. 그렇지 않고 택시를 탄다 해도,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가 얼마나 많냐고.”

“이제부터 생각해야죠. 다만 생각대로 안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결국은 이쪽에서 더 빠르게 본부로 이동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으면서 가능하면 경로에서 마주치길 바라는 게 낫겠네요. 헬기는 이제 5분 안에 도착할 테니까. 앞지르는 건 아슬아슬하게 가능해요.”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읍! 읍!”

“앗, 야, 테이프 풀렸다.”

“아, 제가 묶고 올게요.”

유가 책상에서 일어나 청테이프를 좍 뜯었다.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아으, 이거 생각보다 잘 안 묶이네요. 영화에서는 청테이프만 있으면 다 틀어막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됐는데, 침 때문에.”

그러면서도 유는 성실하게 테이프를 감아댔다. 둘둘둘둘. 그 말마따나 벗겨진 테이프에는 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물론 괜찮았다. 언니가 동생한테 묶고 있는 거니까.

“자, 사랑하는 동생아? 언니 말 듣자?”

그때, 랑이 입 안에 씹어 모아놓고 있었던 테이프를 퉤 뱉었다. 테이프 뭉치는 내게 향했다.

그러나 날아가던 테이프는 염동력에 의해 천천히 정지했다.

그 틈을 노렸는지 랑은 말했다.

“나도 데려가라니까!”

“유, 확실하게 묶어줘.”

“알았어요.”

“아앗! 나도 데려가! 야, 공익! 면제! 5급! 나도 데려가라구!”

“테이프 말고 다른 건 없던가? 명색이 방재실인데 뭐 천조각 같은 것도 없네.”

“방재하고 관련도 없겠죠, 천은. 아무튼 제가 열심히 묶을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유는 침 때문에 입을 막는 건 포기해버렸다.

다만 도망치지 못하게 손을 더 확실히 묶을 뿐이었다.

이제는 바둥거리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 랑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도 데려가아아……. 헬기도 내가 불렀잖아아…….” 하며 간청했다.

이미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랑 앞에 섰다.

“안 돼.”

이쪽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나와 유의 태도가 이렇게 된, 그리고 랑이 결박된 사정을 설명하자면 의외로 간단하다.

랑이 자기까지 이 상황에 끼게 해달라고 졸랐고 우리 둘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아니, 거절했다기보다는 금지했던 것이지.

그런데도 따라가겠다고 한참을 징징거려서 결국 극단적인 수단이 동원됐다.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닌가? 하고 물었지만 언니 쪽에서 ‘더 심하게 하는 수도 있어요.’라고 하니 뭐, 가풍이라고 쳐두고…….

무릎을 살짝 굽혀서 랑과 시선을 겹쳤다. 어린아이 특유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눈빛이 따라붙었다.

부담스러워서 슬쩍 피하자 랑은 다시 손발의 테이프를 뜯어내려 몸을 비틀어댔다.

그러면서 외쳤다.

“야! 공익! 나한테 좋은 수가 있어! 언니! 진짜 믿어 달라니까!”

“좋은 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어. 어느 경로로 가고 있는지. 이미 다 알아냈어! 나, 도움이 되는 주인이야!”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유에게 물었다.

“너희 계열사 중에 통신사도 있던가?”

“저희 회사 아니고, 거기 있는 테이프 꼬맹이 회사네요. 그리고 계열사 중에 통신사는 없구요, 무엇보다도 통신사라고 해도 위치추적을 한다든지 그런 거 못할 걸요?”

나는 랑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다는데?”

그러자 랑은 뭐가 서러웠는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근래 투정을 부리는 게 줄어 우는 모습을 못 보았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언니 쪽에서는 여전히 휴대폰으로 인천과 종로 간 경로를 알아보고 있을 뿐이다.

나도 ‘모르는 척 대열’에 합류할까, 하고 일어섰는데 랑이 우는 어린아이 특유의 서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히끅, 휴대폰, 갖고 와아아.”

“그래, 오늘은 폰 게임 해도 되니까. 그런데 손도 묶여 있잖아.”

“안 해! 서버 점검중인걸! 그리고 히끅, 내가 바보야? 내가 멍청이야? 둘이 싸우러 가는데 어떻게 그래! 어? 어?”

농담이었다.

그래도 우는 소리가 좀 줄어들었다.이쪽은 낮게 한숨을 토하며 랑의 주문대로 해주었다.

휴대폰을 켜서 ‘언니2’라고 저장된 번호에 전화를 걸어주고 랑의 귀에 수화기를 갖다 대는 것이다.

그러자 랑은 수화기 너머의 ‘언니2’와 매우 유의미해 보이는 대화를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자 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 귀에 갖다 대고 있지는 않았다.

즉 유는 ‘언니1’은 몰라도 ‘언니2’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2번이라는 건 누구지? 하고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새 랑은 통화를 끝냈다.

그러면서 벌개진 얼굴로 코를 킁 삼키고는 독기와 자신감에 가득 차서 소리쳤다.

“야! 벌써 나왔다구우. 어디에 있는지! 켈룩, 으우, 당장 알려달라고 부탁해봐.”

“부탁합니다, 주인님.”

“싫어! 데리고 가면 말해줄 거야!”

돌겠네.

이쪽은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랑이 이 상황에 뭔가 공헌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해야만 했다.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받아두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서 유에게 허가를 구하는 얼굴을 하자, 유는 어깨만 으쓱했다.

“데려가겠어요, 제가?”

“아니.”

나도 안 데려가고 싶다.

농담이 아니고, 오늘은 싸우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싸우는 대상은 서로 죽일 의도만 없다뿐이지 바롱이나 흉물보다도 훨씬 위험한 존재들이다.

아마 단신으로도 바롱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만한 녀석들을 셋이나 상대하러 간다.

흉물과 바롱이 랑을 억지로 끌고 갔을 때도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그보다 더 심각한 현장에 랑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문제는 랑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점이다.

랑은 ‘언니2’말고도 다른 어딘가에도 계속 전화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머즐드독스의 관리부서 부장이었다.

분명 총수의 딸의 전화에 부담스러워하는 평범한 직장인 아저씨일 터였고, 따라서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통화 내용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됐어. 나도 데려가!”

통화가 끝나자 주장이 이어지는 것은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나, 특수부대 동원했어! 도움 돼!”

“거짓말하지 마.”

유가 지적했다.

“너한테든 나한테든 총수가 함부로 부대를 내어주는 일은 없었어. 오빠는 몰라도 나까지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으으…….”

랑은 바로 움츠러들어 볼멘소리만 냈다.

아마 거짓말이라는 지적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지. 그러나 지적을 당하고도 포기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 결국 나까지 나서서 한마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무릎을 슬쩍 굽히고 랑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동정심을 부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제1경인고속도로.”

“응?”

“제1경인고속도로로 갔댔어. 지금 서인천IC 지나고 있다고.”

“어, 어? 정말?”

내가 되묻는데, 유가 일어섰다.

“오빠, 옥상으로 가요. 헬기 도착했대요.”

“앗, 언니! 나도 데려가! 사실대로 말했잖아!”

“사실대로 말하면 데려가준다고 한 적이 없잖아.”

유는 매몰찬 어조로 그렇게 받아쳤다. 그녀는 묶인 채 고정돼 있는 랑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이쪽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유에게 다가갔을 때 나는 유가 조금도 매몰차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는 잔뜩 찡그린 채, 괴롭게 말하고 있었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아까부터 왜 이렇게 생떼만 써? 둘이 같이 살더니 닮아버렸어, 아주.”

“하지만 나는 머즐드독스 차기 총수야!”

랑이 소리쳤다.

“언니하고 공익은 B등급 지정능력자일 뿐이지만, 나는 세계 최고의 군수업체 차기 총수야. 둘이서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여기서 계속, 도움 받고 구경하는 신세로 지낼 수 없단 말이야.”

그때 유는 정말로 매몰찬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냥 걸어 나가야만 했다.그것이 독선적인 언니로서 합당한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뻔뻔스러운 부하라서 그렇게 할 수 있었지.

하지만 유는 결코 그런 언니가 아니었다. 유는 불안정한 톤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수부대도 못 부르면서 무슨 차기 총수.”

“하지만 무기는 돌려받았어. 건틀릿, 개조도 다 됐고.”

이야기가 그 방향으로 흐르자 나는 끼어들었다.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네가 싸우는 건 절대로 안 돼.”

“왜? 저쪽에서는 도움 받은 사람들이 함께 싸워주잖아! 왜 너만 너 혼자서 싸워? 뭐, 왕따야? 찐따야?”

랑은 답지 않게 이를 부득 갈았다.

그리고 나는 나답게 이를 부득 갈았다.

“그래, 나 찐따 맞다. 그래서 네가 말한 대로 내가 도와줬든 뭘 했든 나한테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을 억지로 같이 세워서 싸운다든지, 그런 건 도저히 못하겠다. 그건 그냥 한월이의 방식이야.”

“아니, 이건 머즐드독스의 방식이야.”

기가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랑은 할 말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었다.

“너를 위해서 싸우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해야 내가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싸우는 거야. 나는 머즐드독스 차기 총수고, 내가 짊어진 것들이 잔뜩 있으니까!

그런데 뭐? ‘나 찐따 맞다.’라고? 잘 들어! 너는 왕따도 찐따도 아니고 내 부하야! 네가 죽는지 사는지 네가 나를 버리고 가는지 데리고 가는지 전부 내가 정해! 내가 정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이번 달 월급 없어!”

아까부터 묶인 채 버둥거리다가, 이제는 울화까지 토해낸 랑은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넋을 잃고 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분명 좀전에 유가 지었을 만한 표정을 하고서 겨우 이렇게 물었다.

“머즐드독스의 방식이라는 게 고작 그 테이프 하나도 끊어내지 못하는 거야?”

“이걸 내가 끊어내면 데리고 갈 거야?”

“그래, 그 정도는 돼야 머즐드독스의 방식이라는 걸 믿어주지.”

“말 다했겠다?”

“어, 말 다했다.”

“아뇨, 오빠, 지금 그 발언은 않았던 편이 나았을 것 같은데요.”

유는 손가락을 들어 창문 바깥을 가리켰다. 방재실 특유의 좁은 창문 너머로부터 새카만 하늘이, 그리고 그 하늘을 유성처럼 가로지르는 금속 덩어리가 눈에 밟혔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금속 물체는 창문을 박살 내고 방재실 내부로 들어섰다.

깜짝 놀라 가로막으려는데, 물체는 방향을 틀어 천천히 랑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비로소 그것이 눈에 익은 큐브임을 알 수 있었다.

큐브는 내가 알던 방식 그대로 작동해 랑의 작은 손을 일차적으로 휘감았다.

이어서 금속을 두른 랑의 손이 테이프를 모조리 찢어발겼다.

나머지 파츠들이 모조리 달라붙어 랑의 한쪽 팔 전체를 감싸버렸다.

벌떡 일어서서 테이프 뭉치를 내게 집어던진 랑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게 머즐드독스의 방식이야.”

파티원이 하나 늘어버린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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