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014. 두 마리의 자라
* * *
택시는 생각했던 만큼의 시간 안에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각했던 영역 안에서 머무르지는 않았다.
나는 갈룸을 35층 방재실에 두고 유를 만났다.
돌아왔을 때 갈룸은 그곳에 없었다. 정돈돼 있었던 각종 기재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창문은 박살 나 있었다.
개판이 된 전경이 머릿속에 박히자 절망감이 뒤를 이었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든 일들이 나의 일과 다른 규모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스로의 작음을 자각해버린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랑에게 전화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제 올라가도 돼?’ 하고 묻는 랑에게 나는 ‘아니, 이쪽에서 데리러 갈게.’ 라고 했다.
랑은 경비건물 안쪽에서 건어물 따위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얼핏 보았을 때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까놓은 건어물 봉지가 네다섯 개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결코 웃을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랑은 나를 보자마자 와락 이쪽으로 안겨 왔다.
“거, 걱정했어!”
“네가 왜 나를 걱정해, 이 녀석아.”
오히려 이쪽이 더 걱정이었다. 유가 여기까지 오면서 택시 기사를 얼마나 닦달했는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때마침 나보다 몇 걸음 뒤를 따라오던 유가 드디어 경비건물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유는 랑을 보자마자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윽고 걱정했다는 얘기가 격한 어조로 표현되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잠시 뒤에 들을 수 있었다.
제 언니를 보고 침착해진 랑은 사건의 전말을 매우 단순하게 설명했다.
누군가가 방재실 창문을 깨고 들어와서 갈룸과 짧은 전투를 벌이고, 이윽고는 갈룸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CCTV화질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여자였고, 그 여자는 “책을 몇 권이나 들고 있었어.” 라고.
그 말에 나와 유가 모두 움찔 떨었다.
“걔야?”
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 언니 맞아요. 여기저기 좀 다쳐서 이번 사건에서는 배제시켰는데…… 그 언니 생각을 못 했네요.”
“미치겠네.”
재인이 갈룸을 데리고 갔다면 자연스럽게 갈룸은 한월에게 돌아간다.
한월은 갈룸을 죽일 마음 따위는 전혀 없으니, 일이 원점으로 돌아가다 못해서 아예 꼬여버린 것이다.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이대로 한월에게 사태를 맡겨야 하는 것인지.
물론 나는 그런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한월이 말하는 청사진은 언제나처럼 한월을 제외한 다른 모두에게 있어 허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가 한월에게 책임을 전가해야 하는지 생각한 것은…… 나로 인해 일이 더 꼬여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가령 이대로 내가 갈룸을 되찾기 위해 한월에게 찾아가고, 거기서도 설득에 실패해 한월과 다투게 된다면?
그래서 내가 ‘원래대로였다면 성공적으로 갈룸과 세계 모두를 구해냈을’ 이야기의 악역이 된다면?
나 하나가 발버둥을 친 탓에 아슬아슬하게 맞을 수 있었을 시간이 뒤틀려버린다면?
그런 미래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이성에 근거해서, 더는 위험성을 늘릴 수 없다는 계산에 근거해서 나는 이제 갈룸을 놓아줘야만 했다.
그 허세부리는 어린 파계종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사느냐 죽느냐는 이제 나의 손에서 떠난 문제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위험성이 아니라 갈룸 그 자체에 집중할 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갈룸은 어떻게 해야 만족할 수 있지?
희미하게, 정말로 미약하게 그런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갈룸이 만족하는 방식이 맞는 건가? 그 아이는 필사적으로 자기 가치를 찾으려고 했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 시도는 너무나 미숙하고 불완전한 것이어서 황당하게도 자기 자신의 죽음만이 답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한월이 손을 뻗어 붙잡고 끌어올리면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붙잡혀 끌려 올라간 사람이 본래부터 바라던 방식이었는지, 아니면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타협한 결과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어느 시점에서 나는 그 문제의 답을 알고 있었는데도 ‘잊어버린’ 것이다.
억지로라도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는 한월의 덕에 살아 있었다는 생각만이 남는다.
“유.”
“네?”
“너는 일이 이렇게 되서 행복해?”
“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친구들하고 싸우게 됐잖아. 우리가 저지른 일은 그냥 방해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나는, 나는 모르겠어. 다들 자기가 선택한 것에 만족하고 있는 거야? 이런 선택을 해서 다행이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길 잘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아니면 그냥…… 이렇게 됐으니까 어쩔 수 없지,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월급을 살짝 더 받는 대신 죽을 확률이 터무니 없이 높은 공익근무 요원이었다.
한월이 때마침 달려와 주지 않았다면 죽었을 만한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가령 랑을 처음 만났던 날만 해도 나는 언제나처럼 한월 덕에 목숨을 건졌다.
그 때문인지 가끔 나는 그날 내가 죽어버리는 꿈을 꾸고는 한다.
그 다음의 전개를 나는 손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한월은 그날 폴트와 맞서 싸우게 된 유를 성공적으로 설득시켰을 것이다.
유는 한나진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연 덕분에 목숨을 건져 겨우 살아남아 있던 동생에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오히려 한월이 ‘네 동생이라면 내게 맡겨둬!’라고 소리치며 바롱에게 달려 나갔을 것이다.
한월은 B등급인지 A등급인지 상관없이 바롱 정도는 가뿐히 때려잡았겠지.
그리고 신사와 겨루다 상처 입은 유와 재인에게 결정적인 타이밍에 돌아오고는 ‘함께 싸우자!’ 같은 대사를 쳐주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터무니없게도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반면 지금의 세상은 그 대안에 불과하다.
그날 우연찮게도 한나진은 살아버렸다. 랑을 살리기 위해 달려 나가는 것은 바롱 따위 아무렇지 않게 이길 수 있는 패딩 입은 소년이 아니라, 바롱에게 맞선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코트를 입은 청년이었다.
언니는 동료가 아니라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갔고 재인과 한월은 다쳤다.
랑은 누구보다 소중히 생각했던 메이드를 잃었고 유는 동료와의 관계가 엇나가버렸다.
결과만 말해,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일을, 내가 해낸 것들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인식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번에 죽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행하게 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내가 없는 세계에서 어쩌면 갈룸은 자신이 죽는다는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세계에서는 비록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지만 그러나 훌륭하게 한월의 작전이 들어맞고, 모든 이들이 자신의 결과에 만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어.’가 아니라 ‘행복하게도 이렇게 했어.’를 입에 달고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끼어드는 것은 올바른지, 어떤지, 이 사태에 끼어들고 싶다는 것이 단순한 나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과정이 아닌지…….
그 과정을 통해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방해받고 또 상처 입는 것은 아닌지.
나라는 대안은 한월이 만들어가는 정사를 제대로 대체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안개에 휩싸인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벼랑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앞걸음이 아니라 나 혼자서 넘어질 뒷걸음질이 나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랑은 풀쩍 뛰어, 나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멍청이.”
“진짜 멍청해.”
유가 제 동생에게 호응해줬다.
그러나 그 웃음기 섞인 이야기는 나에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갈룸을 죽이는 것이 갈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올바른 길이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살아남아 모두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한다.
분명 그럴 터였고…….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어, 행복하게도 이렇게 했어, 둘 다 아니야.”
랑이 말했다.
“나를 봐.”
두 눈동자가 이쪽을 쏘아보았다.
“바보 멍청아, 네 말대로 누구는 내가 다른 일을 했을 때보다 불행해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어쩌라는 거야. 네가 아니라 폴트가 나를 매일아침 깨워줬을지도 모르고 그 일에 도 기쁨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네가 나를 깨워주는 것에 행복해하고 있어. 네가 해주는 밥이 폴트의 밥보다는 분명 맛이 없지만 폴트의 밥을 먹으며 행복해하지 않고, 네 밥을 먹으며 행복해하고 있어.
나는 여기에 있어. 어디에도 가지 않아. 왜냐하면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 이 길이 나으니까.”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셔츠 칼라를 붙잡고 있던 랑은 위로 딸려 오다가 결국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굳센 눈빛만큼은 변하지 않고, 분명하고 뚜렷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말했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게 아니야. 뭘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다른 ‘대안’보다 이 ‘정사’가 나은 게 아니라구.
나는, 내가 생각하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결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는…….”
랑은 말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다.”
랑은 말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자신의 하인이 주인을 의심하는 일 따위 없도록.
답지 않게 단정한 얼굴로.
“너는 잘못된 미래가 아니야. 억지로 끼어든 단역도 잘못 흘러간 대안도 아니야.
그러니까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끝말은 언니가 맺어주었다.
“그렇죠.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인걸요.”
속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성격이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말해두자면.
이 자매는 참 좋은 녀석들이다.
* * *